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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80화 (80/222)

80

이방인

“무슨 짓이냐! 미쳤나?”

아델이 벨로크의 앞을 가로막으며, 난쟁이의 머리통을 턱 밀쳐냈다. 하지만, 난쟁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짧은 팔을 버둥거리면서 침을 튀겨댈 뿐이었다.

“검! 그 검을! 그것들을 나한테 보여줘!”

“이 땅딸보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린 아델이 난쟁이를 후려치기 전, 벨로크가 나섰다.

“이거 말인가?”

그가 매고 있던 왕의 검과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벽에 턱 하니 걸쳐놓았다. 난쟁이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재빨리 다가가서 검을 살폈다.

“오오, 세상에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이것들은 그야말로 명품, 아니 걸작이라는 말이 아깝지가 않아.”

난쟁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검의 표면을 쓸거나 날을 매만졌다. 일행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그런 일이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자, 벨로크가 난쟁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

“주인장.”

난쟁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 이건 주문이 걸린 무기로군. 예기 강화, 주인의 부름, 또···”

“주문을 알아보는 대장장이라고? 맙소사. 진짜배기 장인인데?”

카라가 감탄할 때.

“이런 또라이 같은 놈이!”

아델이 난쟁이의 머리통을 거세게 후려쳤다. 이번에는 벨로크 역시 말리지 않았다. 난쟁이는 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윽고 세 사람을 올려다보며 눈을 멀뚱멀뚱 떴다.

뭐. 왜? 누가 보면 우리가 잘못한 줄 알겠네. 일행이 뚱한 표정을 짓자, 난쟁이가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흠. 이거 추태를 보였군. 그래, 이 친구들을 가져오신 게 손님들인가?”

“그렇소. 물건들을 좀 보러 왔는데.”

“물건? 아아. 악귀들하고 한바탕 드잡이질이라도 했나 보군. 꼴이 말이 아닌데.”

난쟁이는 일행의 몰골을 보더니,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판금 갑옷 두 벌의 수리에다가 저 여인은 마법사로 보이는데··· 어이쿠. 로브에 구멍이 뻥 뚫렸군. 용케도 살았어. 갑옷도 한 벌 필요하겠군. 그리고 또··· 더 필요한 게 있나? 뭐가 됐든, 나. 브루스. 알타니스 최고의 대장장이일세. 품질은 보증하지. 자, 골라보시게.”

난쟁이는 조금 진정이 된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엄하게 말했다. 하지만, 눈동자는 두 자루의 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얼핏 광인처럼 보이는 그 모습이 오히려 더 믿음직스러웠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벨로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격은 상관하지 말고, 두 사람 다 원하는 거로 골라봐라.”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지출이 제법 클 텐데요. 저도 보태겠습니··· 앗!”

아델이 자신의 허리춤을 뒤적거리다가 당황했다. 돈이 없었다. 정확히는 돈주머니를 넣어두었던 짐가방 자체가 사라졌다. 그녀는 잠깐 소매치기의 소행일까. 생각하다가 호수에 빠졌을 때. 짐가방을 물속에 흘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런 시발. 하얗게 질린 아델의 어깨를 벨로크가 툭툭 두드렸다. 돈주머니를 목에 걸어두길 잘했지.

“내가 해줘야 할 일이다. 부담 가지지 말고 고르도록 해라.”

“으··· 그러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델은 울적한 표정으로 무기들을 둘러보다가, 이내 눈을 빛냈다. 이번에는 옆에 있던 카라가 말했다.

“난 그냥 옷 몇 벌이랑 로브 하나면 충분해. 마법사잖아. 갑옷 같은 거 입어봐야 무겁기만 하고···”

정말 거추장스러워서 거절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는 걸까? 뭐가 됐든 벨로크는 카라의 말을 따라 줄 생각이 없었다.

“그때와 같은 일이 또 안 생긴다는 보장이 있나? 만약, 네가 그때. 제대로 된 갑옷 하나만 입고 있었어도 부상은 현격히 줄어들었을 거다.”

내가 너한테 인공호흡을 할 일도 없었을 테고 말이야. 벨로크는 붉은 머리 마법사의 부드러운 입술을 떠올렸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잠깐이나마 잊게 할 정도로 강렬했던 게 문제였지. 카라가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우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가죽 갑옷 정도면 그렇게 무겁지도, 거추장스럽지도 않을 거다. 괜찮은 거로 골라주마.”

“응··· 네 말대로 할게.”

카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벨로크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대검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난쟁이를 뒤로한 채, 두 사람은 진열대를 살펴보았다. 소, 곰, 늑대 등, 짐승을 재료로 삼아 만든 것부터 시작해서 고블린이나 놀, 트롤 등. 괴물들을 해체하여 만들어낸 갑옷들도 있었다.

코딱지만 한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 다양한 품목들이었다. 이름표까지 붙여놓다니. 친절하군. 벨로크는 갑옷들을 만지작거리며, 무두질의 상태나 이음새의 처리, 끝마무리 작업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이게 괜찮겠는데.”

두꺼운 곰 가죽을 베이스로 해서 군데군데 징을 박아넣어 보강한 갑주였다. 장갑과 부츠, 하체 보호대 역시 같이 있었다. 세트로 보였다. 그가 이걸 고른 이유는 별것 없었다. 카라의 흉부와 잘 맞아떨어지게 생긴 것이 여성용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뒤에 와있던 난쟁이가 말했다.

“영주님의 명을 받아, 따님을 위해서 만들어 뒀던 거요. 고리타분한 귀족가의 생활이 질리셨다면서 진정한 사막의 전사가 되고 싶다고 하시더군.”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됐는지 알 것 같군.”

난쟁이 역시 피식거렸다.

“갑옷이 완성되는 순간. 꿈 또한 사그라들었지. 이 땡볕에서 검을 휘두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그녀는 다시금 고리타분한 귀족가의 생활로 돌아갔소. 이 갑옷에 담긴 역사는 그걸로 끝이지. 간단하지 않나?”

그래, 그 친구들은 언제나 변덕스러운 개새끼들이지.

“벨로크님. 전 이걸로 하겠습니다.”

벨로크는 고개를 돌렸다. 아델은 보기만 해도 무식해 보이는 제 키만 한 양날 도끼를 들고 있었다. 즐겨 사용하던 검과 방패 대신, 도끼라.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건가? 뭐, 다루기가 힘들어서 파괴력은 좋으니까.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카라를 위한 얄상한 레이피어 한 자루까지 집어 들었다.

“이것들로 하지. 얼마요?”

“갑옷까지 수리를 맡긴다고 했지? 가만, 그런데 자네의 그 갑옷. 주문이 걸린 물건 아닌가?”

“맞소.”

“잠깐 벗어볼 수 있겠나? 견적을 내려면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벨로크는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난쟁이는 몇 군데. 생채기가 나고, 구멍이 뚫린 문장 갑옷을 확인하더니 혀를 찼다.

“예상대로군. 표면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 손상되면서 걸려있던 주문이 약화되었어. 이건 완벽하게 고칠 수가 없겠는데.”

염병. 일이 이렇게 되네. 벨로크는 다시 새길 수 있냐는 뜻으로 카라를 바라봤지만, 그녀 역시 고개를 저었다.

“내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주문이었어. 나로서는 역부족이야.”

난쟁이가 말했다.

“그럴 만도 하군. 내 주문 걸린 장비들을 여럿 만졌었지만, 이런 건 또 처음 보는군. 무슨 고대의 유물인가?”

뭐, 그렇기는 하지. 아깝기는 하지만··· 벨로크는 차오르는 미련을 털어냈다. 무구란 건 결국에는 소모품이었으니까.

“그러면 할 수 있는데 까지 수리가 가능하겠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에 새겨져 있는 주문을 최대한 살린 채, 틈을 메꾸는 것뿐이네. 그거라도 좋다면 그리해주겠네.”

“그렇게 해주시오. 얼마요?”

난쟁이는 손가락을 하나둘 접었다. 이윽고 셈을 끝내고는 말했다.

“저 여인의 것까지 포함해서··· 금화 300닢은 줘야 할 거 같은데? 하나같이 상태들이 엉망이야. 뭐 물에 들어갔다가 토사에 처박히기라도 했나?”

“맙소사···”

카라와 아델이 입을 헤 벌렸다. 설마하니, 이 정도의 값을 치를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러나 벨로크는 태연한 표정으로 돈주머니를 열었다. 이윽고 번쩍이는 보석들을 한 움큼 집어 들고는 그에게 주었다.

기사든 용병이든 칼밥을 먹고 사는 자들에게 있어 장비란 곧 목숨과도 직결되었다. 이에 돈을 아끼는 건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한가?”

“충분하지. 아니, 오히려 과하군. 조금만 기다리게 거스름돈을 내어줄 테니.”

“거스름돈은 됐고, 저 검이나 녹여서 괜찮은 무기로 만들어 주시오.”

벨로크가 왕이 사용하던 검을 가리키며 말하자, 난쟁이가 입을 떡 벌렸다.

“시발? 자네 지금 저 걸작을 내 손으로 뭉개버리란 뜻인가?”

벨로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난 이미 검이 한 자루 있으니까 말이오. 아무래도 투척 무기가 좋을 듯한데. 창은 어떻소?”

단검이나 도끼로 재활용하기에는 저 검의 크기가 너무 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창이었다.

“자네, 진심인가? 저 검은 보통 물건이 아닐세. 그야말로 일국의 왕이나 가질법한···”

난쟁이는 수염을 떨어가며 벨로크를 만류했지만,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장간에 존재하는 다른 장비들과 교환하자고 해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고집을 꺾은 것은 난쟁이였다.

그는 가게의 주인으로서 손님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동시에 저 검을 한번 해체해보고 싶다는 대장장이의 욕심이 더해졌다. 그가 한숨을 후 쉬고는 말했다.

“투척용 창. 알겠네. 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것이네. 주문의 각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저걸 깎아내는 것은 엄청난 심력이 필요하거든. 거기다가 다른 손님들이 맡겨놓은 일까지 있으니 말일세.”

“얼마나 걸리겠소?”

“일주일, 딱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게. 내 최선을 다해보겠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은데. 조금 단축시킬 수는 없나? 벨로크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난쟁이의 이글거리는 두 눈과 지금껏 동료들과 여정을 시작한 이래,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여기가 무슨 회색빛 도시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시간에 쫓길 필요가 있나?

대악마를 죽였을 때. 나온 ‘부족해’라는 여신의 한 마디, 죽을 위기를 넘긴 동료들, 이자벨의 실종, 이 모든 상념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벨로크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 세계에 대한 가치관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시발. 뭐지, 이게 자포자기란 건가? 엿 같은 세계였다. 더럽게 위험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나름의 행복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는 고양이 같은 눈매 한 쌍과 머리칼만큼이나 시뻘건 입술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일주일 뒤에 오겠소. 여기 괜찮은 여관이 있소?”

“사막의 생명수. 그곳 맥주가 끝내준다네. 고기 샌드위치 또한 예술이지.”

난쟁이의 말을 뒤로한 채, 일행은 대장간을 나갔다.

#

벽면의 촛대에 박힌 양초들이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그 아래에 커다란 원형 테이블 열 개가 널찍하게 놓여져 있었다. 바닥에 깔린 판자에는 샛노란 모래들이 가득했다. 이곳이 낯선 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런 광경들은 몇 개 더 있었다.

“오- 끝없이 펼쳐진 생명의 줄기여- 나 그대의 발아래 몸을 뉘니, 샤트라의 눈길도 감히 우리를 넘볼 수 없더이다-”

가슴을 내놓은 채, 오직 하반신만을 가린 무희가 우아한 몸짓으로 날갯짓했다. 주위에 있던 터번 쓴 병사나 용병들, 밭일을 끝낸 농부들은 그녀의 춤사위에 따라 발을 굴렀다. 그러고는 목청껏 따라 불렀다.

벨로크는 땀이 흘러 번들거리는 무희의 초콜릿빛 피부와 탄탄한 복근, 찰랑거리는 장신구 등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난쟁이의 말 대로였다. 훌륭한 맛이었다. 곧이어 두 명의 여인이 계단을 타고 넘어왔다.

아델은 흰 셔츠에 바지를, 카라는 기다란 치마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튜닉을 입고 왔다. 가죽 부츠와 꼬깔신이 바닥을 끼이익 울리고, 원형 테이블이 가득 찼다. 벨로크가 샌드위치를 한 입 먹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군.”

“감사히 잘 입겠습니다.”

"잘 입을게."

두 사람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아델은 춤을 추고 있던 무희를 보더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 나라의 문화는 정말이지 천박하군요. 저런 걸 음유시인이라고 데려다 놓은 걸까요?

목욕을 마친, 카라가 한층 풀린 얼굴로 말했다.

“상체 노출은 기본에 음부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춤을 추는 공연도 있다고 들었어. 두 나라 간의 문화 차이기는 한데. 확실히 우리가 보기에는 좀···”

“화끈하군.”

벨로크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그녀들의 앞에 음식이 담긴 접시와 맥주잔 등을 밀어주었다. 카라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녀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거 정말 맛있네. 뭘로 만든 거지?”

“음···”

아델 역시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입가가 씰룩거리는 게 음식 맛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보통 여관의 음식이란 게 돼지죽 같은 스튜와 돌덩이 같은 빵이란 것을 생각하면 아주 훌륭한 편이었다. 노랫소리가 더 커지고, 무희의 춤사위가 한 층 격렬해졌다. 사람들의 환호 역시 더 커졌다. 공연의 클라이막스 부분인 모양이다.

취객들의 음정과 박자가 다 틀린 노랫말, 끼이익 비명을 지르는 바닥을 뒤로한 채, 일행은 여독을 풀었다. 이슬이 맺힌 맥주잔을 연거푸 비웠으며, 고기 요리와 스튜까지 시켜서 포만감을 채웠다. 카라는 테이블에 팔을 올린 채, 턱을 괴었다. 갈색눈이 느슨하게 풀렸다.

아델은 다리를 꼬고는 천박하다 말했던 공연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논의 등 할 얘기는 많았지만, 벨로크는 구태여 입을 열어 이 분위기를 깨트리지 않았다. 그저 눈을 슬쩍 감았다.

대악마를 죽이고 얻어낸 두 번의 레벨업에 대한 결과물. 스탯들을 올리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없었지. 이윽고 내면 속 세계로 들어간 그는 깜짝 놀랐다. ‘벼락 검’이라고 적혀있던 새로운 힘이 ‘용살자의 벼락'으로 바뀌어져 있던 것이다.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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