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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84화 (8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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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

아들을 내쫓고 씩씩거리던 성주는 화들짝 놀랐다. 이윽고 벨로크 일행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고 계셨소이까?”

당황스러워하는 성주의 반응에 벨로크는 카라의 짐작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말했다.

“하수구에 도사리고 있는 살인자의 처리를 우리한테 맡기고 싶은 것 아니오? 내 생각이 틀렸나?”

성주는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박수를 짝 쳤다. 그러자, 신명 나게 분위기를 잡던 악단과 무희들의 동작이 딱 멈췄다. 이윽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우르르 방을 나가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벨로크 일행과 성주, 그들을 이곳까지 안내해준 청지기 반자크라는 사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어느새 바깥에는 어둠이 슬금슬금 내려앉고 있었다. 사막의 밤이 다가온 것이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방 안에서 성주는 험험 헛기침을 했다. 그가 말했다.

“예리하시구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나는 경들에게 이 일을 부탁하고 싶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경들이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야겠지.”

“체면과 권위 때문이죠? 벨로크가 보여준 힘 때문에 당신의 군대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으니까요.”

카라의 말에 성주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윽고 양손으로 뺨을 착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에 대한 욕설이 다시금 그의 입에서 나왔다. 시발. 하필 건드려도 이런 자들을···

“그렇소··· 경들도 소문을 들었다면 알겠지만, 이곳 아리안 역시 개판이오. 아니, 개판 오 분 전 이라고 봐야겠지. 요 몇 달 사이에 사라진 도시가 몇 개에 마을은 그 배가 넘소. 전부 다 괴물들의 범람 때문이지. 이럴 때일수록 나는 내 권위를 단단히 다져야 하오. 경들이 이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지금 우리들을 겁박하는 겁니까?”

아델이 노려보자 성주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벨로크를 바라보았다.

“사막의 대전사를 맨손으로 무력화시키고, 벼락을 불러일으키는 기사를 무슨 수로 말이오? 그냥, 나는 다른 수를 강구할 뿐이오. 신분 없는 부랑자 셋을 대신 잡아들여서 목을 매달면 되겠지. 그리고 지하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들의 틈바구니로 나의 군대를 파견하면 될 일이오.”

괴물들이라고? 평범한 살인자가 아니었군. 소문을 통제한 건가? 벨로크가 생각할 때. 카라가 피식 웃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닐 텐데요. 하물며 우리는 이 나라의 사람이 아닌, 이방인. 그렇게 쉽게 속을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시민들의 지지는 떨어지겠지. 하지만··· 뭐 어쩌겠소? 나는 최선의 방법을 강구할 뿐이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최선은 경들을 설득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잘 된 것 같지는 않구려.”

아들의 거듭된 만행과 아델의 격한 반응, 벨로크의 무미건조한 표정에 성주는 이미 자포자기 상태인 것 같았다. 그는 한층 약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됐든 경의 자비에는 감사하오. 내 사람들을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으니 말이오. 진정 명예로운 전사라고 할 만하군. 참, 부하들에게 듣기로 사막을 횡단하신다고 들었소. 여행 물품과 지도가 필요하실 것 같은데. 내 준비해 주겠소. 여비또한 드리지. 혹여, 여기서 머무르는 게 불편하시다면 여관으로 가 계셔도 좋소. 내 사람을 보내리다.”

벨로크는 조금 놀랐다. 저 모습이 가면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힘에 굴복한 약자의 변명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들을 제외 하고서라도 알타니스의 성주는 꽤나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사내였다. 아들 바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첫 인상과 점점 달라지는 군. 벨로크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의 고민거리를 해결해준다면 뭘 해줄 수 있소?”

성주의 눈동자가 커졌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답이 들려온 탓이다.

“내 창고에 경들이 입고 있는 무구들보다 좋은 건 없어 보이고···”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금은보화를 비롯한 내 친필서명이 담긴 신원 보증서, 모래 거미의 실로 짠 망토들을 드리겠소. 열기를 막아주는 보물이지. 사막을 여행하기에는 꼭 필요할 거요.”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냄새나는 하수도를 한 번 구르는 것 치고는 꽤나 보상이 짭짤했던 것이다. 여기에 지하도에 숨어있을 괴인들이 줄 경험치를 더하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가 말했다.

“하수도의 위치가 어디요?”

성주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이윽고 함박웃음이 되었다. 그가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고, 고맙소! 고맙소! 경!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 병사들을 준비하겠소.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바로 처리하지. 우리들끼리 갈 테니. 안내만 해주시오.”

“그게 무슨···”

당혹스러워하는 성주를 뒤로한 채,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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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이거 제대로 막은 거 맞아?

-이중으로 잠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게다가··· 나오면 바로 찔러버리면 됩니다. 어차피 입구는 여기랑 계단 아래 두 곳밖에 없지 않습니까?

-시발. 그나저나 시체가 되살아나서 움직이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저도 사태가 이렇게 커질 줄 몰랐습니다. 지하로 내려갔다가 돌아온 애들 말 들으셨습니까? 미라만 수백 구랍니다. 게다가 뿔 달린 거대한 괴물 같은 것을 봤다는 말도 있습니다.

-염병, 그 말이 사실이면 더럽게 위험하잖아. 이거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제가 들은 게 있습니다. 오늘 아침 난리를 피운 이방인들 있지 않습니까? 벼락을 사용하던 그··· 허억.

병사들의 잡담이 멈췄다. 앞에 서 있던 네 명의 사람들 때문이다. 그중에서 한 명. 영주의 심복 중 하나인 청지기 반자크가 말했다.

“문을 열어라.”

“반자크님. 하지만, 안에는 괴물들이···”

반자크는 후들거리는 다리와 목소리를 겨우 숨기며 근엄하게 말했다.

“이, 이분들이 처리하실 거다. 아무 걱정 말고 문을 열어라.”

병사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이방인들이 반자크의 뒤에 떡하니 있었다. 오늘 낮에 그 소동을 일으켰던 주범. 벼락의 기사. 병사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중삼중으로 봉해두었던 자물쇠가 티딕 열리고, 철문이 끼이익 거리며 열렸다. 후끈하면서도 습한 바람이 휘이잉 불었고, 그 안에 담긴 고약한 악취가 일행의 코를 강타했다. 아주 살림을 차린 것 같은데. 일행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대번에 헛구역질을했다.

“이쯤 되니. 시체 썩는 냄새에 적응한 내 코가 불쌍할 지경이야.”

카라는 투덜거리면서 주문을 외웠다.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일자로 쭉 뻗은 작은 통로 아래 작은 사다리 하나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그 사다리에는 잘려 나간 손 하나가 턱 하니 달려있었다. 손목만 남은 살덩이를 본 카라가 미간을 구겼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뜯어먹힌 모양인데··· 처참하군.”

“저 아래에서 매복이라도 하고 있다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아델이 나서기 전, 반자크가 말했다.

“거기, 병사. 네가 먼저 내려가 보도록.”

고기 방패가 되란 뜻에 병사는 망설였다.

“네, 네···? 지금 저보고···”

“내 뜻은 곧 성주님의 뜻이다. 지금, 거부하는 건가?”

청지기는 단호하게 답했다. 귀빈들의 편의를 봐준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그의 속마음은 좀 달랐다. 이건, 일종의 화풀이였다. 벨로크 일행의 일 처리를 확인 겸 감시하기 위해 반자크는 이번 사태에 동행했다. 한순간에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 분노를 조금 풀고 싶어서 한 말이었다.

'시발.'

죽을상이 된 병사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전. 벨로크가 나섰다. 그는 고개를 숙여서 구멍을 바라봤다. 저 어둠 아래 말라비틀어진 핏자국과 살점 조각들이 눌어붙어 있는 바닥이 보였다. 8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내가 먼저 가지. 이상 없으면 말하겠다.”

그는 그 말과 함께 훌쩍 뛰어내렸다. 바닥이 쿠웅 울리고, 매고 있는 검과 갑옷이 철그럭 거렸다. 그는 검 손잡이를 꾸욱 쥐고는 주변을 살폈다. 온통 황토 색깔의 돌로 이루어진 토굴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면 흐릿한 형체들이 그의 눈에 포착되었을 것이다. 매복은 없군. 그가 말했다.

“다들 내려오도록!”

쩌적 소리와 함께 매달려있던 손목이 툭 떨어졌다. 뒤이어서 아델과 카라, 반자크 세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눈먼 화살까지 다 막아줄 수는 없으니. 알아서 조심하시오.”

“···알겠습니다.”

반자크가 침을 꿀꺽 삼키고, 일행은 이동을 개시했다. 벨로크가 제일 선두. 아델이 후미, 중앙이 반자크와 카라였다. 일행은 굳이 인기척을 숨기지 않은 채, 걸었다. 입고 있는 중장비들은 그들이 원한다고 해서 소음을 가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굴은 고요했다. 하수구라면 으레 있을법한 시궁쥐나 박쥐, 지네 같은 작은 생명체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입구에서 봤던 손목을 제외하면 인간들의 시체 역시 안 보였다. 벨로크는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어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카라가 중얼거렸다.

“사령술인가? 악마?”

일행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천장과 이를 받치기 위한 원형 기둥들을 한참이나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크르르 하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비척거리며 무언가가 바닥을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라가 뭐라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강하게 치켜 올렸다. 그러자 빛이 한층 더 강해지며 저 앞에 있던 흐릿한 형체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피와 구정물에 절여져 누렇게 변색된 붕대 아래 썩어빠진 살점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는 붉은 안광이 가득한 얼굴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보니까 더 역겹게 생겼는데. 저거 걸어 다니다 어디 걸려서 넘어지지는 않나? 벨로크가 헛웃음을 지을 때. 아델이 도낏자루를 꾹 쥐며 말했다.

“붕대를 감고 있는··· 좀비입니까?”

“나도 처음 보는 양식인데. 이 나라의 매장방식인가?”

카라가 묻자, 반자크는 히이익 비명을 지르면서도 말했다.

“마, 맞습니다. 미라입니다. 아리안 고유의 매장방식으로 신체 내부의 장기를 꺼내서 방부처리를 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끄에에-엑!

미라들이 입을 감싸고 있는 붕대 너머로 흉측한 괴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는 곧 메아리처럼 울려 퍼져 다른 괴물들 역시 불러일으켰다. 비척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려 퍼지고 토굴은 곧 수백 명의 미라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사이사이 무기를 꼬나쥔 채, 내장을 흘리고 있는 갈색 피부의 병사들 역시 보였다. 놈들한테 당한 모양이군.

일행은 작은 통로를 기점으로 등을 맞대며 괴물들의 파도를 마주했다. 그중에서 몇은 특히나 강렬한 적개심을 불태웠는데. 붕대 주변에 핏자국이 묻어있는 것으로 보아 인육 맛을 좀 본 놈들인 것 같았다. 그래, 고기도 먹어본 놈이 더 잘 먹는 법이지. 배가 고프냐?

“히, 히이익. 샤트라여!”

풀썩 주저앉은 반자크를 빼면 벨로크와 아델 카라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그들은 이런 일로 당황하거나 겁을 집어먹기에는 그간 겪어온 경험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이미 이것보다 더한 괴물들과도 맞상대를 해왔으니까.

벨로크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비도는 그의 의지에 따라서 곧 거대한 장창이 되었다. 손에 착 감겨드는 날붙이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내면 속의 힘을 끌어올렸다. 이전과는 달리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적당히 불어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전은 소용돌이치듯 창 주위에 감겨들었다. 저 앞에서 팔을 뻗어오고 있는 미라가 보였다.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창을 던졌다. 어깨가 흐릿해지고 노란 선 하나가 괴물들의 틈으로 쏜살같이 쇄도했다.

벨로크의 괴력, 창의 관통력과 무게. 이 모든 힘이 합쳐진 날붙이는 괴물들 열 마리의 몸뚱이를 가볍게 꿰뚫었다. 이윽고 뇌창은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주위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다. 토굴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 자리로 강렬한 섬광이 번쩍거렸다. 한 번에 수십 마리의 괴물이 그렇게 죽었다.

“쓸만하군.”

만족스럽게 웃은 벨로크가 손을 슥 뻗었다. 그러자, 의지에 화답한 장창이 부르르 떨리더니 허공을 날아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그는 다시금 벼락을 담아냈고, 뇌창이 뻗어 나갔다. 물론, 그 틈을 노린 괴물들이 일행에게 달려들기는 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혼자가 아니었다.

“더러운 괴물들! 내 너희들을 정화하겠다!”

불꽃 달린 채찍이 휘리릭 날아들었다. 고름 가득한 붕대가 짓뭉개지며 미라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 사이로 쏜살같이 달려 나간 성기사가 손에 들린 도끼창을 마구 휘둘렀다. 흐릿한 궤적이 일자로 그리고 사선으로 날아들었다. 이에 맞춰 아델의 늘씬한 다리 각반이 신들린 듯 춤췄다.

도끼는 그렇게 괴물들의 정수리를 쩌억 쪼개버리고 벽을 부서트렸다. 이윽고 부르르 떨리더니 성력의 불꽃을 폭탄처럼 터트렸다. 더운 바람과 함께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들은 그렇게 괴물들을 죽였다. 카라가 마법을 사용할 것도 없이 수백 마리의 망자들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하, 하··· 이거 일이 줄어들어서 좋아해야 하나?”

카라가 헛웃음을 지을 때.

찍찌지직···찍

뭉개지고 불타고 있는 시체들의 아래에서 웬 시궁쥐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요사스러운 보랏빛 눈동자를 자랑하는 특이해 보이는 쥐였다. 그런, 쥐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는데. 마치, 감정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쥐가 말했다. 아니, 녀석에게 퍼밀리어의 술법을 걸었던 하수도의 괴인이 말했다.

-뭐, 이런 미친 새끼들이... 대체, 어디서 이딴 놈들이 튀어나온 거지? 일단 도망을···

중얼거린 괴인이 자신의 사역마를 조종하던 순간. 시커먼 동공이 보라빛 눈동자를 강하게 주시했다. 쥐가 찍 놀라고, 괴인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윽고 흐릿한 섬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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