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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
꿈을 꾸었다. 나한테 있어 제일 비참했던 그때로. 무력했던 그때로 돌아가는 악몽이었다.
산속에 있는 가난한 농촌 마을. 매해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황폐한 땅이 그녀의 고향이었다. 아델은 끔뻑 눈을 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여기는 대체··· 난 분명 악마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는데.’
그 순간. 어떠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델. 뭐 하는 거니? 어서 나와서 거들지 않고?”
“네. 나가요.”
아델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몸과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기이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작은 손을 움직여 덮고 있던 이불을 정리하고, 치맛자락에 묻어있던 짚을 휙휙 털었다. 그러고는 집안에 나뒹굴고 있던 농기구를 집어 들더니 밖으로 훌쩍 나간 것이다.
뜨거운 태양이 소녀를 내리비추었다. 그녀는 잠깐, 눈을 찡그렸다가 시선을 돌렸다. 자갈과 모래들이 가득한 텃밭. 쩍쩍 갈라져 있는 쿰쿰한 땅 위에서 분주히 손을 놀리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턱수염을 길게 기른 시커먼 피부의 촌부였다.
“아델! 뭘 꾸물거리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여보! 그만 해요! 어제 일이 많이 힘들었잖아요! 아델은 아직 어리니까!”
얼룩이 가득 묻은 옷을 입고, 머리에 보자기를 쓴 여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이를 만류했다.
애절함이 절절히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중년인한테는 소용없었다.
“이 여편네가···!”
텃밭을 갈고 있던 중년인은 쟁기를 휙 집어 던졌다. 이윽고 자신을 만류하던 여인의 뺨을 짝 때렸다.
“당신은 닥치고 있어! 아델! 이 멍청아! 어서 와서 일해!”
“네, 네! 아버지! 지금 가요···! 때리지 마세요!”
폭력을 대화의 수단으로 삼은 채, 윽박지르는 가장의 앞에서 소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저 손길이 자신에게는 닿지 않기를. 오늘 하루는 얻어맞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이 다였다. 아델은 소녀의 몸에 들러붙은 채, 이 모든 상황을 보고 느끼고 있었다. 무력한 시골뜨기 소녀와 폭력적인 가장. 잊어버리고 싶었던, 끔찍했던 과거의 편린이었다.
‘어릴 때의 내 모습...’
덕분에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환각 상태에 빠져있다. 그것도 모든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끔찍한 환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녀석은 하나밖에 없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싸우던 뿔 달린 그 여자 악마!
‘이 씹어 죽일 년이! 감히 나한테 이딴 짓을! 아니, 그보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서 벨로크님을 도와야 한다!’
아델은 이를 악물고는 자신의 내면속에 있는 여신의 힘. 태양신의 성력을 뿜어내려고 했다. 악마와 상극인 천상의 힘이라면 이 거짓된 세상을 깨트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몸속이 화끈거리는 감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그림자라도 끼얹은 듯 뿌옇게 탈색되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델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성기사로서의 감각인지 전사로서의 육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힘이 부족했다. 이 공간을 만들어낸 악마의 주문을 깨부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아니, 포기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꾸물거려서는 안 돼!’
열두 살의 소녀가 되어버린 성기사는 그렇게 환상 속에서 발버둥 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끝나지 않는 미궁은 그녀의 마음을 좀먹어 갔다. 아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비루한 과거는 계속해서 이어져갔다.
사시사철 뿌연 연기가 가득 차 있는 집안과 더러운 바닥, 질 그릇 위에서 꿈틀거리는 벌레 정도는 굉장히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소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익숙했으니까. 하지만···
“이 여편네야! 술은? 빨리 가지고 오지 못해!”
“미, 미안해요! 지금 사 올게요!”
“빨리 움직여! 네년이 그따위니까 아델 역시 저 모양 저 꼴이지!”
“네, 네.”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앉아, 손짓만 일삼는 아비와 저항하기는커녕 무력하게 얻어맞기만 하는 어미의 모습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미가 불쌍해서는 아니었다. 아델은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자신의 미래가, 촌부의 딸년이 어른이 됐을 때. 나 역시도 저렇게 되버릴까봐. 그것이 못내 두려웠다. 어미처럼 비참하게 사는 것은 싫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조차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밭을 일구어서 벌어낸 얼마 안 되는 가산조차도 곧 주정뱅이 아비의 입속으로 다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수염을 흠뻑 적신 독주가 뇌마저 녹여버린 걸까? 아비의 폭력과 욕설은 갈수록 도를 넘어섰다. 종래에는 하나뿐인 딸년마저도 노예상에게 팔 정도였다.
“나리. 그래서 얼마 정도로 쳐주실 수 있을까요?
눈이 쫙 찢어지고 배가 통통하게 튀어나온 상인 앞에서 아비가 손을 슥슥 비볐다. 가족을 대할 때 하고는 차원이 다른 비굴한 태도였다.
“글쎄. 너무 볼품이 없는데. 하녀는커녕 작부로도 못 쓸 정도야.”
상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먼지투성이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혀를 내밀어 입가를 핥았다.
“어허. 무슨 그런 말씀을··· 꼴이 이래서 그렇지. 씻겨놓으면 봐줄 만합니다요. 제 어미를 닮아서 미색 하나는 출중하니까요.”
“흠? 그래? 자네가 부디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기를 바라지. 여기 있네. 충분한가?”
상인이 돈주머니를 턱 던졌다. 양손으로 이를 받아든 촌부는 주머니를 슬쩍 열어본 다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요! 나리!”
남편이 무서워, 하나뿐인 피붙이가 팔려 가는데도 입을 꾸욱 닫은 어미. 고작해야 몇 달 치의 술을 사 먹기 위해 자신을 팔아버린 아비. 소녀는 탁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체념, 무력감, 고통, 좌절. 온갖 음울한 감정들이 소녀의 마음속에 있던 아델에게 절절히 와닿았다. 아델은 생각했다. 이쯤이었다. 여기서 벨로크님이 나타났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주었었다. 그녀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다. 하지만···
“얘들아 물건 실어라. 조심해서 다루는 거 잊지 말고.”
소녀는 짐짝처럼 나무로 된 감옥 안에 처넣어졌다. 소녀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팍 숙일 때. 아델은 당황했다. 이게 뭐야··· 내 과거는 이렇지 않았는데? 난 분명 노예로 팔려나가기 전에 구원받았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기사의 종자가 되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귓속으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델. 눈을 가리고 귀를 닫은 이 불쌍한 여인아. 진실을 말해줄까?]
독이 잔뜩 베인 목소리가 아델의 마음을 강타했다.
[넌 이대로 팔려나가서 거리의 창부가 된단다. 성난 취객들을 상대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버리지.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줄까? 너는 그들의 물건을 네 여린 몸으로 받아내고, 또 받아내다가 망가져 버려. 장난감처럼 말이야. 종래에는··· 그 아랫도리마저도 남지 않게 되지.]
아델이 으르렁거렸다.
‘개소리 하지 마라. 나는 하늘 아래 올곧이 내리쬐는 태양 빛의 사도이며, 벨로크님의 검이자 방패다. 어디서 그 더러운 입으로 나를 기만하려 드는 것이냐!’
목소리가 더 커졌다. 이번에는 비웃음이었다.
[한낮 비렁뱅이 농부의 딸이 신을 모시는 성기사가 된다? 너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니?]
[처음이 어려웠지. 나중에 가서는 너도 즐기기 시작했어. 잔뜩 풀린 눈으로 오직, 쾌락만을 탐하던 네 모습을··· 너도 곧 보게 될 거야.]
[나는 네가 한 번에 몇 명의 남자들을 받아내는지 봤어. 정말 대단하더군. 아주 능숙하던데?]
더러운 속삭임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하나같이 견고하던 아델의 마음에 금을 쩍 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델은 한층 더 약해진 목소리로 저항했다.
‘더러운 협잡꾼이··· 이 환상을 어서 풀지 못하겠느냐.’
[글쎄. 이쯤 되면 너도 느끼고 있지 않아? 이게 과연 환상일까?]
그 순간. 세상이 바뀌었다.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 위. 검은 장발머리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 놓여있는 낡은 촛대가 그녀의 모습을 여과 없이 비췄다. 가슴과 등이 이리저리 패인 싸구려 드레스 아래, 속옷인지도 의심되는 천 쪼가리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얼룩이 가득 묻은 거울을 벗 삼아. 두터운 화장을 고치고 있을 때. 문이 끼익 열렸다. 이윽고 얼굴이 잔뜩 붉어진 사내 한 명이 들어왔다. 여인은 입가를 끌어당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능숙한 손길로 취객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붉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그녀가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나··· 한참이나 기다렸는데.”
“미안, 미안. 일이 너무 늦게 끝나서 말이지. 그래도 아델. 너를 안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좀 봐줘.”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는 거예요?”
여인이 사내의 가슴을 약하게 치며, 앙탈 부렸다. 사내는 피식 웃었다.
“창녀 주제에 여자는 무슨··· 어서 벗기나 해.”
“물론이죠. 받은 만큼 열심히 봉사해줄게요.”
한순간에 요염한 여인이 된 아델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상황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내가 자신의 앞섬을 풀어 재끼는 손길에서부터,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술 냄새, 툭 튀어나온 뱃살과 삐그덕 거리는 침대까지. 이게··· 정말 나라고? 그녀의 영혼이 크게 흔들렸다. 그때. 비릿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어때? 네 미래의 모습이야. 아주 완숙한 창부가 되었지. 그리고 이제··· 끄아아악!]
아델은 화들짝 놀랐다. 파지지직 하는 벼락소리가 울리더니 목소리가 뚝 끊긴 것이다.
‘이게 무슨···’
그녀가 당황하는 순간. 여관의 낡은 방문이 쾅 열렸다. 침대 위에 있던 두 사람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흑색 갑주를 입은 기사가 문 앞에 턱 하니 서 있었다. 사내는 당황했지만, 벗고 있던 옷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기사를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 억!”
기사는 말 대신 행동을 선보였다. 뚜벅뚜벅 부츠 발로 걸어오더니 대뜸 검을 휘두른 것이다. 강렬한 풍압이 일었고, 사내는 반으로 쩍 갈라져 피와 뇌수를 흩뿌렸다. 그 때. 비명소리가 울렸다.
시뻘겋게 물든 침대보위에 피와 살점을 끼얹은 전라의 여인이 이를 딱딱거리고 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기사는 조금 곤란해 보이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화장이 좀 진하군. 머리도 좀 긴 것 같은데... 뭐, 너한테는 다 잘 어울린다만···”
여인의 마음속에 있던 아델이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흑기사의 검이 휘둘러지는 것이 더 빨랐다. 대검이 낡아빠진 여관 바닥을 쩌억 갈라버렸다. 이윽고 쉴 틈 없이 움직이며 주변의 모든 광경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일렁거리고 있던 촛대가 휙 꺾여나가고, 침대가 조각났다. 얼룩이 가득 묻어있던 거울 역시 깨져나갔다. 여인이 귀를 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흑기사가 검을 치켜 올렸다. 번쩍하며 벼락이 치고, 파괴적인 빛이 주변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강렬하게 피어난 섬광 속.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그가 말했다.
“아델.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동료들을 부탁한다.”
아델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음습한 주문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 또한 느꼈다. 흐릿하게 잔상만 남은 빛과 소음을 뒤로한 채, 성기사는 눈을 떴다.
“으윽···”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엉망진창이 된 홀 너머. 쓰러져 있는 세 명의 남녀가 보였다. 카라와 이자벨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신음을 흘려대고 있었고, 벨로크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있었다. 그의 옆에 놓인 대검에는 미라처럼 말라버린 여인의 시체가 턱 하니 꿰뚫려 있었다.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번에 이해했다. 그들이 악마의 주문에 당해 잠들어있는 동안에 벨로크 혼자서 두 명의 괴물들을 처치해버린 것이다. 아델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벨로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아직 너무나도 약하구나.’
연이은 전투의 여파로 몸은 납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대악마의 주문을 정통으로 받아냈던 정신과 영혼 역시 잔뜩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트렸던 검을 주워들고 동료들에게 향했다.
환상 속에서 벨로크가 내렸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함이다. 그녀가 다가가기 무섭게 카라와 이자벨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윽고 비명을 지르며 와락 깨어났다.
“하아, 하아. 여기는 대체···”
“나. 무척이나 끔찍한 경험들을 했어요. 그게 다··· 꿈이었나요?”
“모두 괜찮나?”
두 사람의 시선이 아델에게로 향했다. 그녀들이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척척 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우와아아 하는 병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잠시 후, 홀의 문이 콰앙 열렸다. 이윽고 온 몸에 피를 가득 묻힌 채, 한층 피폐해진 안색의 게오르그 공작과 그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장판이 된 홀 안. 노귀족의 시선이 뱀처럼 돌아갔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벨로크와 잔뜩 지쳐 보이는 그의 동료들, 마지막으로 죽어버린 악마들의 잔해를 차례차례 훑었다. 그가 히죽 웃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