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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잘 풀린다? 왕이 죽었으니 이제 자신이 왕관을 쓰는 일만 남았다는 뜻일까? 아니, 그게 다는 아닌 것 같은데··· 아델은 노귀족의 유쾌한 목소리와 번들거리는 시선에서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전방을 주시한 채, 발만 슬쩍 움직여서 카라와 이자벨을 툭툭 쳤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무기를 들어. 벨로크님 앞으로.”
“응?”
“···알았어요.”
이자벨이 재빨리 대답하고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카라를 이끌었다. 아델 역시 공작과 그의 기사단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뒷걸음질 쳐서 벨로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이 말했다.
“음? 왜 그렇게 경계하는지 모르겠군. 자네들은 왕과 대악마를 죽인 영웅들이 아닌가?”
공작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옆의 기사들에게 무어라 손짓을 하고 있었다. 몇몇은 병사들을 통솔해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를 틀어막았다. 아델이 보기에 그것은 교단이나 다른 지역의 영주들의 개입을 막는 것처럼 보였다. 또 다른 몇은 슬금슬금 움직이며 넓은 홀의 공간들을 선점하고 있었다. 의도는 명백했다. 포위망이었다. 가슴께를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던 이자벨이 검을 뽑았다.
“벨로크를 부탁해요.”
그녀는 카라를 보면서 중얼거린 후, 앞으로 나섰다. 홀을 감싸고 있는 저릿한 살기에 카라 역시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가 양손으로 벨로크를 흔들었다.
“벨로크! 어서 일어나! 우리 다 죽게 생겼어!”
카라는 벨로크의 뺨을 꼬집거나, 약간의 전격 마법까지 사용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마, 대악마를 상대하고 난 후유증 때문이리라. 시발. 카라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다. 최후까지 아껴두기를 잘했다. 8할의 확률에 목숨을 걸 때가 온 것이다. 슬쩍 눈만 돌려 카라를 잠깐 바라보던 아델이 말했다.
“대악마를 죽인 영웅이라··· 알아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죠.”
이자벨과 등을 맞댄 채, 검을 치켜올리고 있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뭡니까? 벨로크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왕좌에는 관심이 없다고.”
공작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몇 발자국 앞으로 나와서 허리를 숙였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주인 잃은 왕관이 들려있었다.
왕국의 최정상에 오른 자만이 쓸 수 있다는 권력자의 상징. 기묘한 룬 문자와 함께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쇳덩이. 공작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왕관을 쓰다듬었다. 그가 말했다.
“이 왕관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닐세.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있거든.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나?”
이제 기사단은 옥좌 근처에 있는 일행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포위망을 구축했다. 길쭉하게 늘어나는 마법의 창을 가지고 있던 중년 기사. 가란에서부터, 시미터를 휘두르며 단검을 비처럼 쏟아내던 사막 왕국 출신의 사내, 강력한 원소 마법을 사용하는 요정 마법사까지. 악귀들과의 싸움에서도 살아남은 일당백의 전사들이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들의 주인. 공작이 말했다.
“온갖 신비로운 무구들이 잠들어있는 무기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과 야화들을 가득 품고 있는 고서들, 왕의 선조에서부터 지금까지 모아온 금은보화들까지. 이 모든 창고들의 열쇠가 바로 왕관이라네. 오직 이걸 쓰고 있는 자만이 그 창고에 출입할 수 있지. 그리고 이제는··· 내 것이고.”
공작은 연극의 주인공처럼 과장되게 웃으며 비척비척 걸어왔다. 그의 시퍼런 눈동자는 내면에 있던 탐욕을 거침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가슴속에 있던 야망 역시 갑옷을 비집고 나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이제는 자신의 꿈을 이룬 자가 왕관을 머리에 턱 썼다. 갑옷에 보석 왕관을 쓴 우스꽝스러운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누워있는 벨로크를 향해 있었다.
“단신으로 대악마를 죽이고 수백 마리의 악귀들을 척살하는 전사라니. 내가 품기에는 너무 큰 그릇이며, 아군으로 두기에도 너무 위험해. 강자와 약자의 약조라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깨지기 마련이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나?”
게오르그가 차갑게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침, 아주 좋은 기회도 왔고 말이야. 그는 낮게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큰 소리로 외쳤다.
“처리해라!”
공작의 부관이자, 여명기사단의 고문. 가란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금화를 내어주고, 땅덩이를 하사하는 것은 공작이었다. 그는 명예를 아는 기사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거리낌 없이 창을 내질렀다.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룬 문자가 화르륵 빛나고 창날이 빛살이 되어 날아왔다. 아델은 기도문을 외우며 성력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내면속에서 끓어오르던 여신의 힘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중간에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건···”
아델은 다급히 검을 휘둘러 창날의 궤도를 틀었다. 비명을 지르는 검신과 튀어대는 불똥을 뒤로한 채,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의 몸 안에 성력을 제외한 또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성기사는 그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대악마의 주문과 함께 몸 안에 심어졌던, 지하의 마력이었다. 그 어둠의 힘이 성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젠장. 하필 이럴 때. 그녀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질 때. 뒤쪽에 있던 카라가 외쳤다.
“모두 조금만 버텨!”
무언가를 부욱 찢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마법진이 일행의 밑에 떠올랐다. 손에 불덩이를 들고 있던 요정 마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공간이동이야! 막아!”
요정 마법사는 그 말과 함께 손에 들린 불덩이를 던졌다. 카라의 입술이 쉴 틈 없이 움직였다. 화염구를 파훼할 주문을 외우기 위함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속에도 깃들어있는 지하의 마력이 이에 도움을 주었다. 아주 빠른 속도의 영창이 이루어졌고, 갈색 눈이 탁하게 빛났다. 지팡이에서 뻗어 나온 얼음창이 불덩이를 막아냈다. 치이익 수증기가 일어났다. 뇌리를 파고드는 어두운 기운에 카라가 헛구역질했다.
“우웁.”
그런 그녀의 앞으로 단검 여러 개가 휙휙 날아왔다. 사막 왕국 출신의 이방인이 날린 것이었다. 카라의 갈색 눈이 커졌다. 그녀의 두 눈은 시퍼런 칼날과 십자 막이, 가죽에 감싸인 손잡이까지 알아볼 수 있었지만, 몸은 그것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 순간. 얄상한 세검이 이리저리 휘둘러지더니, 불똥을 일으켰다. 그 뒤를 이어 퍽퍽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가 여러 개 울렸다.
카라는 부르르 떨리던 눈을 슬쩍 감았다 떴다. 늘씬한 가죽옷을 차려입은 요정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자벨. 너··· 괜찮아?”
“견딜만해요··· 몸속에서 뭔가가 날뛰고 있는 것만 빼면요.”
이자벨은 그 말과 함께 검붉은 피를 컥. 토했다. 카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몸에 박힌 단검과 쇠뇌의 화살들 때문이었다. 한 눈에 보아도 치명상처럼 보였다. 그 순간. 바닥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의 빛이 강하게 점멸했다. 공간이동의 전조였다. 카라가 부상당한 이자벨을 끌어당기고는, 다급히 외쳤다.
“아델! 어서 이쪽으로!”
휙휙 찔러 들어오는 창을 검으로 흘려내고, 다른 기사가 휘두르는 도끼를 갑옷으로 막아내고 있던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노린 가란이 눈을 빛냈다. 이윽고 창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강하게 휘둘렀다.
철컹 소리와 함께 창날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흐릿한 궤적이 그녀의 허리를 절단낼 것처럼 쇄도해왔다. 아델은 양발을 오므려 훌쩍 점프하는 것으로 그 수평 베기를 피해내고는 양팔로 바닥을 짚었다. 그녀는 어느 틈에 마법진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 기행에 가란과 도끼를 들고 있던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저런 움직임이···”
마법진의 빛이 이제는 공동을 환하게 채웠다. 그 속에 있던 일행의 모습 또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공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막지 않고!”
공작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날에 새겨진 룬 문장이 강하게 빛났다. 그의 의지와 정신력을 빨아들여서 공명하는 것이었다. 가란 역시 자신의 창을 길게 늘어뜨려서 찔러왔고, 요정 마법사역시 손에 들린 벼락을 뿜어냈다.
만신창이가 된 동료들 대신, 아델이 나섰다. 그녀는 내면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두운 마력을 억눌렀다. 이윽고 기도문을 외우며 손에 들린 검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헬레나여! 나한테 저 비겁자를 단죄할 힘을!”
그녀의 눈동자가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고, 목덜미와 손등에 기묘한 문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머리칼 역시 허공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자신의 골칫거리 하나를 물리쳤기에 감동한 여신이 내려준 은혜일 수도 있었고, 아델의 놀라운 의지와 성력이 합쳐져 이뤄낸 용력일 수도 있었다. 공작의 마법의 칼날이나, 늘어나는 창, 벼락은 그녀의 불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젠장···”
그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이를 악문 아델이 씹어뱉듯 외쳤다.
“네놈들의 얼굴, 목소리. 다 기억한다. 조금만 기다려라. 혀를 뽑고, 두 눈을 뭉개주지. 그다음에 목을 자르고, 창자를 끄집어내 교수형을 시켜줄 테니까!”
아델은 그 말과 함께 손에 들린 검을 휙 던졌다. 공작의 발치에 틀어박힌 시미터가 부르르 떨리며 맹렬한 빛을 뿜어냈다.
“이런, 쌍년이!”
그가 욕설을 내뱉은 순간, 검이 쾅 폭발했다. 맹렬한 화염의 폭풍우 속에서 일행은 빛무리에 휩싸여 스르륵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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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의 마음을 엿보는 악마를 죽였을 때. 미사일이 쾅 터졌던 그 순간. 회색빛의 도시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주문의 사출자가 없어졌기에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 여파로 인해, 벨로크의 의식은 망망대해의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시커먼 어둠의 바다 속을 유영하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의식은 분명히 여기 있건만, 주위의 모든 것은 그를 집어삼키고만 있었다.
영혼마저 갈가리 찢겨나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벨로크는 대악마라는 년의 마지막 단말마를 떠올렸다. 시발.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진짜 좆된 것이다. 끝도 없이 이 미로 같은 바다를 헤매야 한다는 말이니까. 아니, 애초에 이 장소가 바다가 맞기는 할까? 여기서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온갖 상념에 빠져들었다. 종래에는 어떠한 학자가 주장했던 정신 분석학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갑작스레 주위가 환해졌다. 강렬한 섬광이 안구를 강타하자, 벨로크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광원채 하나가 그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글거리는 열기와 시뻘건 색으로 보아, 저건 태양이었다. 그러니까, 수소와 헬륨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행성. 그 태양이 점점 다가왔다. 이윽고 모습마저 변하기 시작했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하얀색 면사포를 쓰고 있는 여인이었다. 벨로크를 아이처럼 내려다볼 정도로 거대한 여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벨로크는 저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태양, 여자, 여신. 태양신. 헬레나. 아주 간단한 추론이었지만, 그녀가 보여주는 위압감을 생각한다면 얼추 맞는 것도 같았다. 그 말이 맞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크가 말했다.
“나를 구해주러 온 건가?”
여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손바닥을 움직여서 벨로크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무슨, 거대한 망치가 후려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잠시 후, 여신의 손길이 사라지고, 벨로크는 진정으로 궁금했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 엿 같은 땅에 떨어지고 나서부터 쭉 간직해왔던 의문이기도 했다.
“나는 왜 이 세계에 온 거지?”
여신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멀뚱한 표정으로 봐서 자기도 모르는 듯했다. 시발? 신도 모른다고? 벨로크는 뭐라 입을 열어서 그녀에게 따지려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당신이 말한 대로 대악마를 죽였다. 이제 나를··· 돌려보내 줄 건가?”
여신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 그대로 벨로크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어째선지 마음이 불편했다. 저 시뻘건 두 눈이 자신의 내면속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지금 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여신은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었고, 벨로크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걱정을 가득 담고 있는 검은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 모래들의 폭풍이었다. 하나가 부족한 것 같은데. 그보다 여기는 또 어디야? 벨로크가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아델이 그의 가슴을 누르며 소리쳤다.
“벨로크님! 괜찮으십니까!”
“벨로크! 너 괜찮아?!”
그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정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입안으로 텁텁하게 들어오는 모래바람과 황량한 주변의 풍경. 손안에 와닿는 알갱이까지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델의 부축을 받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괜찮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지?”
“그게···”
카라는 대답을 망설이는 듯 입을 합 다물었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
“아리안 사막이야.”
“사막?”
카라의 한숨 소리가 더 커졌다. 이윽고 머리칼을 휙휙 매만지며 모래 알갱이를 털어내고는 다시금 말했다.
“아드리아 왕국의 동쪽. 어디를 가든 단조로운 황색만이 가득한 땅, 열기와 가뭄의 지옥이자, 구릿빛 피부의 인종들이 모이는 곳.”
카라의 요란한 설명을 들은 벨로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대로면 지금 그들은 다른 나라로 온 셈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