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이방인
“사막왕국이라··· 설마, 그 공간이동 스크롤을 찢은건가?”
흐르는 숲과 인접해있던 영지. 카르벤의 마법사를 죽이고 얻어낸 주문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바닥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었어. 공작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거든.”
“게오르그가?”
카라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네가 대악마를 죽이고 쓰러졌을 때. 우리 세 사람은 정신을 차렸어. 그리고 명예라고는 없는 그 새끼가 나타났지.”
갈색깔의 눈이 탁하게 빛나고, 그녀의 얼굴에 검붉은 실핏줄이 툭 불거나왔다. 아델이 기겁하며 분노를 가라앉히라고 소리쳤다. 카라는 자신의 가슴께를 매만지더니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층 진정된 어조로 말했다.
“대뜸 칼부터 들이밀더군. 너를 죽이기엔 지금이 적기라면서 말이야. 귀족들 특유의 일 처리 방식에 제대로 당한거지. 우리는 이에 저항했고, 여기로 도망쳐올 수 있었어.”
동료들이 없었다면 자신은 쥐도새도 모르게 멱이 따였을 거라는 얘기였다. 시발. 엿 같은 중세랜드 귀족놈 같으니.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냥 다 죽여버릴 걸 그랬군. 아니, 다음에 만나면 얼굴 가죽을 벗겨서··· 벨로크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이 안 보였다.
“이자벨은?”
그 순간. 불편한 공기가 짙게 깔렸다. 사막 특유의 황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게···”
카라가 말끝을 흐릴 때. 아델이 침중한 어조로 답했다.
“실종되었습니다.”
벨로크는 눈을 슬쩍 감았다 떴다. 시커먼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그가 말했다.
“분명, 공간이동 주문의 성공확률이 8할이라고 했지. 그러면··· 남은 2할의 확률에 이자벨이 걸린건가?”
카라가 변명하듯이 중얼거렸다.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스크롤을 찢을당시, 주위의 상황 때문에 주문이 굉장히 불안정했어. 그래서··· 그녀 혼자 떨어져나간 것 같아. 어딘가 외딴 차원으로 갔을 수도 아니면··· 이 대륙 어딘가,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표류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카라는 이동당시, 그녀의 몸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다는 것과 몸 속에 지하의 마력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성직자를 찾아 한시바삐 정화를 받지 않으면 그녀 역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얘기했다. 이것들 전부가 대악마가 남기고 간 상흔 이었다. 여신의 대답도 그렇고, 산 넘어서 산이군. 벨로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서 아까 네가 흥분했을 때. 아델이 말렸던건가? 검은 핏줄과 탁한 안광 역시?”
그녀의 갈색눈은 이전처럼 맑지가 않았다. 요요하면서도 섬뜩하기 그지없는 불빛을 뽐낼 뿐이었다.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께를 매만졌다.
“맞아. 지금, 내 몸 안에도 지하의 마력이 깃들어있어. 감정이 격해지거나 주문을 사용하면 어두운 속삭임이 들려와. 나를 사로잡으려 하고 있어··· 아마, 이자벨이 살아있다고 해도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닐거야. 어쩌면···”
그녀는 최악의 가정을 생각하고 말을 꺼냈다. 타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로군. 그 때의 흑요정처럼··· 아델은 어느새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성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깃든 마력을 떨쳐내려고 노력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녀의 치료가 끝난다면 카라 역시 마력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벨로크는 양팔을 모래바닥에 파묻고는 고개를 들었다. 지하의 영역을 벗어나서 그런가. 시뻘건 달빛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대신에 낯선 이국의 태양만이 그들을 찬란히 반겨주었다. 벨로크는 눈가를 찌푸렸다. 샛노란 빛의 가시광선. 정신세계가 살짝 특이하던 요정의 머리카락 색깔도 이와 같았더랬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붙이와 늘상 함께하는 삶.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는 게 칼잡이의 삶이라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살아 있을까? 아니, 찾을 수 있나?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이 넓은 대륙에서 그녀를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목숨만 붙이하고 있기를. 의미없는 바람만 가질 뿐이었다.
벨로크는 울적한 기분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놓여져 있던 대검을 맸다. 기도문을 외우고 있던 아델이 걱정스레 말했다.
“조금 더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상황이 그렇게 여유로운 것 같지가 않다.”
그는 갑옷을 달궈버릴 정도로 내리쬐는 태양과 엉망진창이 된 일행을 둘러보았다. 떨어져나간 어깨 견갑과 뻥 뚫린 옆구리, 번쩍거리던 아델의 갑옷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그녀가 애용하던 검과 방패 역시 사라진지 오래였다.
카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급스러운 붉은 색의 로브는 이리헤지고 저리헤져서 걸레처럼 보였다. 복부 주변에 뚫린 구멍 역시 심각했다. 패잔병처럼 보일 지경이군. 벨로크가 말했다.
“식량도 없으니··· 잘 못 하다가는 굶어죽겠는데.”
짐가방역시 전투의 여파로 인해 사라진지 오래였으니,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네 말 대로야··· 이자벨도 걱정되기는 하지만, 우리 역시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끝나지 않는 모래의 무덤은 검과 마법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이곳에서 뼈를 묻기 싫다면 방법을 짜내야 해.”
카라가 무릎을 굽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엉망진창인 로브를 휙휙 털어댔다. 아델 역시 읽고있던 성서를 품에 집어넣고는 허리춤의 채찍을 꺼내들었다. 그래, 죽기 싫으면 움직여야지. 헤쳐나가야지. 그게 사는 거니까. 벨로크는 덤덤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모래 속에 파묻혀 시커먼 기운을 흩날리는 날붙이. 왕이 휘두르던 마검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는거지?”
“공간이동이 이루어질 때. 같이 휘말렸나봐. 잘 됐다고 해야하나···? 저런 검이 공작의 손에 들어갔다면 녀석이 무슨 짓을 더 벌였을지 짐작도 되지 않아.”
벨로크는 잠깐 고민했다. 무기가 없어진 아델에게 쥐어주기에는 저건 마검이었다. 틀림없이 거센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카라는 애초에 마법사니까 못 쓰고, 그냥 모래에 파 묻어버려야 하나?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검이 부르르 떨리더니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이윽고 벨로크를 향해서 느릿하게 날아와 몸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무슨 저런 무기가···”
채찍을 휘두르려던 아델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카라는 찝찝한 무언가를 보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마법사로서의 의견을 내비췄다.
“스스로 움직이는 검이라. 어쩌면 의지를 가진 물건일지도 몰라. 필시, 대단한 마법검이겠지. 일국의 국왕이 쓰던 거니까. 그래도 악에 물들었으니 위험··· 잠깐! 벨로크!”
“그렇단 말이지.”
벨로크는 카라의 말을 무시한 채, 검을 그러쥐었다. 속으로는 잃어버린 동료대신 얻은 게 이런 검 한자루라니, 영 수지가 안 맞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엿 같았다. 그의 머릿속으로 사이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죽여라 찢어라 파괴해라 나를 섬기··· 칵]
벨로크는 주먹을 휘둘러서 검을 후려쳤다. 녀석은 잠시 부르르 떨리는 듯 했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죽여라 찢어···]
벨로크는 감정을 담아 주먹을 여러 번 휘둘렀다. 내 친구 내놔. 시발. 요란한 쇳소리가 한참동안이나 이어졌다. 이윽고 검신에 붙어있던 눈동자에 쩌저적 금이가더니 탱 깨져버렸다. 검이 추우욱 늘어졌다. 그리고 제 스스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에 봤었던 시커먼 묵빛의 대검이 된 것이다.
벨로크는 이 요상한 날붙이를 아예 조각내버릴까 하다가, 레벨업을 제외하고는 이번 여정에서 자신이 얻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까딱거려 목을 한 번 풀고는 새로운 검을 등에 맸다. 크기가 비슷해서 그런지. 잘 맞아떨어졌다. 마법검이라... 이걸 녹여서 새로운 무기로 만들어도 될 것이다. 아니면, 가져가서 팔거나.
“너는 진짜! 무모한 짓 좀 그만두지 못해!?”
씩씩거리며 다가온 카라가 그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간의 고생 때문인지 이제는 꽤나 힘이 붙어있었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래, 마을을 찾으면 갑옷도 맞춰주고 검도 한 자루 사줘야겠군. 아주 훌륭한 마검사가 되겠는데? 아델은 그런 두 사람을 말 없이 바라보다가 입가를 조금 내렸다. 그녀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벨로크님. 어디로 갈까요?”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올렸다. 지평선을 바라보고 태양이 뜨고 지는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개뿔.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신의 오감을 극대화시켰다. 이윽고 늘 해왔던대로 자신의 육체가, 육감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일행은 얼마 안가서 꽤나 번성한 사막의 도시를 찾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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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양식의 갑옷이로군. 거기다가 그 피부색. 어디서 왔나? 아드리아? 아니면, 신성왕국?”
머리에는 둘둘 말아올린 터번같은 것을 쓴 채, 사슬보호구로 가슴만을 가린 경비병이 입을 열었다. 여차하면 찌르겠다는 듯 꾸욱 쥐고있는 창대와 서슬퍼런 눈동자가 그의 의중을 말해주는 듯 했다. 한낯 경비주제에 우리에게 이 따위로 행동한다고? 아델의 얼굴에 짜증이 드러났다.
그녀는 이것이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뭉게졌기에 생겨나는 감정인지. 잃어버린 동료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미묘하게 바뀐듯한 벨로크와 카라의 관계 때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델의 입에서 험한말이 나오려는 찰나. 카라가 말했다.
“아드리아 왕국 출신이에요. 꽤나 고된 여정이었죠.”
“꼬라지를 보니 그런 것 같군. 하긴, 요즘 밖에서는 별의 별 일들이 다 일어나니까 말이지. 매장되어있던 시체가 되살아나거나, 거대해진 식인벌레나 새가 사람들을 습격하고 다니니까.”
경비가 일행의 옷차림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특히나 두 자루의 대검을 소지하고 있는 기사에게 집중되었다. 한 자루는 매고 있었고, 한 자루는 들고 있었다. 거 더럽게 터프하군. 안 무겁나?
“맞아요. 그 괴물들과 맞서 싸우느라. 죽을 위기를 여러 번 넘겼죠. 지치기도 했구요. 어서 여관으로 들어가서 수프와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쉬고 싶은데. 비켜줄 수 있을까요?”
카라가 흐릿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경비의 눈에 안쓰럽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게 창대는 관문을 굳건히 가로막고 있었다.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당신들은 외국인이잖아? 별 다른 신분 증명이 되지않은 사람들이 도시에 멋대로 들어와. 소란을 일으키면 그건 내 책임이 되는 거라고. 나는 영주께 채찍을 맞고 싶지는 않아. 목이 날아가고 싶지도 않고.”
기사라는 직함도 자국 내에서나 통용되는 힘이란 걸 경비가 넌지시 알려주었다. 낯선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이자, 이곳의 토착민이 가지는 자부심이었다.
“이 무지렁이 깜둥이 녀석이···”
“아델. 조금만 참아.”
아델이 작게 으르렁 거리자, 카라가 그녀를 달랬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신분을 증명할 만한게··· 그녀가 그렇게 애를 쓸 때. 한 손을 꾹 쥔 벨로크가 앞으로 나섰다. 경비가 손사래를 쳤다.
“안된다고 했을텐데?”
“여기.”
벨로크는 쥐고있던 동화 몇 개를 그의 손에 얹어주었다. 경비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굳건한 창대 역시 치워졌다. 그가 말했다.
“알타니스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도시가 여러모로 어지러우니. 부디 조심하시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세상 속에서 일행은 성문을 통과했다. 터번을 쓰고 휘어진 검을 차고있는 병사, 눈가만 내놓은 로브자락을 쓰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여인들. 치렁거리는 치마같은 옷을 입은 남정네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쳐 갔다.
공통점이라면 그들 모두가 진한 구릿빛의 피부를 가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새하얀 피부를 가진 일행은 대번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벨로크는 힐끔 거리는 그들의 시선에 반응도 주지 않은 채, 생각했다. 사막도 그렇고, 복장도 그렇고. 이집트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 무슨 짬뽕처럼 섞여있군. 나중에 가서는 스핑크스랑 피라미드도 나오겠어.
새삼스레 이 게임을 만든 자들이 얼마나 대충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엿같은 세상 같으니. 그렇게 사막의 도시를 걸어가는 와중. 카라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어··· 음. 요새 괴물들하고 부딪히기만 해서 그런가? 현실적인 감각이 조금 떨어졌던 모양이야. 그래,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말이지.”
“저도 완전히 까먹고 있었습니다. 분명, 벨로크님이 전에 하셨던 행동들을 봤었는데 말입니다.”
아델은 무기를 안 휘두른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을 이룩한 것이었다. 그래, 이렇게 점점 바껴나가는 거지. 내가 이 엿같은 세상에 적응해나가는 것처럼.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갑옷부터 시작해서 일상복도 조금 사야할 것 같은데. 일단 시장부터 갈까? 아니면 여관?”
“일단 대장간부터 들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주문먼저 해놓고, 돌아다니면 편하잖아.”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러지.”
벨로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쇠를 두들겨서 무언가를 펴내고, 뚝딱 만들어재끼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까. 일행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묻고 물어 시장가의 공방들이 모여있는 거리로 향했다. 모자, 칼, 밧줄, 가죽을 세공하는 무두장이까지 각양각색의 장인들을 지나쳐서 웬 망치가 새겨져 있는 대장간에 들어갔다.
일행은 눈을 크게 떴다. 불가에 앉아있는 대장장이의 정체 때문이었다. 대장장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온 몸이 탄탄한 근육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난쟁이였다.
“음? 손님인가? 지금은 좀 바쁘니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해.”
그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축객령을 내리려는 찰나. 난쟁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의 시선이 벨로크가 들고있는 두 자루의 대검으로 향했다.
“자··· 자네. 대체 그 검들은 어디서 난 건가? 아니?! 이제 보니까 그 갑옷도···!”
난쟁이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윽고 자리를 와락 박차고 일어나더니, 벨로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이보시오. 손님! 그 검! 그 검 좀 자세히 볼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