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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85화 (8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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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

“끄아아악!”

괴인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퍼밀리어와의 연결이 의도치 않게 끊긴 탓이다. 그 바람에 쓰고 있던 검은 후드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괴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건가?”

목소리는 괴인의 위에서 들려왔다. 공동을 웅웅 울릴만큼 거대했으며 창문을 긁어내리는 듯 기괴했다. 괴인은 고통을 참아내면서 눈을 슬쩍 떴다. 그녀의 네 배는 될법한 7미터 덩치의 괴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냐고? 시발. 무식한 새끼 같으니. 네가 주문의 부작용에 대해서 뭘 알아? 그녀는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었다. 괴인은 침음성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끄흐으. 스, 습격이야··· 웬 침입자들이 지금 내 피조물들을 파괴하면서 이곳을 휘젓고 있어.”

“습격···? 영주의 군대인가?”

괴물의 붉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니, 네 명이야. 하나는 별 볼 일 없는 녀석이고, 나머지 셋은 기사와 성기사, 마법사인데··· 하나같이 대단한 실력자들이야. 시발. 신성 왕국 녀석들이 냄새를 맡은 건가? 일단 도망쳐야···”

머리를 뒤흔드는 격통에도 정확하게 상황을 설명한 괴인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 괴인의 옆으로 쿠웅 망치가 꽂혔다. 괴물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해머였다.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머리가 깨졌을 거다. 풍압에 의해 후드가 젖혀진 여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 이러는데? 갑자기?”

“도망, 비겁한 짓이다. 주군의 명령. 잊었나? 이 도시를 불 태워야 한다.”

사명감을 불태운 괴물이 크르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여인은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바닥을 탁 짚으며 일어났다. 이윽고 강하게 소리쳤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네 주군이지. 내 주군이야? 잊지 마. 우리들은 동맹 관계라는 걸. 좀 더 존중을 해달란 말이야.”

괴물의 눈초리가 샐쭉해지고, 망치든 손이 다시금 움직이려 하자 여인이 변명하듯 외쳤다.

“물론! 나도 임무를 망각한 건 아니야! 마탑의 뜻이 곧 내 뜻이니까! 하지만, 좀 더 신중해지자는 얘기야! 네가 상대의 모습을 못 봐서 그래. 벼락을 쓰는···”

괴물은 여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대신에 손에 들린 돌망치를 거세게 휘둘렀다. 시발. 이 괴물 새끼가 드디어 나를 죽이는구나... 여인이 기겁할 때. 팅. 하며 불꽃이 튀었다.

샛노란 선 하나가 휙휙 돌아가더니 바닥에 척 박혔다. 기이한 문양이 물결처럼 새겨져 있고 앞부분이 세모꼴로 찢어진 거대한 장창이었다.

장창은 파지직 스파크를 흘려대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윽고 어둠 속에 잠긴 통로 속으로 휘잉 날아갔다. 괴물의 시선은 한참 전부터 통로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에 여인의 시선 또한 더해졌다. 곧이어 뚜벅뚜벅 발소리와 함께 네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흉갑주를 입은 여기사, 가죽 갑옷을 차려입은 붉은 머리 여인, 이를 딱딱 거리고 있는 터번 쓴 중년인. 마지막으로 창에 기이한 문장이 새겨진 흑갑주를 입은 사내였다. 그가 말했다.

“반응이 빠른데. 아니면 공격이 너무 단조로워서 그런가?”

투창은 한점 선이 되어서 날아간다. 그 궤적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막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처음 보는 괴물인데. 눈이 좋군. 경험치가 제법 되겠는데. 벨로크는 쏘아냈던 창을 허리춤에 걸고는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덧 거대한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미노타우로스? 는 아닌 것 같은데···”

괴물을 본 아델은 말끝을 흐렸다. 녀석의 머리에 달린 양 뿔이나 얼굴은 분명 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해골을 연상시키는 듯 쩍 말라있는 얼굴과 피부를 덮고 있는 회색빛 외골격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뭐, 뿔 달린 괴물이니까 악귀나 악마 아니겠어? 어찌 됐든 저놈들이 이 사태의 원흉처럼 보이는걸.”

아델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답한 카라가 지팡이를 휘휘 돌렸다. 하긴, 우리가 언제부터 괴물들의 도감을 뒤져가며 상대법을 찾았던가. 아델 또한 그 말이 맞다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낏자루를 움켜쥐었다.

흉흉하게 빛나는 도끼날 아래 시커먼 피가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이윽고 이 피들은 바닥을 치덕치덕 수놓으며 기괴한 그림들을 그려냈다. 마치, 그들이 걸어온 길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 잠깐 사이에 나머지 피조물들까지 다 처리했군... 이게 무슨 엿 같은 일이야··· 위험해, 위험하다고.”

데몬을 앞에 두고도 세 사람의 기세가 줄어들지 않자, 당황한 건 역시나 여인이었다. 그녀는 후드를 다시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더니 뭐라 뭐라 주문을 외웠다. 그 속도가 아주 빨랐기에 일행은 막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공동의 벽이 쿠르릉 울렸다. 이윽고 홰까닥 뒤집어지더니 아리안 양식의 관들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어릴 때 봤던 영화가 떠오르는데. 이제 저기서 기어 나오겠군. 벨로크의 예상대로였다. 여인의 주문이 끝나자, 관이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일제히 열렸다. 그 속에서 팔을 엑스자로 교차하고 있는 붕대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전사 출신으로 보였다.

끄에에-엑

미라들은 뒤뚱거리면서 관을 비집고 나오더니, 제각각의 무기들을 빼 들었다. 녹이 잔뜩 슬어있는 것이 얻어맞으면 잘려 나가기 보다는 병에 걸려 죽을 듯싶었다. 결국 일행은 소머리 괴물과 수십 마리의 망자 그리고 요상한 사술을 사용하는 마법사와 마주했다. 카라가 말했다.

“예상대로 사령술사야. 그보다 이 방식, 그리고 주문··· 전에 만났던 그 마녀와 비슷한 것 같은데.”

“목 없는 기사를 다뤘었던 유적지의 그년 말이군.”

뭔가 냄새가 나는데. 카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외웠다. 반대편을 보자, 로브 아래의 두 눈 역시 요사스러운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두 여인의 주문이 격돌하고, 주위의 공간이 콰직 일그러졌다. 전사들은 냅다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윽고 기세를 줄이지 않은 채,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양날 도끼와 대검 날이 번뜩였다. 낡아빠진 날붙이 따위가 순식간에 갈라졌다. 성기사의 성력과 기사의 괴력, 미라들의 달려오는 속도가 합쳐져서 일어난 결과였다.

끄르륵

두 사람은 곧 괴물들의 파도에 휩싸였다. 한쪽에서는 불꽃이 쾅 치솟았고, 다른 쪽에서는 거센 풍압이 일었다. 수 백 년 동안 안 씻으면 이런 냄새가 나는군. 벨로크는 짧은 감상을 남긴 채, 예의 커다란 칼을 휘둘렀다.

대검은 미라의 낡고 오염된 붕대, 그 아래 썩어빠진 살점과 뼈 등을 가볍게 갈라버렸다. 횡 베기 한 번이면 대 여섯의 몸통이 조각났지만, 그가 검을 휘두르는 아주 짧은 간격. 그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미라들이 달려들었다.

몇몇은 단검 같은 작은 비수를 찔러왔고, 몇은 그냥 몸통 채로 그를 짓뭉개려 했다. 더럽게 무식한 방법에 벨로크 역시 똑같이 대응해주었다.

자잘한 공격은 갑옷으로 막아냈다. 이윽고 손목에 달려있는 시커먼 망치를 휘둘렀다. 강철 건틀릿에 얻어맞은 미라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그의 쇄골에 고개를 처박고 이빨을 딱딱거리는 녀석이 한 놈 또 있었다.

벨로크는 손을 뻗어 놈의 머리를 턱 집고는 그대로 꺾어버렸다. 뿌드득 돌아가는 뼛소리를 뒤로한 채, 그는 검을 휘두르고 주먹과 발길질을 했다.

괴물들이 죽어 나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놈들한테 죽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었지만, 그는 여유로웠다. 그렇기에 위에서 떨어지는 돌망치를 알아채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땅이 쿠웅 울렸고, 바닥에 고여있던 물이 촤악 튀었다. 벨로크는 입안으로 들어간 미라의 체액을 퉤 뱉고는 말했다.

“틈을 노린 거냐? 그렇다고 보기에는 네 덩치가 너무 커서 눈에 잘 띄는데.”

미라들보다 네 배는 컸기에 벨로크는 녀석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소머리 괴물의 붉은 눈은 크게 떠져 있었다. 그가 보기에 저 눈동자 안에는 놀라움과 호승심이 동시에 담겨 있었는데. 이지가 있는 것 같았다. 괴물이 말했다.

“그 작은 몸뚱이,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 거지? 놀랍군. 거기다, 빨라.”

말까지 하는 군. 나는 네 면상이 더 놀라운데. 벨로크는 속마음을 숨긴 채,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목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짧은 단도 형태의 창날이 부메랑처럼 날아갔다. 남아있던 미라들의 머리가 퍽퍽 잘려 나갔다.

익숙한 말. 지겨운 반응. 벨로크는 굳이 답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괴물 역시 별달리 생각하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닌지, 자신의 돌망치를 들어 올렸다. 자세를 잡은 두 인영은 짧은 순간. 숨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두 무기가 격돌했다.

검신이 기기긱 비명을 지르고, 해머에서는 돌가루가 바스슥 흘렀다. 괴물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직접 맞대고 보니,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힘이 예상을 벗어난 탓이다.

“이게 무슨···”

내려치기를 올려 베기로 받아내는 기행을 선보이고 있던 벨로크가 검을 뒤틀었다. 불똥이 확 튀고, 지지대를 잃은 망치가 파공성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평범한 전사라면 무기를 때는 즉시 망치에 찍혀 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근력과 반사 신경, 몸놀림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벨로크의 몸은 괴물의 아래를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괴물이 섬뜩함을 느낀 순간. 녀석의 오른 다리가 잘려 나갔다. 덩치만큼이나 많은 양의 피가 촤아악 흘러나왔다.

끄에에엑!

한순간에 외다리가 된 괴물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놈의 두 눈은 붉은 흉망을 그렸다. 손에 들린 망치 또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휘둘러져 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싸우기 위해 단련된 전사의 습관이었다. 물론, 벨로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저 칼질 두 번이 더 필요했을 뿐이다. 망치가 탱 튕겨 나갔고, 남은 다리마저 잃은 녀석은 앉은뱅이가 되었다.

괴물의 눈동자가 바뀌었다. 잔뜩 찡그려진 시선에서 더 이상 호승심과 호기심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고통과 공포, 후회 같은 꽤나 인간적인 감정들이었다. 벨로크는 관심이 없었다. 이런 괴물들을 잡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잠···”

무정한 칼날이 하수도의 벽을 깨부쉈다. 그 위에 있던 괴물의 머리통 또한 쩍 조각내버렸다. 벨로크는 시선을 돌렸다. 아델은 양날 도끼가 막 마지막 남은 미라의 상체를 양단하고 있었다. 후두둑 쏟아지는 갈비뼈와 심장 같은 것을 뒤로한 채, 이번에는 웬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어느 틈엔가 괴인에게 접근한 카라가 그녀의 어깨춤에 레이피어를 찔러넣고 있었다.

“아아아악!”

“냄새나니까. 그 입 좀 다물지?”

여인이 버둥거릴수록 칼날은 그녀의 살갗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카라는 이에 그치지 않고, 괴인의 뺨에 따귀를 짝 날리거나 복부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아델과 벨로크가 보고 있자니 무자비한 여전사가 따로 없었다. 좀 치는데? 역시 재능이 있다니까. 전투를 끝낸 두 사람이 각자의 무기를 소지한 채, 카라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상기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날붙이를 휘둘러 생명체를 찌른 경험 때문인 것 같았다. 썩 좋은 느낌은 아니지. 벨로크가 생각할 때. 아델이 카라의 손을 턱 잡고는 괴인의 배를 매만졌다.

“이곳보다는··· 좀 더 아래쪽이 급소다. 여기, 제대로 들어가면 숨도 쉬지 못하지.”

“그래? 다음부터는 참고하도록 할게.”

카라는 가슴을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괴인의 팔에 꽂혀있던 레이피어를 쩍 뽑아냈다. 이윽고 비명을 지르는 괴인의 후드 자락에 피를 덕지덕지 묻히더니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녀가 말했다.

“아델. 이 여자 치료 좀 해줄 수 있어?”

아델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실컷 몸에 구멍을 뚫고 때려놓고서는 치료라니? 이런 쪽에 취미가 있었던 걸까? 그 시선을 눈치챈 건지. 괴인의 입에 천 자락을 욱여넣어 입을 틀어막던 카라가 다급히 말했다.

“이 녀석··· 아니, 이 여자. 그냥 정신 나간 떠돌이 마법사가 아니야. 사람 죽이는 주문을 수도 없이 연마한··· 어딘가에서 제대로 배운 놈이야. 그러니까 배후를 좀 캐보려고 해. 필시 이 정도 규모로 일을 벌이려면 뭔가 거대한 단체가 뒤에 있을 테니까.”

“고문하겠다고?”

벨로크가 묻자, 카라가 싱긋 웃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더불어 얼굴에 튄 피 때문인지 한층 더 섬뜩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면서 말했다.

“난 살을 지진다거나 손톱 뽑기 같은 야만적인 짓거리는 안 해. 마법사니까···”

카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윽고 혀로 입술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약물을 쓸 거야. 한 잔만 마셔도 아는 것을 다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릴걸?”

벨로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현듯 카라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염구 주문으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우며 웃던 마녀의 모습. 그리고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때의 광경을 생각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너 또한 보통 성깔은 아니었지. 내가 까먹고 있었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시를 불태우고자 계획했던 괴인의 음모는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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