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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86화 (8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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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사방에서 몰아치는 사막의 바람과 회반죽으로 지어낸 낮은 담장들을 뒤로한 채, 다섯개의 발이 스스슥 흙먼지를 일으켰다.

벨로크가 밧줄에 꽁꽁 묶인 여인을 끌고 가든 말든, 시커먼 피를 잔뜩 뒤집어쓴 아델과 카라가 그 뒤를 따르든 말든, 도시는 고요했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야밤에도 램프를 켤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 못했다. 또한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위해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남의 일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그저 바닥이 쿵쿵 울려서 몇몇 시민들이 잠을 설쳤다는 것만 빼면은 알타니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자기들이 죽다 살아난 사실을 알고 있을까? 떠오르는 아침 해 대신. 썩어빠진 미라들의 손발톱을 받아낼 수 있었다는 것도 알았을까? 벨로크는 잠깐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잘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조금 그랬다. 그는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보상이라면 영주가 줄 테니까.

그냥 저들은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늘 하던 대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나갈 것이다. 그리고 큰일이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돌아가는 쳇바퀴처럼. 마치, 회색 도시에서 자신이 살아왔던 것처럼.

‘출세한 건가?’

문득 드는 생각에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범인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세상을 겪으며 믿을 수 없는 모험과 업적들을 쌓아내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괴물들과의 사투로 벼려낸 결과라는 것을 알면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다. 벨로크의 싱숭생숭한 마음과 함께 일행은 영주성에 도착했다.

“여러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우선, 영주님께 보고부터 드린 후. 목욕물과 함께 무구들의 수선을 위한 장인들을 준비해두겠습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일행의 무력을 여실히 확인하게 된 반자크가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퍽 정중한 태도였지만, 일행 역시 그들이 해낸 일의 중요성을 알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시장기가 느껴진다. 목욕물과 함께 먹을 것을 준비하도록.”

도끼를 어깨에 척 걸친 아델이 거만하게 말했고, 카라가 꽁꽁 묶여있는 괴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혹시 빈방이 있을까요? 더러워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악마초랑 질경이풀, 광대버섯, 물 약간이랑 연금술용 도구들이 조금 필요한데···”

뭐가 그렇게 많이 필요해? 그냥 칼로 쑤시면서 물어보면 안 되나? 벨로크가 생각했지만, 반자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혹여 쓸만한 정보라도 알아내신다면 저희들에게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하인 몇을 부른 후, 지시를 내렸다. 일행은 하인의 안내를 따라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법사의 실험실을 통째로 빌려준 듯한 모양새였다. 카라가 말했던 물품들 역시 방 안에 그대로 준비되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준비했대?

“권력이 이래서 좋다니까? 봐봐. 말만 하면 다 나오잖아?”

카라는 피식피식 웃으며 허리춤의 룬북을 펼쳐 들었다. 대마도사가 남긴 마도서. 갈드라보크였다. 이윽고 그녀는 요리책을 보듯 마도서를 보며 실험기구들을 요란스레 만지작거렸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갈색 눈과 흥흥거리는 콧노래.

벨로크가 생각하기에 카라는 마도서에 나와 있는 물약을 시험해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인체실험용 표본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발. 그는 약간의 오싹함을 느끼며 괴인의 밧줄을 조금 풀고는 방의 기둥에 묶었다.

“으으으읍!”

괴인은 유일하게 돌아가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저항했지만, 그의 근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결국 실험용 쥐가 된 여인은 어깨를 덜덜 떨어대며 묶여있었고, 그러는 와중에도 카라의 실험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요상한 냄새 때문에 코를 막은 아델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물었다.

“눈금 하나하나까지 맞추는군. 꼭 이래야 하는 건가?”

“연금술이란 게 대부분 그래, 비율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거든. 약간이라도 안 맞으면 말짱 꽝이 되어버리고 말지.”

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손에 들린 플라스크를 조심히 기울였다. 속에 담겨있던 보랏빛 액체 몇 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이는 곧 아래에서 끓어오르던 투명한 유리병에 진득하게 섞여들었는데. 두 가지의 액체가 만나자, 작은 버섯구름이 뭉실 일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유리병들이 덜그럭거렸고, 사발에 담긴 약초들이 갈려 나갔다. 잠시 후, 끈적한 녹색 병 하나를 든 카라가 신나게 외쳤다.

“완성! 이걸로 이제 저년의 굳건한 입을 열 수 있겠어!”

글쎄. 저 상태로 봐서는 안 먹여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벨로크는 벌벌 떨고 있는 괴인을 보고 생각했지만, 곧 이것이 틀려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육체적인 고문을 아무리 가해도 정신마저 제압할 수는 없다. 상대가 거짓을 말할 확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라는 직업은 언제나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사용하니까.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을 수도 있겠지.

‘마법사는 마법사가 잘 알겠지.’

아니면, 그냥 새로운 물약에 대한 실험이 하고 싶었거나··· 벨로크는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여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순하게 처진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머리는 뭇 사람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정체는 사악한 주문을 쓰는 마도사였다. 그것도 도시 하나를 멸망시키려 했던 악귀의 앞잡이였다. 그렇기에 그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한 손으로는 여인의 목을 콱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으으으읍!”

“자. 약 먹자.”

카라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정한 어투와는 달리 억센 손길로 여인의 입에 물려놓은 천을 빼냈다. 이윽고 물약의 뚜껑을 퐁 따고는 입에 물린 후, 목젖을 탁 쳤다. 여인은 컥 소리를 내며 요상한 액체를 꿀꺽 삼켰다.

“하아, 하아. 이 개··· 억.”

여인은 욕설을 내뱉으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이윽고 마법사 특유의 안광이 차츰 흐릿해지더니 동태눈처럼 까맣게 죽어버렸다. 카라는 여인의 뺨을 짝짝 치거나 멱살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럼에도 여인의 멍한 표정이 풀리지를 않자,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 먹혀들었군. 이제 이 년은 우리가 무엇을 물어봐도 바른대로 답할 거야. 언제 밤일을 치렀는지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도.”

“일주일 전, 페르난.”

곧바로 튀어나온 여인의 답에 아델이 얼굴을 붉혔다. 얼마 전, 아스타로트가 보여줬던 악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카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벨로크를 잠시 바라보다가 팔뚝을 탁 치면서 말했다.

“봐··· 봤지? 뭐든 물어보면 돼.”

“음···”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과 소속.”

“아만다. 스콜라.”

“스콜라가 뭐지?”

“마녀들의 집회.”

“집회? 마법사들의 모임 같은 건가?”

“버림받은 양들의 모임. 길 잃은 우리들을 거두어 주는 요람.”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뚱딴지.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엉뚱한 사람.”

벨로크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가 카라를 바라보자, 카라가 그의 팔뚝을 탁 잡으며 중얼거렸다.

“심령이 제압되어있는 상태라 완숙한 언어구사는 힘들어. 최대한 간결하게 물어보자. 그리고 스콜라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게 있어.”

벨로크는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물었다.

“너희들의 목적은 뭐지?”

“아리안 왕국의 멸망. 세계의 멸망. 천상신들의 죽음.”

뭐하는 새끼들이야? 이번 사태의 스케일이 확 커져 버리자, 벨로크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스콜라 혼자서 말인가? 그게 가능한가? 아니면, 다른 조력자가 있나?”

“데몬들의 왕과 협약을 맺었다. 대악마의 조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카라와 아델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벨로크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뭐? 또 다른 대악마라고? 하수구에서 마주쳤던 처음 보는 형태의 괴물. 그놈이 데몬인가? 이번 대악마는 그런 녀석들의 왕이고?

그가 이에 관해서 물어보려는 순간. 여인의 눈동자가 기리릭 돌아갔다. 이윽고 그녀는 사시 눈깔이 된 채로 울컥 피를 토했다. 시발. 또 왜 이래? 카라가 다급히 속삭였다.

“약물의 부작용일지도 몰라. 아니면 심령이 제압되었을 때를 대비한 보호 주문이 걸려있었을지도 모르지. 빨리 다음 질문을 하는 게 좋겠어.”

벨로크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적들의 규모나 조직 구성도. 혹은 녀석들의 세부계획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모든 것들을 제외한 또 다른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것이 제일 중요한 질문 일지도 몰랐다.

“금색 머리카락의 여자요정. 본 적 있나? 몸에 착 달라붙은 가죽 갑옷을 입고 요상한 석궁을 든···”

괴인의 입에서 나오는 피가 많아졌다. 하지만 흐릿하던 눈동자는 똘망해졌고 음성 역시 또렷해졌다. 여인은 피를 컥컥 토하며 말했다.

“본 적··· 있다. 강대한 마력을 가득 품고 있던··· 쓸만한 패로 보여··· 개조시켜서 우리들을 위한 병기로···”

여인은 뜨문뜨문 말을 내뱉다가 고개를 푹 떨궜다. 비릿한 혈향과 함께 쏟아진 대소변이 방 안을 고약하게 물들였다. 세 사람은 일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델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살아··· 있었습니다.”

“일단,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적어도 차원의 틈에 휘말려서 몸이 조각나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카라는 말끝을 흐렸다. 이윽고 입술을 씹으며 엎어져 있는 괴인의 시체를 퍽퍽 걷어찼다.

“하필 스콜라라니. 그딴 역겨운 놈들의 손아귀에 잡혀있다니... 좋지 않아. 어쩌면 끔찍한 꼴을 당했을지도 몰라. 아니, 이미 당했을 거야.”

굳이 분노어린 카라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벨로크는 알 수 있었다. 악마를 도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집단이 어디 정상적이겠는가. 틀림없이 광인들의 모임일 것이다. 그리고 이자벨은 그런 놈들에게 잡혀있고 말이다. 무사할까? 아니, 살아는 있으니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됐든 엿 같은 일임은 분명했다. 이 새끼들은 내가 뭘 잘 못 했다고 이렇게 몰려드는 거지?

악마, 괴물과 악귀, 굶주린 도적과 정신 나간 마법사, 빌어먹을 권력자들까지. 하나를 뛰어넘어도 또 다른 녀석들이 벌레처럼 솟아났다. 이윽고 이것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물망처럼 그를 속박하려 들고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말이다.

젠장할 세계 같으니. 벨로크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꾸욱 쥐었다. 그의 기분에 맞춰 등에 메고 있던 검이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속삭임이 들린다. 무엇이든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부숴버리라는 강철의 속삭임이었다. 벨로크는 기꺼이 이에 맞춰줄 생각이었다.

“녀석이 남긴 일지에 추적마법을 걸었어. 스콜라. 그러니까 마녀들의 거주지는 아리안의 끝자락. 룽겐 대사막에 있어.”

카라는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한 손에는 붉은색의 책을 든 채, 중얼거렸다.

“끝자락이면··· 어림잡아도 몇 달은 걸리겠군요. 긴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쪼그려 앉아있던 아델은 도끼창을 어깨에 척 기대며 눈동자를 굳혔다. 다들 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옛 동료를 구하기 위한 사명감 일수도, 혹은 세상의 멸망을 막고 싶다는 거창한 소명 의식일 수도 있었다. 원래라면 앞선 두 가지 이유에 더해서 벨로크 역시 집으로의 귀환을 위해 눈을 빛냈을 것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여러가지 상념들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엿 같은 괴물 놈들의 머리통에 검을 꽂아넣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 순간. 노크 소리와 함께 실험실의 문이 열렸다. 잠시 후, 방 안으로 들어온 알타니스의 영주가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반자크로부터 모든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 영웅들이여! 내 도시를 구해주어서 정말이지 고맙습니다!”

일행에게 새로운 고난이 닥치든 말든, 고민거리를 해결한 성주는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는 손바닥을 탁 부딪치며 하인들을 호출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가져오지 않고!”

묵직한 철제 궤짝이 쿠웅 거리면서 바닥을 찍었다. 고급스러운 자수가 새겨진 망토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하인 하나가 허리를 꾸벅 숙여서 궤짝을 열어 재끼자, 오색찬란한 빛이 반짝였다.

아리안 양식의 금화 수 백 닢과 비취, 사파이어나 루비 같은 귀한 보석들이 궤짝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성주는 뿌듯한 얼굴이 되어 험험 헛기침을 했다. 그는 적어도 은혜를 모르는 파렴치한은 아니었으니까. 이 정도의 재물이라면 저들도 충분히 만족했을 거란 생각이었다.

“으음? 왜··· 그러시오? 혹시 부족하시오?”

하지만 일행의 얼굴을 본 성주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세 사람은 하나같이 이를 갈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무언가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보였다. 부족했나? 괜히 제 발을 저린 성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하인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외쳤다.

“이 멍청이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 알아들었구나!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더냐! 궤짝 두 상자를 가져오라고!”

일행은 의도치 않게 알타니스의 1년 치 수입을 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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