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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75화 (75/222)

75

결착

“벼락이라··· 룬검인가? 주문을 막아내는 갑옷도 그렇고 자네는 참 진귀한 유물들을 많이 가지고 있군.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마귀왕이 비실비실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손에 들린 마검과 몸 위로 돋아난 촉수들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그래봤자 자네는 일개 칼 든 검사일 뿐일세. 벨로크 경. 감당할 수 있겠나? 한 손으로 열 손, 아니, 수십 개의 손아귀를 막아낼 수 있겠냐는 말일세.”

녀석은 다잡은 사냥감을 농락하듯 느릿한 걸음으로 벨로크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입술은 굳게 닫힌 채, 일자를 그렸고 눈썹 역시 미동조차 없었다. 무슨 석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겁에 질려서 얼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그렇지 않았다. 무표정을 가장한 채, 깊게 가라앉아있던 눈동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새카매져 갔다. 이윽고 그 속의 동공이 불길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노였다. 앞에서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왕관 쓴 괴물, 동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 마냥 왕좌에 턱 하니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창부, 마지막으로 이 엿 같은 세계 자체가 그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그는 울화처럼 치밀어 오르는 이 감정을 하나로 모아냈다. 그리고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네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나면 경험치가 얼마나 오를지 가늠도 안 되는군. 부디 그만한 값어치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의 의지에 화답하듯 검날을 타고 흐르는 벼락이 한층 더 커졌다. 파지지직 소리가 공동을 가득 울리고, 그의 얼굴 역시 노랗게 보일 정도였다. 마귀왕이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영문 모를 소리에 대한 의문일 수도 있었다. 벨로크는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달려들었다. 놈 역시도 그랬는지 대뜸 촉수를 휘둘러왔다.

악마의 마력을 통해 변이된 뼈마디가 채찍처럼 조여들었다. 하나하나가 쇠뇌의 화살을 뛰어넘는 위력에 그보다 배는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벨로크는 달려오는 기세 그대로 크게 한 발 내디뎠다. 이윽고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벼락의 검을 휘둘렀다.

거센 풍압이 일었다. 샛노란 스파크가 그 뒤를 이었다.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괴물의 뼈마디가 잘려 나가고, 재가 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오호...”

한 다발을 잘라내도 촉수는 많았다. 마귀왕은 자신의 모든 뼈마디에 사악한 의지를 담아 쏘아냈다. 채찍의 폭풍을 보는 것 같았다. 벨로크는 멈추지 않았다. 하나를 피해내면 또 하나가 온다. 그걸 피한다면 또 다른 흉수가 자신을 쫓을 것이다.

그는 파도에 저항하듯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고, 아래에서 위로 치켜 올렸다. 종래에는 사선으로 베어냈다. 이 순간. 단련된 전사의 육체가 빛을 발했다. 갑주 아래 힘줄이 비죽 솟아오르고, 그의 어깨와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러자, 룬 문자가 새겨진 대검이 샛노란 궤적을 그리며 폭풍을 만들어냈다. 벼락의 폭풍이었다. 이윽고 두 개의 폭풍이 서로 맞부딪쳤다.

금이 가고 조각난 판석이 쿠르르 울렸다. 촉수에서 뿜어져 나온 체액과 검은 피가 여기저기에 튀었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몇 개는 갑옷에 콱 박혀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강철 같은 피부와 근육을 뚫어내지는 못하고, 검에 갈려 나갈 뿐이었다.

결국, 바닥을 수놓은 것은 악마의 살점과 피륙이었다.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는 촉수의 위로 거대한 음영이 졌다. 연마된 강철 부츠가 새하얀 뼈마디를 콰지직 밟아버렸다.

“이놈이···!”

몸 곳곳이 잘려 나가 한층 더 흉해진 괴물이 으르렁거렸다. 아까 전까지의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을 보는 것 같았다. 벨로크는 부츠를 바닥에 비비며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연기에 휩싸인 동료들이 몸을 부르르 떨며 헐떡거렸다. 고통스러운 신음이었다.

옥좌에 앉아있는 악마는 여전히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저, 눈동자를 빛내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벨로크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미친년. 뭔가 믿는 구색이 있는 모양인데. 기다려라. 대가리를 깨줄 테니까. 그는 악마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끄-에에엑!

쇠를 긁는 괴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제는 왕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그저 왕관 쓴 괴물이 내지르는 소음이었다. 다다다닥 바닥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즉시, 벨로크는 검을 휘둘렀다. 벼락의 검과 사이한 마검이 맞부딪쳤다. 마주 대고 있는 날붙이 사이로 거미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는 괴물이 보였다.

“검에 담아두었던 힘을 방출한 지금··· 내 근력은 아까전과 비교해서 배는 강하다. 그런데 어째서···”

당황한 듯 녀석의 눈두덩이가 잔뜩 일그러졌다.

“힘만 센 괴물이 더 잡기 쉬운 법이지.”

짧게 답한 벨로크가 검을 든 손아귀에 힘을 꾸욱 주었다. 그의 손목과 어깨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미세하게 움직이며, 괴물의 힘을 흘리고 있었다. 면갑 아래 시커먼 눈동자가 괴물을 주시했다.

그 속에는 두려움이란 감정 자체가 없었다. 길가의 쓰레기라도 치우듯 무신경 시선.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분노. 화들짝 놀란 괴물이 검을 빼며 물러섰다. 그 덕분에 벨로크의 대검이 녀석의 가슴을 쩍 갈랐다. 파지지직 전류가 몸을 타고 흐르고, 왕관 쓴 괴물이 울부짖었다.

“짐은··· 짐은 왕이다. 이 나라의 국왕이란 말이다! 내 왕국을 뺏어가게 둘성싶으냐! 나는··· 나는···!”

마귀왕이 발악하듯이 검을 휘둘렀다. 벨로크는 괴물의 어깨와 팔의 움직임, 검의 궤적을 주시했다. 그러고는 한칼, 한칼 튕겨내며 괴물의 몸에 상흔을 입혔다. 뼈가 쩍 갈라졌다. 거인처럼 거대하던 그의 몸체도 모래성처럼 폭삭 주저앉았다. 광기로 타오르던 백골 속의 눈덩이도 이제는 희미하게 점멸할 뿐이었다. 그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아스타로트··· 도와다오. 짐을··· 짐을··· 구해다오!”

“흐음··· 싫은데?”

“뭐라?! 네··· 네년이! 우리의 거래를 잊었단 말이냐!”

겨우겨우 버텨내던 왕이 토해내듯 소리쳤다. 하지만, 옥좌 위의 창부는 비릿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당신이 죽으면 내가 주기로 했던 지하의 마력들. 안 줘도 그만이잖아? 이토록 좋은 기회가 왔는데. 내가 그걸 왜 걷어차야 할까? 말해 줄래?”

벨로크의 검이 번뜩였다. 괴물은 왼팔이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소리쳤다.

“그런 바보 같은! 너 혼자서 이 인간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주문과 사술이 특기인 네년이?! 말도 안 되는···”

여인은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왕아. 너는 내 진짜 힘을 몰라. 그리고... 대악마의 권능을 뭐로 보는 거니? 나는 자신 있어. 저 멋진 사내는 내 것이 될 거야. 오직 나를 위해 봉사하며 그 검을 휘두르겠지. 기왕이면 다리 사이의 칼 또한 늠름했으면 좋겠는데···”

아스타로트가 천박하게 입가를 핥으며 눈을 빛냈다. 염병, 쌍으로 쇼를 하고 있군. 벨로크는 숨을 들이마시며 검을 치켜 올렸다. 벼락이 흐르는 장창이 만신창이가 된 괴물의 가슴께를 척 겨누었다.

녀석은 남아있는 한쪽 팔을 휘두르며 뭐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광인의 유언 따위 벨로크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몸이 섬광처럼 쏘아져 나갔다. 공기를 가른 대검이 두개골을 쩍 갈랐고, 붉은 눈동자가 그 빛을 잃었다. 왕관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제 손으로 백성들을 바치고, 죽음을 거스르고자 했던 괴물. 미치광이 왕이 그렇게 죽었다. 놈이 죽으면서 남긴 것이라고는 쑥대밭이 된 왕국과 낯선 땅에서 온 이방인의 경험치, 세 치 혀로 그를 꾀었던 창부의 비웃음뿐이었다. 옥좌에 앉아있던 그녀가 짝짝 손뼉을 쳤다. 그러고는 끈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젊은 기사야. 아니, 마왕을 벤 용사라고 불러줘야 할까? 실로 훌륭한 솜씨야··· 보여? 나. 젖었어···”

그녀는 양팔로는 얼굴을 부여잡은 채, 등에 달린 거미 다리로 제 둔부와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그렇게 행동해봤자, 역겨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꾸욱 쥐고는 자세를 다잡았다. 이윽고 그의 몸이 한 줄기 벼락이 되었다. 콰르릉 우레가 치고, 대검이 왕좌를 쩌적 갈랐다. 그 사이에 있던 여인의 가녀린 몸 또한 꼬챙이 채 꿰어버렸다.

“뼈가 시리는 군··· 아니, 영혼 자체가 찢겨나가고 있어··· 더럽게 위험한 검이네. 위력만 보면 이름 높은 성검과 맞먹을 정도야···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 갑옷의 주문을 뚫을 수 없었겠지···”

피를 푸컥 토한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벼락이 온몸을 관통하며 그녀의 육신을 태워대고 있었다. 삐죽 튀어나온 내장마저 한 줌 재가 되어버릴 위력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각혈을 하면서도 웃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유쾌하게.

아스타로트가 양팔을 뻗어 벨로크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순간,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여리한 손목 안에 숨겨진 악마의 강력한 힘이 그의 숨통을 조인 것이다. 무슨 거인의 손아귀 같았다.

“자. 나와 함께 미몽 속으로 가자. 네가 가장 즐거워했던 지나가 버린 과거의 편린 속으로 말이야.”

큰소리로 외친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영문도 모를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거로 봐서 무슨 주문으로 보였다. 이에 맞서, 벨로크의 문장 갑옷이 빛을 뿜어내며 저항했다. 하지만, 대악마의 피와 찢겨나간 영혼을 매개체로 삼은 주문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시뻘건 마법진이 두 사람 위에 떠올랐고, 뭉글거리는 암흑이 그들을 감쌌다.

귀가 먹먹해지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코, 입, 몸의 감각 또한 수면 아래로 가라앉듯 무엇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채색 눈동자가 이제는 완전히 그 빛을 잃었다. 벨로크는 그렇게 어둠 속을 표류했다.

그런, 그의 옆에 웬 여인 하나가 있었다. 그녀. 타락의 온상이자, 미혹의 여왕. 남의 마음을 부러트려서 굴복시키는 걸 즐기는 지하의 괴물이 혀를 핥았다. 타격을 입을 것을 각오하고 주문을 쓴 보람이 있었다. 봐라. 이렇게 훌륭한 검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악마가 말했다.

“벨로크. 훌륭한 기사야. 이제 너를 어떻게 다독여야 할까? 네 고향이 짓밟히고 불타오르는 악몽을 보여주어 마음을 꺾어야 할까? 아니면, 네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불러들여서 너의 의지를 녹여줄까?”

뿔 달린 악마는 기분 좋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시커먼 어둠의 파도 너머, 깨진 유리창처럼 어긋나있는 공간 하나가 보였다. 이 사내의 심상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그의 마음속 세계를 마음껏 주무르며 영혼을 굴복시키기만 하면 끝이었다. 주인과 불청객, 둘은 곧 이리저리 흔들리고 깨져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불청객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대체··· 뭐야?!”

사방이 회색빛으로 이루어진 칙칙한 도시가 이방인을 맞이했다.

#

엿 같은 하루였다.

‘자소서도 써야 되고, 자격증도 따야 하는데.’

사람은 왜 일을 안 하고는 살 수 없는 걸까? 아무것도 안 하고 평생 놀고먹을 수는 없는 걸까? 생산성 없는 질문을 던진 나는 곧장 현관문을 열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코딱지만 한 집이 나를 반겼다. 비록 사람이 없어 따뜻한 온기는 느껴지지 않지만,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나는 방문을 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쑤신 곳이 없다. 일하랴 취업 준비하랴 몸이 열 개라도 바쁠 지경이다. 당장에라도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건 포기할 수 없지.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나는 슬며시 웃으며 컴퓨터부터 켰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두들겨서 배달음식 또한 시켰다.

“내가 어디까지 했었지? 분명, 난이도가 쉽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나는 커서를 움직여 검과 방패가 교차하고 있는 클래식한 문양을 더블 클릭했다. 요란한 배경음과 함께 오프닝 화면이 스르륵 지나갔다.

그 속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흑색 갑주를 입고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나는 기다릴 것도 없이 캐릭터를 선택했다.

[기사 벨로크. 아드리아의 재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디, 이 대륙을 구원해주시기를.]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어째선지 귀에 팍팍 꽂히는 이름인데? 홀린 듯이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배달 온 치킨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한 기름 향과 함께 뜨거운 육즙이 미친 듯이 흘러나온다. 그 안에 자리한 보드라운 속살 또한 짭짤한 염지가 아주 잘 되어있었다. 그래, 시발. 이거지. 누린내 나는 육포나 물 탄 맥주, 이것저것 다 때려 넣은 잡탕 스튜 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이 맛! 이게 사는 거지!

“스튜? 뭔가 이상한데?”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봤다. 노란 이불이 깔린 침대와 벽면에 깔린 회색 벽지, 바닥에 놓여있는 핸드폰 충전기까지 퍽 익숙한 광경들뿐이었다.

기분 탓인가? 나는 닭다리를 마저 뜯으며 다시금 모니터를 살폈다. 던전을 깨고 저장을 했었는지. 마침, 전투가 끝나있었다.

[기사 벨로크가 악에 물든 마귀왕을 물리쳤습니다.]

[경험치가 52000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얼른 ESC를 눌러 화면을 정지시키고는 캐릭터 상태창을 띄웠다.

이름 : 벨로크 하이네

직업 : 기사

레벨 : 21

스탯 : 남은 포인트 1

힘 17 체력 : 5

마력 1 신성력 : 1

스킬 : 남은 포인트 1

‘기사의 검술 Max’ ‘꺼지지 않는 투지 Max’ ‘육감 Lv 3’ ‘벼락 검 Lv 1’

“체력 조금에 힘 몰빵이라니. 무식하게도 키웠군. 그것보다 내가 아는 스텟들과는 조금 다른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금 캐릭터를 조작했다. 엉망진창이 된 홀 너머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여인들이 보였다.

판금 갑옷을 입은 검은 머리 여인에, 구멍 뚫린 로브 입은 마법사, 몸에 착 달라붙은 가죽 갑옷을 입은 요정까지. 다양한 면모였다. 커마 한 번 잘했네. 이 친구들은 또 누구야? 그들에게 다가가자, 시스템 창이 주르륵 떴다.

[아델의 침식도가 50%를 넘었습니다.]

[카라의 침식도가 63%를 넘었습니다.]

[이자벨의 침식도가 70%를 넘었습니다.]

[위험! 위험! 사악한 마력이 동료들의 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침식도가 100%가 된다면 그녀들은 이지를 상실한 채, 악마의 하수인이 될 것입니다. 어서 원흉을 제거하고 이를 바로 잡으십시오.]

“동료? 원흉이라고?”

내가 플레이를 했건만, 왜 제대로 된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마치, 무언가가 어긋난 것 같은··· 생각이 깊어지려는 순간. 바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괴··· 괴물!

-겨, 경찰. 경찰 불러요!

-시발 저건 대체 뭐야?!

아니, 비명만이 아니었다. 바닥 역시 쿠우웅 거리며 잔뜩 울려대고 있었다. 선반에 올려두었던 집기들이 후드득 떨어졌고, 싱크대에 있던 접시 역시 요란스레 깨졌다. 어마어마한 지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컴퓨터의 모니터만은 선명한 게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지금 이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나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시커먼 매연과 아스팔트 깔린 도로. 온통 회색빛으로만 보이는 도시 사이에 괴상한 생물체 하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네온사인 빛을 받아 반사되고 있는 검붉은 비늘과 거대한 피막 날개. 사람 몇은 가볍게 삼킬 정도로 큰 주둥아리와 이빨, 흉포하게 떠진 파충류의 눈까지. 시발. 저게 뭐야?

“게임?! 게임이라고?! 내가 모니터 속의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엿 같은 소리하지 마라! 벨로크! 이 미치광이야! 당장 모습을 드러내!”

용이 발악하듯이 소리 지르며 불을 뿜어댔다. 순간, 나는 영문모를 기시감을 느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거대한 대검, 괴물, 피와 살점, 악마, 엿 같은 중세시대 귀족과 시민, 도적들, 마지막으로 동료들까지··· 수 천 가지의 그림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몸의 떨림이 더욱 커진다. 이 기억들은 대체···

그 순간. 허공을 부유하던 용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거기 숨어 있었나!? 벨로크. 아니, 너. 정체불명의 존재야. 너에게 물어볼 것이 많다. 바른대로 답하지 않으면 태워버리겠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녀석의 눈과 내 시선이 마주한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심연에 가라앉아있던 기사의 기억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하던 기억들이 퍼즐처럼 제자리를 찾아갔다. 몸의 떨림 역시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욕했다. 시발. 그냥 모른 채로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하다못해 치킨이라도 다 먹었을 때 찾아오던가.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넌 뒤졌다.”

지금 이 자리에, 연약했던 청년의 육체는 온데간데없었다. 악귀와 악마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우는 전사. 괴물 같은 육신과 오감을 가진 채, 스스로의 힘으로 죽음을 개척해나가는 자. 제 몸통만한 크기의 대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기사만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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