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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73화 (73/222)

73

결착

성검인지 마검인지 아무튼 마법검이 되어버린 대검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내면 속 세계로 들어갔다. 이윽고 깜짝 놀랐다. 기사의 검술과 꺼지지 않는 투지, 육감을 제외하고 또 하나의 스킬이 반짝이고 있었다. ‘벼락 검’

이건 또 뭐야. 조금 전에 검이 변한 것하고 무슨 연관이 있는 건가? 벨로크는 스킬을 살폈지만, 진짜 게임처럼 설명이 주르륵 뜨는 일은 없었다. 그저, 스킬 명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젠장. 뭘 알아야 써먹을 거 아닌가.

[잔여 스킬 포인트 5]

벨로크는 남은 포인트를 새로 얻은 스킬에 모조리 투자하려고 했지만, 이 빌어먹을 스킬은 포인트조차 먹히지 않았다. 이거 진짜 뭐지? 그는 당황했지만, 잠시 후 평정심을 되찾았다. 뭐가 됐든 새로운 힘이 생긴 것은 좋은 현상이었다. 앞으로 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이 힘의 사용법도 알 수 있겠지. 잠깐, 여행을 계속한다고? 벨로크는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생각을 뒤로한 채, 남은 포인트를 사용했다.

검술과 투지는 이미 한계까지 다다른 힘이었으니, 육감에 모든 포인트를 투자했다. 그리고 체력 스탯을 찍어 몸을 정상으로 만든 찰나에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무모한 짓거리라고 했잖아! 괜찮아?

-괜찮으십니까?

-저걸 저렇게 쪼개버리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또 이 소리군. 이제는 적응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새롭게 얻은 정체불명의 힘과 변화한 무기, 한층 더 강해진 육신까지 생각할 게 많았던 벨로크는 일행의 염려 섞인 말들을 대충 받아넘겼다. 그러고는 룬 문자가 새겨진 검을 카라에게 내밀었다.

“카라.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응? 갑자기 왜? 아니, 잠깐만···”

카라는 검신에 새겨진 룬 문자를 손으로 한 번 쓸더니 입을 헙 다물었다. 무언가가 생각할 게 있는 듯했다.

“갑작스레 모습이 변한 검이라. 짐작 가는 게 하나 있기는 해. 그러니까···”

그 순간. 바닥이 쿠르르 울렸다. 생명이 다한 거대악어의 사체가 가라앉는 소리였다. 카라가 지팡이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서 말해줄게.”

그녀는 다시금 부유 마법을 펼쳤고, 일행은 천장에 달린 문을 열고 위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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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계단이었다. 천장, 바닥, 옆면이 온통 회색빛깔의 벽돌로 가로막힌 공간을 일행은 걸었다. 마치, 돌로 된 관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이 빌어먹을 성의 끝자락은 어디지? 그때. 지팡이의 빛을 앞세우며 걷고 있던 카라가 말했다.

“깊은 산이나 계곡, 지하에서 튀어나오는 괴물들이 왜 사람들을 습격하고 잡아먹는지 알아?”

“배가 고파서?”

단순한 대답에 카라는 피식 웃었다. 음. 뭔가 좀 띠꺼운데. 벨로크가 생각할 때. 그녀가 다시금 말했다.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 마물들에게 있어 사람 고기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식량이자. 별미니까. 하지만···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어.”

그녀는 입가로 혀를 한 번 핥았다.

“사람은 괴물들과의 전투를 겪을수록 노련해져. 경험이 쌓이니까. 그리고 놈들이 남긴 가죽이나 두개골로 무구를 만들어 입으면 더욱 강해지지. 괴물들 또한 마찬가지야. 놈들 역시 사람을 잡아먹으면 무언가를 얻어. 그 사람의 피와 살, 척수와 내장, 뼈와 골수 등에 담겨있는 여러 가지 힘들을 흡수하게 되거든.”

그러니까 내 검이 괴물들을 잡아먹고 강해졌다고? 진화하는 검이란 건가? 이자벨이 끼어들었다.

“사람을 많이 잡아먹어 강해진 괴물들에 대한 얘기는 들어봤지만, 무기는 또 처음인데요?”

카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검이 잡아먹은 건 평범한 괴물들이 아니잖아? 악마야. 몸속에 지하의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 괴물들.”

“내 검은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죽인 숫자가 중요한 건가?”

아델이 허리춤의 시미터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자,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 주인이 특별한 걸지도··· 어찌 됐든 네 검은 수많은 악귀들의 피를 머금고 더욱 강해졌어. 룬 문자가 생겨난 건 특별한 힘이 깃들었다는 뜻이야. 혹시 무슨 환청이 들린다거나 하지는 않아?”

“무슨 소리?”

벨로크가 묻자, 계단을 올라가던 카라가 호기심 반 걱정 반이 담긴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죽여라. 피를 먹여라. 제물을 바쳐라. 같은 속삭임 있잖아? 주인을 타락시키거나 꾀기 위해 마검이 중얼거리는 말들.”

벨로크는 매고 있던 검을 다시 한번 살폈다. 룬 문자 하나만 새겨진 것을 빼면 별 게 없었다.

“별다른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보다 아까 전, 악어 괴물을 벨 때. 검이 전기를 뿜어냈는데. 대체 무슨 원리일까?”

그의 내면에 생겨난 새로운 힘 ‘벼락 검’은 이 검에 깃든 힘과 같은 것이 틀림없었다. 대악마와의 결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전부 다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의문에 대한 답은 카라로부터 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라면 보통 너의 의지에 반응할 가능성이 높아. 한 번 속으로 외쳐보는 건 어때?”

“뭐라고?”

“뭐가 됐든 좋아. 네가 그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매개체를 상상해보던지. 아니면 검을 쥐면서 강하게 염원해봐.”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하지만, 저 말 말고는 방법이 없다. 벨로크가 뭔가 실험을 해보려는 찰나. 회색빛 돌무덤이 끝났다. 역시나 앞에는 문 하나가 보였다. 이번에는 진짜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또 함정이 있을까요?”

“부유 마법을 외워둬야 하나? 아니면, 보호막을···”

일행이 제각각의 무기를 꼬나쥔 채, 몸을 긴장시키는 찰나. 벨로크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 벨로크! 또 뭐가 나올지 모르잖아!”

“함정은 없는 것 같은데.”

포인트를 투자해. 한층 강해진 육감 덕분일까. 문밖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 외에는 어떠한 위험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기에 벨로크는 발로 문을 쾅 걷어찼다. 스르륵 어둠이 기어 왔다. 이윽고 그 음영 덩어리들은 일행의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어두컴컴한 게 그리 좋으면 지하에나 처박혀있을 것이지. 왜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지랄이야? 벨로크는 속으로 욕하며 앞장섰다. 그의 뒤를 따라 일행이 따라 올라왔다.

카라가 지팡이의 빛을 거세게 뿜어냈고, 일행은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바닥에는 벨벳 융단이 빈틈없이 깔려있었고, 옆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나 액자 같은 것들이 즐비하게 걸려있었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사치스럽게 치장된 복도였다. 벨로크가 보기에 권력자들이 하는 짓은 대부분 똑같았다. 남들과 비교하며 자기가 사는 집을 좀 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래, 여기 숨어있었군.

“왕의 생애를 그려놓은 걸까요?”

복도를 걸어가는 와중 이자벨이 중얼거렸다. 액자에는 인물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수염도 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에서부터 웬 청년이 검을 든 채, 여러 가지 괴물들을 죽이는 모습이 나타났다. 일행이 걸음을 옮길수록 그림도 달라졌다. 청년에서 왕관을 쓴 중년, 흰색 수염을 기른 채,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노년의 모습까지. 왕이 이뤄낸 업적을 일일이 다 그려내 벽에 장식해둔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돈 지랄이군. 분위기가 급변한 것은 그다음이었다.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는 아버지와 울부짖는 가족들, 괴물에게 통째로 잡아먹히고 있는 사람들, 꼬챙이로 사람들을 찔러 죽이는 뿔 달린 악마, 옥좌에 앉아 그것을 지켜보며 히죽 웃고 있는 왕관 쓴 사내까지. 이제 복도에는 괴기스러운 흉물들만이 벽에 걸려 그들을 환영하고 있었다. 미친놈 같으니. 고개를 돌리던 아델이 코를 움찔거리더니 인상을 팍 찡그렸다.

“진짜 피로 그려낸 것 같습니다. 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면 전부 다 이렇게 되는 걸까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인간을 벗어던졌기에, 사고방식 역시 그에 맞게 바뀌어버린 거야. 놈은 웬 벌레를 죽였다고 생각할걸?”

카라의 시니컬한 음성이 울려 퍼진 그때. 광구 너머로 흐릿한 무언가가 앞에 나타났다. 이를 먼저 알아챈 벨로크가 팔을 뻗어 일행을 멈추게 했다.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유령인가?”

프릴이 달린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일행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탁하게 풀린 눈, 결정적으로 시퍼렇게만 보이는 몸뚱이까지. 유령 맞네. 벨로크가 검을 뽑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바닥··· 바닥을 닦아야 해. 안 그러면 하녀장께 혼이 나고 말 거야.]

[손님이 오신다구요? 저보고 접대를요? 하지만 저는··· 네, 알겠습니다.]

[지미. 조금만 기다려. 누나가 돈 많이 벌어서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그녀는 쉴 틈 없이 중얼거리다가, 돌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윽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종래에는 기괴한 각도로 기기긱 꺾어대더니 괴성을 질러댔다.

[아아아아악! 아파! 아프다고! 내가 왜! 왜! 이 꼴을 당해야 하는데? 누가 나 좀 구해줘! 내 내장 좀 주워줘어어!]

빛과 음영의 경계에 선 채, 피눈물을 흘려대는 망령의 모습은 사뭇 끔찍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대검이 떨어졌다. 룬 문자가 번뜩이고 스파크가 파지직 일어났다. 사악한 주술에 사로잡혀 이승에 남아있던 망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쓰는 건가? 벨로크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카라가 혀를 찼다.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놈은 바친 거야. 왕궁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말이야. 그들 모두가 기괴한 의식에 넘어간 채, 괴물이 되었거나. 영혼만 남아 끝없이 고통받고 있어.”

어둠에 잠긴 복도 끝에서 망령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가위를 든 채, 잡초 대신 자신의 머리를 잘라대는 정원사. 울부짖으며 춤을 추는 무희,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며 노래하는 음유시인 등. 벨로크에게는 엿 같음을 나머지 일행에게는 두려움을 심어주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그는 경험치를 얻겠다는 명목하에 그들에게 안식을 내려주었다. 왕의 악행에 넘어가 고통받던 영혼들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아니면, 지옥의 구렁텅이에 처박혔을까. 뭐가 됐던 벨로크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는 미쳐버린 왕에게 죽는 대신, 녀석의 머리통에 검을 박아 넣어줄 생각이니까.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복도가 끝났다. 끝자락에 거대한 철문 하나가 보였다. 이제는 익숙한 소머리 대신, 웬 해골이 양각되어 있는 문이었다. 철문 옆에는 하체에서부터 머리까지 꼬챙이로 꿰뚫린 시체들이 트로피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시발. 정말이지 밥맛 떨어지게 하는데 뭔가가 있는 놈이로군. 이 안에 있었나? 벨로크의 육감이 경종을 울려댔다. 문틈에서 스멀스멀 뿜어지고 있는 기운이 그의 감각을 교란하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저 안에 있는 모양인데.”

아델이 들고 있는 칼을 꾹 쥐며 뭐라 말하려는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짐이 준비했던 환영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꽤나 즐거운 볼거리였다.”

일행의 시선이 돌아갔다. 목소리는 꼬챙이 꿰인 시신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컥컥거리는 바람 소리가 섞인 기괴한 음성이었다. 일행이 뭐라 입을 열기 전에 벨로크가 검을 휘둘렀다. 꼬챙이 꿰인 시신이 퍽 날아갔다. 그러자, 옆에 있는 다른 시신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음기 섞인 음성이었다.

“젊은 기사여. 손속이 거칠구나. 나는 이 땅의 오롯한 지배자이자, 신민들의 충성맹세를 받은 정당한 계승권자다. 좀 더 예의를···”

벨로크의 검이 번뜩였다. 이번에는 문의 주위에 있던 시신들이 일거에 날아갔다. 새끼. 문하나 사이에 두고 더럽게 쫑알대네. 벨로크는 검을 휘릭 털었다. 이윽고 뒤를 돌아봤다.

이자벨은 보우건에 손을 올린 채,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고, 카라는 안광을 시퍼렇게 빛내며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델은 검을 가슴 위로 치켜세운 채,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좋아. 준비가 끝났군. 그는 늘 하던 대로 대검을 어깨에 척 걸치며 문을 걷어찼다.

어둠 속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는 수정구 하나가 보였다. 그 속에는 지금 걸어오고 있는 일행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일행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벨로크는 조금 고개를 들었다. 수정구의 바로 위. 시뻘겋게 빛나는 두 쌍의 시선이 보였다. 몸을 죄어오는 흉흉한 기운은 저 시커먼 그림자들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락의 온상이자, 수 백 년을 살아간 괴물. 더러운 협작질을 일삼으며,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귀들의 우두머리. 그가 말했다.

“아스타로트.”

벨로크의 말에 화답하듯 웃음소리가 울렸다. 한 곳이 아니라, 이 공간에 걸쳐서 넓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윽고 짝. 박수 소리가 들리자, 수많은 불꽃이 일제히 타올랐다.

수십 개의 양촛대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며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불길 속. 황금으로 치장된 왕좌 위. 타락한 왕과 대악마가 그들을 오연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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