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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87화 (87/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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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금화 수천 닢은 족히 나갈 것 같은 보물상자 두 개와 신원보증을 위한 영주의 추천서. 사막의 태양과 열기를 막아준다는 주문 망토 세 벌과 아리안 전역이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는 군사용 지도까지.

이 도시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뽑아낸 벨로크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다시금 여행길에 올랐다. 시뻘겋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수십 명의 병사들이 척척 도열해 있었다. 그 사이로 짐가방을 매고 있는 낙타 네 필이 보였다. 짐이 많으니 한 마리를 더 챙겨 준 것 같았다.

“송별식이 성대하군. 낙타를 타보는 건 또 처음인데.”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낙타의 근처로 다가갔다. 과연, 그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서인지 유독 한 녀석만 덩치가 거대했다. 아무리 봐도 첫인상과는 달리 센스가 있는 영주였다. 등에 혹이 나있는 기다란 속눈썹을 가진 털북숭이를 슥슥 쓰다듬고 있자니. 뒤편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어젯밤의 목욕물··· 잊지 못할 거야. 온몸의 피로가 다 풀린 느낌이라니까?”

늘씬한 가죽 갑옷을 입고 그 위에 로브를 걸친 카라가 어깨를 휘휘 저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음··· 확실히.”

아델 역시 동감하는지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는 영주성을 한 번 바라봤다. 세상에 통짜 대리석으로 지어낸 욕탕이라니. 어마어마한 돈 지랄이었다. 물론, 그만큼 훌륭한 설비이긴 했지만··· 세 사람은 곧 능숙한 몸놀림으로 낙타 위에 올라탔다. 지금 그들에게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작게는 사로잡힌 동료를 구하기 위해. 크게 본다면 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원대한 여정이었다. 물론, 이를 모르는 알타니스의 성주는 어떻게든 벨로크 일행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말 더 머무르지 않아도 되겠소? 내 경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사막을 횡단하는 일은 결코 보통 일이 아니오. 갑작스럽게 발이 꺼져 토사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땅 밑, 하늘에서 습격해올 수도 있소. 그것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이오. 그러니까, 내 말은 단 몇 주라도 이곳에서 생활하며 이곳의 기후에 적응하란 뜻이오.”

그는 이 대단한 전사들을 수하로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들이 도시에 조금만 더 머물러주어 그의 군대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괴물들이 나타난다면 이를 억제해주기를 바랐다. 어젯밤. 벨로크 일행으로부터 괴인의 정체와 아리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음모에 대해서 들었으니까!

“미안하오.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오.”

벨로크는 짧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성주의 제안을 거절했다. 시발. 벨로크라고 안락한 생활이 싫겠는가? 그 역시도 조금 자리를 잡을만하면 세상을 떠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지금 그의 무력과 가진 재산을 펑펑 쓴다면 어딘가 괜찮은 땅에 대저택 하나를 짓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일꾼들이나 농노 역시 구할 수 있겠지. 떠돌이 기사가 아닌, 한 지역의 유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놈의 엿 같은 세상이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제발 어딘가로 떠나라고 괴물 좀 죽이라고 채찍질만 할 뿐이다. 벨로크의 표정이 구려지는 만큼, 성주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곧 지배자다운 능숙한 가면을 쓰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무튼··· 고맙소. 경들이 알려주었던 사실들. 내 꼭 다른 영주들에게도 알리고 대비를 하리다. 세상에··· 그런 터무니없는 짓거리를 벌이려고 하는 집단이 있다니. 경들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믿기 힘들었을 얘기요.”

과연, 성주의 말을 다른 영주들이 믿을까? 당장 성벽 밑의 괴물들을 잡아 죽이기 바쁜 그들한테 인장 찍힌 편지 따위가 통할까? 벨로크는 회의적이었지만, 뭐,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낙타를 몰았다. 그들의 뒤에서 철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우렁찬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알타니스를 구해주신 영웅들을 향하여 경례!

-충!

요란하게도 하는군. 준비하느라 병사들이 고생했겠어. 벨로크는 피식 웃었고, 카라와 아델은 가슴을 쭉 폈다. 그들은 곧 영주성을 벗어나 대로변을 건너 그들이 지나왔던 관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물건을 가득 지고 땀을 뻘뻘 흘리는 짐꾼, 터번 쓴 배 튀어나온 상인, 장바구니를 든 중년 여인, 좌판을 깔고 과일을 팔아 재끼던 과일 장수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일행을 지나쳐 갔다.

그중에서 유독 한 사람.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몇 개는 작은 사내. 수염 기른 난쟁이였다. 그는 뭐라 뭐라 중얼거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벨로크가 그 입술을 읽었다.

-한순간에 거물이 되었더군. 고맙네.

뭘, 우리가 더 고맙지. 벨로크 역시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를 보던 카라가 한 마디 뱉었다.

“어젯밤 우리 장비를 수리해준 장인이 저 난쟁이지? 오해가 풀렸으니. 처우가 좀 달라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람의 마음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아니겠습니까? 언제 영주가 변심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그 망나니 아들놈이 또 행패를 부릴지도 모르지요.”

아델의 말에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결국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뭐, 알아서 잘 살겠지. 일행은 그렇게 관문을 넘었다.

곧 이어 다듬어진 탄탄한 도로가 아니라, 발이 뭉텅뭉텅 빠지는 사막의 토사가 그들을 반겼다. 회반죽 담장이나 천막, 성벽이 없어서 그런지 그늘 하나 없는 열기의 지옥이었다.

“시작이군. 벌써부터 마음이 약해지려고 하는데.”

눈을 찡그린 카라가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쓰고 있던 망토의 후드를 올렸다. 곧 시커먼 안광이 지며 요사스러운 갈색 눈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벨로크와 아델 역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그러고 나서 세 사람은 감탄했다.

과연, 성주가 자신만만하게 얘기할 만한 물건이었다. 몸으로 내리꽂히는 더위가 한풀 꺾인 것이다. 이 정도라면 갑옷 위에 고기를 올려도 익지는 않겠는데. 아델이 낙타에 매달아둔 짐가방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둘둘 말린 지도를 꺼내고는 손가락으로 가르쳤다.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이 알타니스. 룽겐 대사막은 아리안의 수도를 넘어서 도시 몇 개를 더 지나쳐야 합니다. 거의 끝자락이군요. 하지만···”

아델이 말끝을 흐린 순간. 누런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지도가 거칠게 펄럭거리고, 그녀의 입으로 모래가 턱턱 들어왔다.

아델은 쓰고 있던 후드의 앞섬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이윽고 옅게 기침하고는 말했다.

“어디를 봐도 모래뿐이니···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길잡이라도 붙여달라고 할 걸 그랬군.”

아델의 자신 없다는 말투에 벨로크 역시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야 하나?

“대악마를 죽이러 가는 길에 동행을 요청한다라··· 과연 따라올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반미치광이 같은 놈이겠지. 우리는 그런 놈에게 생명 수당을 꽤나 쥐여줘야 할 거야. 하물며, 낯선 얼굴이 끼어있으면 불편하기도 해. 일단은 가는데 까지 가보는 게 어때? 식량도 많잖아.”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새로운 주문? 카라의 태평한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으니까. 세 사람은 푸르르르 혀를 내밀고 있는 낙타의 고삐를 그러쥐고는 아델의 인도에 따라 길을 나섰다.

아델에게 길잡이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상세하게 그려진 군사용 지도가 빛을 발한 걸까? 일행은 더듬거리면서도 얼추 사막의 길을 횡단할 수 있었다.

선인장을 몇 개 지나치고, 듬성듬성 나 있는 잡초들과 잎 하나 없이 빼빼 마른 나무를 살폈을 때. 어느새 날이 지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 조여 오던 열기 대신, 살갗을 애는 듯한 추위가 찾아온 것이다.

일행은 그나마 평평한 바닥을 찾아내서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아델의 도낏자루를 바닥에 턱 찍어 낙타들의 목줄을 자루에 매달았다. 그러고는 녀석들을 사용해서 하나의 벽을 만들었다.

“으으. 엿 같은 날씨네.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어.”

투덜거린 카라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 들린 장작더미들이 바닥에 착착 쌓였다. 아델은 낙타에 매달아둔 짐가방을 뒤져 훈제한 고기나 마른 과일, 치즈 등을 꺼내서 바닥에 늘어놓고 있었다. 곧이어 벨로크까지 합세하자. 야영 준비가 금세 끝났다.

“스튜라도 끓이고 싶습니다만··· 주변 상황을 보니 도저히 안 될 것 같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아델이 얇은 쇠꼬챙이에 육포를 턱 끼우면서 말했다. 불길에 반사되는 그녀의 강철 그리브가 어째선지 조금 색다르게 보였다. 벨로크는 손을 흔들며 마른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모래 가득한 찌개를 먹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동감이야. 게다가 성주가 챙겨준 건조 식량들의 질이 꽤나 괜찮아. 향신료도 팍팍 친 것 같고··· 과즙도 풍부해.”

카라 또한 아델을 도와 꼬치 꿰인 육포를 불가에 얹어놓고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일행은 그렇게 입가를 우물거리며 배를 채웠다. 중간 중간 모래바람이 불어 음식에 묻는다면 손으로 털어내고 먹었다.

염병. 내가 바랐던 판타지는 이런 게 아닌데. 현실은 언제나 가혹하다니깐. 벨로크는 약간 불평했지만, 그래도 소금 덩어리가 아닌, 육포는 아주 맛있었다. 이제 돈도 많으니 스테이크를 통으로 사서 들고 다녀도 될 것이다. 그래, 그 정도의 재산이지. 죽기 전에 다 쓸 수는 있으려나?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 카라가 말했다.

“결국 또 이렇게 됐네? 괴물을 잡기 위한 여정의 시작 말이야. 또 다른 대악마라니···”

그녀는 로브를 어깨에 걸친 채, 얌전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감성 토로의 장이군. 벨로크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카라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약조를 떠올렸다. 그는 어째선지 껄끄러운 마음을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좋다.”

카라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고개를 홱 돌리며 벨로크를 바라봤다. 갈색깔의 눈동자 안에는 배신감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카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 진심이야? 지금 나를 버리겠다는···”

워워, 벨로크는 다급히 손사래를 저었다. 그러고는 마치, 변명하듯 말했다.

“처음 너를 동료로 받아들였을 때는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또 다른 대악마를 죽이러 갈 줄은 몰랐다는 얘기지. 나는 네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너를 영입했지만, 너는 충분히 제 몫을 해줬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부담감을 느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굳어있던 카라의 얼굴이 슬쩍 풀렸다. 그녀는 턱을 괴며 아델을 한 번, 벨로크를 한 번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 그 뜻이었어? 난 또 뭐라고··· 이 매정한 사내 같으니. 이 사막 한복판에서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 아드리아 왕국 또한 마찬가지야. 지금쯤 왕이 된 공작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찾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카라의 두 눈이 벨로크를 진하게 응시했다. 그녀는 마치, 주문을 외우듯 천천히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

그는 일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입을 떠듬거리며 뭐라 말하려는 순간. 아델이 선수를 쳤다. 불가에 올려놓은 또 다른 육포들을 두 사람에게 건넨 것이다.

“타겠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카라. 너도.”

“으, 응? 맞아. 그래, 먹어야지! 그래야 내일도 또 힘내서 이자벨을 찾으러 가지! 겸사겸사 대악마도 죽이고 말이야!”

아델의 행동에 카라는 화들짝 놀라며 입가로 고기를 가져다 댔다. 그러다가 혀를 데이고 눈물을 찔끔 흘리는 등. 요란법석을 떨어댔다. 그 모습을 보던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애매한 관계에 대한 정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쯤? 네가 이들을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려고? 책임감 없게 싸지르고 그냥 도망치려고? 야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그는 속으로 되뇌며 고기를 한입 물었다. 모닥불의 불씨가 타닥거리고, 바람이 휘이잉 불었다. 그 사이로 낙타들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막의 밤이 깊어져 가는 도중. 카라가 입을 열었다. 한층 침착해진 목소리였다.

“있잖아. 그동안 경황이 없어 말을 못 했는데. 한 번은 되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말끝을 흐린 카라는 손수건을 꺼내 기름 묻은 손을 슥슥 닦았다. 이윽고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지금 우리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지? 또한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이나 힘은 어떤 것들이 있지? 이것들을 한 번 종합해보는 게 어떨까 해. 서로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다면 앞으로의 상황에 대한 대처가 훨씬 편해질 거야.”

일리있는 말 이었다. 게다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벨로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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