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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72화 (7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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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늪

“악어··· 입니까?”

“저런 게 돌아다니고 있던 곳에서 헤엄을 쳤다니··· 잡아먹히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이런, 미친.”

벨로크를 제외한 일행은 각자 한 마디씩을 내뱉으며 몸의 중심을 잡으려 했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녀석은 몸길이만 빌딩만 한 괴물이었으니까.

단지 대가리만 내밀었을 뿐인데. 카라가 얼렸던 호수의 표면들이 수수깡 부러지듯 금이 가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아델이 다급히 허리춤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괴물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던 석상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팽팽한 줄이 이어지고, 그녀가 손을 뻗었다.

“벨로크님!”

“아니, 날 지탱할 수는 없을 거다. 이자벨을 챙겨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카라를 훌쩍 안아 들었다. 이윽고 둥둥 떠다니던 어인의 시체와 남아있던 얼음 파편 등을 밝으며 다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델 역시 이자벨의 허리춤을 끌어안고는 채찍을 당겼다. 일행은 약간의 토사 더미와 붕괴된 석상들이 박혀있는 지면에 발을 디뎠다. 그러는 사이 호수의 괴물 역시 자신의 우람한 상체를 드러냈다.

우둘투둘한 각질 위로 피부 색깔만큼이나 시커먼 물들이 주륵 흘러내렸다. 그와 대비된 새하얀 배 위에는 몸길이에 비해 짧아 보이는 팔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덩치 덕분에 거대한 망치처럼만 보였다. 염병. 한 방이라도 맞았다간 골로 가겠군. 놈은 눈동자를 비죽 굴리며 일행을 쳐다보았다.

“눈 세 개 달린 거대 악어라니. 키메라인가? 저런 놈을 상대로는 대체 무슨 주문을 써야···”

카라가 자신 없다는 어투로 지팡이를 꾸욱 움켜쥘 때. 이자벨이 보우건에 화살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그나마 짐승의 형태는 갖추고 있어서 다행이군요. 리자드는 아랫배가 약점이에요. 등가죽에 비해서 연약하거든요. 눈은 말할 것도 없는 급소구요. 저 크기로 봐서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의 눈을 맞출 수 있겠나?”

벨로크의 말에 이자벨은 고개를 올렸다. 요정의 초록색 눈동자와 거대한 파충류 괴물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녀석의 눈이 악의로 번들거렸다. 세로로 길게 찢어져 싸늘하게 보이기도 하는 눈이었다.

크르르르

놈이 낮게 울부짖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 전체가 우르르 울렸다. 이자벨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할 것 없죠.”

크기 덕분일까. 동공을 덮고 있는 투명한 막까지 보일 정도였다. 저걸 못 맞춘다면 그녀는 활대를 부숴버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자벨은 허리춤을 매만지더니 자신 없다는 어투로 답했다.

“화살이 얼마 안 남았어요. 지금 장전해둔 게 끝이거든요. 이걸로는 많이 부족할 것 같은데.”

놈의 덩치로 볼 때 화살을 아무리 꽂아 넣어봐야 이쑤시개에 찔린 정도도 안 될 것이다. 그녀의 걱정을 뒤로한 채, 아델이 말했다.

“옵니다.”

거대악어가 움직였다. 놈의 공격은 단순했다. 주둥이를 쩍 벌린 채,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었다. 카라가 띄워놓은 광구 아래, 사람 몸통만 한 톱니 이빨들이 흉흉하게 빛났다. 일행의 얼굴에도 거대한 음영이 졌다. 무슨 산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크-아아아!

괴성과 함께 시꺼먼 물들이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이자벨이 기세 좋게 쏘아낸 화살도 그것에 파묻혀버렸다. 젠장. 이걸 어떻게 죽이지? 일단 휘둘러볼까? 벨로크가 미친 생각을 하고있는 와중 아델이 성력을 뿜어내며 외쳤다.

“헬레나여!”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도망쳐야 해!”

카라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로브 자락에서 꺼낸 스크롤을 부욱 찢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푸른색의 원이 일어나며 거대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주변의 광경이 쏜살같이 지나가며, 발아래에서는 부유감이 느껴졌다. 저 아래에 거대악어의 입속에 처박히고 있는 토사 더미들이 보였다. 일행이 조금 전까지 있던 장소였다.

흙먼지가 와르르 일어나고 폭발하듯 터진 수면이 소용돌이를 치듯 괴물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악어는 입가를 오물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기대했던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혓바닥이 예리한 녀석인데.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벨로크의 옆에서 카라가 로브를 치렁거리며 말했다.

“아껴두고 싶었지만··· 방금의 주문서를 끝으로 대마법사의 유산은 다 사용했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텔레포트 스크롤 한 장뿐이야. 젠장. 차라리 그걸 찢어버릴 걸 그랬나.”

이자벨이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

“덕분에 살았네요. 부유 마법인가요?”

“그보다 좀 더 고급의··· 인도의 날개라는 주문인데··· 아무튼, 우리가 저 괴물을 피해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해. 문이 어디 있었지? 아델. 혹시 위치가 기억나?”

“아마 저곳 일거다.”

아델이 손가락으로 종유석들이 가득 쌓여있는 천장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 들어올 때 봤었던 소머리 괴물이 양각된 문이 천장에도 달려있었다. 카라가 지팡이를 휘저으며 말했다.

“좋아. 바로 빠져나가자.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주문서를 쓸 걸 그랬어. 혹시나 하는 상황이 발생할까 봐 아껴두었던 건데.”

네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막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종유석들 사이를 헤쳐나갔다. 아래에 있는 거대악어는 꾸르르 울며 바닥을 내려찍거나,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시선을 내려 괴물을 살피고 있던 이자벨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까지 놈은 모르는 것 같아요. 이대로 가기만 한다면 수월하게 빠져나갈 수 있겠는데요?”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말이지. 하지만··· 벨로크가 말했다.

“카라. 멈춰라.”

“왜 그래? 한시가 급한 상황이야. 놈이 언제 우리를 눈치챌지 모른다고.”

카라는 투덜거렸지만, 움직이던 지팡이를 뚝 멈췄다. 그러자, 푸른막또한 제 자리에 멈춰버렸다. 아델이 물었다.

“벨로크님. 어째서 멈추신 겁니까?”

벨로크는 면갑을 철컥 올렸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검을 아래로 향한 채, 말했다.

“저놈. 우리가 이 위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무슨···”

“저곳을 봐라. 천장이 유독 낮다.”

벨로크는 문이 있는 방향을 고갯짓했다. 현재, 일행이 떠다니고 있는 천장은 거대악어가 고개를 내밀어도 닿지 못할 만큼 드높았다. 하지만, 위층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곳만 유독 천장이 낮았다. 삐죽 솟아오른 종유석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벨로크의 눈에는 다 보였다.

“저 정도라면 놈의 이빨이 닿기에는 충분하다. 아마도 우리가 문에 도착하는 순간. 훌쩍 뛰어넘어서 잡아먹을 생각인 것 같은데.”

그는 수면위에 머리만 내민 채, 멍한 시선을 던져대고 있는 괴물을 바라봤다. 몸을 웅크린 채, 물거품만 뿜어내는 것이 무기력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을 감춰두고 있었다. 약은 새끼. 생긴 건 괴물인데. 맹수다 이거냐?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굳이 주위 환경만으로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말로는 특정할 수 없는 여섯 번째 감각이 저 괴물의 꿍꿍이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인내심, 기대감, 사냥에 대한 희열. 등 삼눈이 악어의 여러 가지 감정들이 벨로크에게 절절히 전해져왔다.

“확실히 벨로크의 말대로네요. 저곳만 이상해요. 함정같아요.”

이자벨이 눈가를 찌푸리며 앞을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일단 후퇴를···”

카라가 다시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였다. 벨로크가 만류했다.

“아니, 이대로 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문을 통과하려면 놈을 잡아야 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빈틈을 노리는 게 나아.”

아델이 의견을 냈다.

“놈을 유인시킨 다음에 빠져나가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약삭빠른 녀석이다. 웬만한 방법으로는 속이기 힘들 거야. 그럴 바에야 죽이는 게 더 낫다.”

“어떻게 죽일 건데?”

카라가 묻자, 벨로크가 말했다.

“문 가까이 가면 부유 마법을 풀어라. 그리고 아델의 채찍을 이용해서 너희 셋 모두 종유석에 매달려있도록.”

“그다음은?”

벨로크는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고는 쥐고 있는 검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줘야지.”

그게 작전이라고? 카라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미친 소리 하지 마! 네 검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녀석 역시 성만 한 크기야. 아니, 애초에 이 높이에서 떨어지겠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무모해!”

그녀가 벨로크의 팔뚝을 강하게 쥐며 한 번 더 만류했다.

“그래, 칼침 한 번 놨다고 쳐. 녀석의 팔 하나를 날렸다 치자. 그 후에 잡아먹히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괴물의 배라도 가르고 나올꺼야?”

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인데. 벨로크는 걱정을 가득 담고 있는 갈색 눈동자를 잠깐 바라봤다가 고개를 내렸다. 우둘투둘한 표면 아래 산봉우리처럼 튀어나온 악어의 머리통이 보였다. 다시봐도 거대 괴수만한 크기다. 현실감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손에 들린 검을 꾸욱 쥐면서 말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서 휘두르면 내 칼에 얼마만큼의 가속도가 붙을까? 그로 인해서 더해질 힘과 파괴력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저 괴물의 두개골을 뚫기에는 충분할 거 같은데.”

카라는 벨로크를 잠시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너는··· 정말... 마음대로 해!”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다시금 주문을 외웠고, 아델은 두 사람을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벨로크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라의 말대로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신다면···”

“나를 믿어라. 아델. 두 사람을 잘 부탁한다.”

그는 여느 때처럼 답하며 쥐고 있는 검의 폼멜과 십자막이를 슥슥 매만졌다. 악마를 벨 때마다 강해지던 검은 빛은 이제 터져나갈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슨 마검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디 신전에라도 한 번 들러서 정화를 받아야 하나?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이동이 멈췄다. 카라가 말했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였다.

“벨로크. 다시 한번 생각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벨로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양손으로 그러쥐며 바닥을 쿵 찍었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와 함께 욕설이 들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탁 튕겼다. 한순간에 발아래에서 부유감이 느껴졌다.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파공성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입고 있는 문장 갑옷 또한 요란스레 철컹거렸다.

벨로크는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검을 꾸욱 쥐었다. 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세모꼴로 찢어진 눈동자가 비죽 솟아올랐다. 녀석이 입을 쩍 벌렸다.

크아아아-아!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무저갱처럼 보이는 깊은 통로에는 오직 자신을 죽이려는 악의만이 가득했다. 그곳에 달린 송곳 하나하나가 그의 육신 따위는 가볍게 잘라먹을 비수들이었다. 벨로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이 포식자에게 저항하기 위해 손에 들린 날붙이를 하늘 높이 치켜올렸다. 그래, 덤벼라.

뒤편에서 날아온 화살이 괴물의 눈에 꽂히든, 카라가 불러낸 바람이 자신의 등을 떠밀든 벨로크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하나의 검은 선이 되어서 쇄도했다. 이윽고 그 검은 선은 괴물의 머리를 퍽 꿰뚫었다.

대검을 잡은 손아귀에 엄청난 저항이 느껴졌다. 괴물의 가죽을 가르고 뼈와 근육을 부수면서 생겨나는 어긋남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괴물의 머리통을 가르면서 계속 달렸다. 이윽고 검을 쑤욱 뽑아내고는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치켜 올렸다.

끄에에엑!

――――!

터져나온 괴물의 비명과 후두둑 떨어지는 핏물을 벗삼아, 벨로크 역시 거세게 소리질렀다. 그 순간. 칼날의 주위를 맴돌던 거뭇한 기운들이 뻥 폭발했다. 치지직 거리며 무수한 스파크 역시 만들어 냈다.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못 했다. 혈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전투의 열기와 심장 고동 소리가 기사의 정신을 어딘가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늘 하던 대로 행동했다. 심호흡과 함께 손에 들린 검을 거세게 내려찍은 것이다.

굉음과 함께 빛살이 번쩍였다. 괴물의 머리가 쩍 조각났다. 눈 셋 달린 거대악어, 썩은 늪의 포식자가 그렇게 죽었다. 벨로크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악귀의 피와 늪지의 검은 물을 흠뻑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손에 들린 검은 더욱더 빛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공동 전체를 아우를 정도였다. 시발. 이거 왜 이래? 정신을 차린 벨로크가 당황할 때. 빛더미가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작은 룬 문자가 되어 검신에 나타났다.

벨로크는 레벨업을 했다는 사실도 잊어먹은 채, 검을 살폈다. 룬 문자가 새겨진 날붙이는 은은하게 빛나며 치지직 스파크를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담은 모양새였다.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윽고 괴물의 사체에 턱하니 걸쳐 앉으며 중얼거렸다.

“생긴 것만 보면 마검인데. 벼락이라니... 대체 뭘 만들어 준 거야. 그 영감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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