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악마성
그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 자였다. 고귀한 신분을 타고 태어났지만, 아랫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군림하되 지배하려 들지는 않았다. 사자의 심장과도 같은 용맹과 꺾이지 않는 굳센 신념, 성인의 손길과도 같은 자비심까지. 누군가는 그를 에드워드라 불렀고, 누군가는 폐하라 불렀다. 그를 경외하던 추종자들이나 신하들은 존경심을 담아 사자 왕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음.”
그. 아드리아 왕국의 지배자. 에드워드는 왕좌에 턱 하니 앉은 채, 턱을 팔에 괴었다. 앞에 놓여 있는 투명한 수정구는 시종일관 빛나고 있었다. 무슨 소리도 들렸다. 비명과 괴성, 악다구니 등이었다. 전장이었다. 유리구슬 속 세상에서는 괴물과 인간들의 전쟁이 한참 이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끔찍하다. 기겁 할 테고, 다른 누군가는 과자를 씹으며 즐겁게 관람할 것이다. 뭐가 됐든 눈길을 끄는 장면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관심 없었다. 시꺼먼 두 눈은 수정구슬을 향해 있었지만, 그는 지금 먼 과거를 회상하는 중이었다.
젊었을 적 유랑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다. 왕국이 안정화되기 전이라 온갖 괴물들이 득시글거릴 때였다. 그는 거기에서 빛났었다. 자신의 무용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니까. 에른 산의 괴물 사자나 로인 숲의 맨티코어, 쿠른 광산의 오우거까지 한 지역을 풍미하던 괴물들 전부가 그의 칼날에 목이 날아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의 자비심에 그저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아아. 나의 왕이시여.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돕는 것이 내 일이다. 괘념치 말라. 내가 그렇게 말했던가?”
고요한 공동에서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윽고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왕은 또다시 기억들을 되짚었다.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꽃을 던지며 환호하던 사람들, 첨탑 위에 올라가서 손을 흔들던 사내, 고사리 같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던 아이.
아아··· 그래. 소중한 나의 백성들이었지. 화려했던 수도의 광경이 뒤바뀐다. 이번에는 성이었다. 개선식이 열리고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나팔을 불어댔다. 번쩍거리는 창끝을 일자로 세운 채, 붉은 융단이 깔린 판석을 두 발로 힘차게 걸었었다. 그러고는 왕좌에 앉았고, 그는 다시금 왕이 되었었다.
“흐흐흐···”
에드워드의 웃음소리가 바뀌기 시작했다. 탁한 가래라도 낀 듯 무언가를 긁어대는 소리로 변질되고 있었다.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성벽은 드높았으며 자신을 지키는 병사들은 용맹하고 강했다.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외로움을 달래고, 몸을 섞을 수 있는 벗 역시 있었다. 그는 만족했다. 행복했었다. 당장, 길 밖에서는 빵 한 조각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왕이니까. 이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였으니까.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루한 책을 훌훌 넘기듯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그는 점점 약해져 갔다. 괴물들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던 심장은 풍선처럼 쪼그라들었으며, 육체는 쇠락해갔다. 그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나라를 통치하는 성군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죽어서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영혼이 저 드높은 천상궁전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곳에 가면? 난 뭘 하게 될 것인가? 내 권력은? 왕관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죽음을 겪고 온전히 돌아온 자들은 이 세상에 없었으니까.
소멸에 대한 공포 앞에서 늙은 사자는 점점 미쳐갔다. 머릿속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단두대가 떨어지고 죄 없는 백성들의 머리가 댕겅 잘려 나갔다. 감언이설 대신 충언을 내뱉는 신하들의 목 역시 툭 날아가버렸다. 피투성이가 된 대전 안에서 왕은 폭정을 일삼았다.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댔다. 마침내, 자신을 따르는 마지막 병사들마저 그녀에게 바쳤을 때.
“하하하하하!”
그는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나 봐. 에드워드. 너를 죽이러 오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니?”
광소를 뒤로한 채, 들려오는 목소리에 왕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왕좌의 옆에 비스듬히 기댄 채, 새빨간 입술을 열고 있었다. 머리에 솟아난 뿔과 등에 달린 거미 다리를 제외한다면 그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만 생각했을 괴물. 제 아내의 몸을 빌어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낸 대악마. 그가 말했다.
“아스타로트. 짐을 걱정해주는 것인가?”
“물론이지. 나는 우리의 관계가 보다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거든.”
그녀는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는 수정구에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나는 더욱더 많은 살점과 영혼, 피를 원하고. 너 역시 한층 더 강력한 지하의 마력을 갈망하지. 하지만, 주문을 막아내는 기사라니··· 우리들의 계획이 저 년놈들에 의해 무너질지도 몰라.”
마귀왕은 뼈만 남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이는군. 왕국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나 기사, 성직자들마저 농락하며 악의 구렁텅이에 빠트린 괴물. 수천 살 먹은 요괴가 인간 셋과 요정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
그의 생각대로였다. 수정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긴장감이라고는 없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듯한 시선이었다. 자기 백성들을 제 손으로 바친, 이제는 악의 선봉장이 된 광인은 그 장단에 조금 맞춰주기로 했다.
“짐에게는 아직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많이 남아있다. 설령 저들이 여기까지 당도한다고 해도···”
그는 바닥에 꽂아둔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수정구 속의 기사가 메고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참마도였다. 그가 옛날에 괴물들의 목을 자를 때 사용했던··· 이제는 악마의 마력을 받아 한층 더 강력해진 마검.
왕의 텅 빈 동공이 호선을 그렸다. 손이 근질거리고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뜨거운 피가 몸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었다. 마귀왕은 왕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그러고는 수정구를 주시하며 뼈만 남은 턱을 덜그럭거렸다.
“짐의 손에 목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
눈을 사로잡는 뭉근한 어둠 너머로 주황색의 불빛들이 보였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그 몸짓이 어떠한 이정표처럼 보였다. 일행은 길 잃은 아이처럼 그 불길을 따라 계속 뛰었다. 뒤편에서 괴성과 함께 철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원정대는 무사할까요?”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 저들이 그저 버텨주기를 바랄 수밖에···”
이자벨의 말을 카라가 받았다. 그녀 역시 자신이 내린 결정이 마음에 걸리는지. 찝찝하다는 얼굴이었다. 같이 힘을 합쳐 왕의 병사들을 모두 무찌르고 성을 오른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불확실했다.
병사가 얼마나 더 남았는지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벨로크가 지치면? 혹은 죽는다면? 그때는 누가 대악마를 상대할 것인가. 그녀가 생각하기로 원정대원들 중에서 그 괴물을 죽일 사람은 눈앞의 사내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확률의 선택지를 고르는 것. 그게 내 역할이야.’
이 파티의 마법사이자 조언자인 카라의 생각은 그랬다.
“시간 싸움이로군. 놈들을 빨리 처치하지 못한다면 양쪽으로 포위당하겠어.”
벨로크가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쉽지 않아 보였다. 일행은 계속 뛰었다. 중무장을 한 채, 짐가방과 무구를 메고 돌로 된 통로를 건너고 그곳과 연결된 널따란 공동을 지났다. 땀이 비 오듯 흐르며 옷을 적셨고, 더운 숨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아까 전 전투의 여파 때문에 벨로크를 제외한 세 사람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종래에는 계단을 타고 위로 향했는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벨로크의 직감이 소리칠 때. 아델이 말했다.
“너무 긴 것 같습니다··· 이쯤이면 분명 꼭대기 층에 도달해야 할 텐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아무리 성이 크다고 해도 일행의 뜀박질을 가늠한다면 지금쯤 목표로 했던 곳에 도착했어야 했다. 카라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입가를 매만지더니 말했다.
“우리가 들어왔던 바깥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공간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카라가 디뎠던 바닥이 불쑥 무너져내렸다. 몸에서 느껴지는 부유감에 카라는 눈을 크게 떴다.
“어?”
그녀의 여린 손목을 벨로크가 확 잡아챘다. 팔이 빠질 것만 같은 느낌에 카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들려오는 괴성에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끄에에에엑!]
시커먼 구덩이 속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수십 개의 팔들이 그녀를 향해서 손가락을 뻗어내고 있었다. 안식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망자의 손아귀였다. 미친. 카라가 욕설을 내뱉을 때. 벨로크가 그녀를 힘껏 잡아당겼다. 한순간에 시야가 반전되었다.
“허억, 허억.”
그녀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벨로크의 품에 안겨있었다. 별다른 전조도 없이 발동되는 함정이라니. 그녀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주륵 흐를 때. 아델이 다가왔다. 아델은 벨로크와 카라를 한 번, 파헤쳐진 구덩이를 한 번 보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나?”
이자벨 역시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가 살펴봤을 때는 별다른 게 없어 보였는데··· 이게 무슨···”
카라는 로브 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쇠의 감촉과 무심한 듯 보이지만, 걱정을 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벨로크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면서 말했다.
“고마워···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무사하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거지? 알아차리는 게 한발 늦었어···”
벨로크가 얼굴을 슬쩍 구기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성안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부터 오감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괴물이나 방금처럼 함정이 나타날 때를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땅이 꺼지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발걸음이 닿는 공간이 비어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카라의 머리통이 쑥 사라지자 반사적으로 팔을 뻗은 것뿐이었다. 요정과 전사의 감각을 속이는 함정이라. 좋지 않은데. 그가 골머리를 썩일 때. 카라에게서 답이 나왔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된 것인지 그녀는 머리칼을 슬쩍 매만지며 말했다.
“대악마의 거처답게 이 성 자체에도 온갖 주문이나 비의들이 가득 담겨있는 것 같아. 보이는 대로 믿을 게 못 돼. 성 자체가 이미 뒤틀려있어. 아까 전처럼 바닥이 훅 꺼지거나 느닷없이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을 거야.”
일행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천의 괴물들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던 그들이었지만, 악귀들과의 드잡이질과는 또 다른 위험이 일행에게 닥쳐들고 있었다. 음습한 그 손길이 등 뒤의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델이 묻자 카라는 인상을 구겼다. 이윽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미안하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어. 공간 자체가 일그러졌거든. 내가 이걸 바로잡는 것은 불가능해. 그냥···”
“몸으로 때워야 하나?”
벨로크가 말하자,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행운의 여신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길 바래야 할 거야. 아니면 이 성의 주인이 제 손으로 함정을 걷어내게 하던지.”
마법사로서 한다는 말이 운에 기대야 한다니. 카라가 자괴감을 느낄 때. 벨로크는 속으로 욕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더니, 대악마쯤 되니까 그 수준도 남달랐다. 시발. 녀석들을 만나면 대가리를 깨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대비할 수 있게 일행은 벨로크를 중심으로 다시금 걸었다.
카라의 말마따나 각양각색의 함정이 그들을 기다렸다. 느닷없이 바닥에서 창이 솟아올랐다. 벨로크가 몇 개를 쳐냈지만, 이자벨이 어깨에 자상을 입었다. 계단을 타고 넘어가 웬 방 안에 들어갔을 때는 가시가 박혀있는 천장이 통째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벨로크의 대검을 지지대 삼아서 버티고는 다급히 빠져나갔다.
쿠르릉
희생자를 찾지 못한 함정이 애꿎은 바닥을 강타하고, 일행은 숨을 돌렸다.
“지독하네요...”
쪼그려 앉아있던 이자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가방에서 꺼낸 포션을 퉁 따고는 어깨에 부으며 신음을 흘렸다. 선홍빛을 띠는 액체가 하얀살결에 닿자 연기가 치지직 올라왔다. 뜯겨나간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오. 벨로크는 조금 감탄했다. 트롤의 피를 정제해 만든거라더니 과연 효과가 좋았다. 그야말로 신비의 물약이었다. 저거 몇 병만 있어도 웬만한 의사 안 부럽겠는데.
"동감이야. 벨로크가 없었으면 여기서 한 둘 쯤은 죽어나갔을거야."
"덕분에 살았습니다. 벨로크님."
카라와 아델 역시 상처 부위에 포션을 바르거나 마시며 떨어진 체력을 회복했다.
뭘. 내가 없었으면 너희들도 이 고생을 안했을지도 모르는데. 시발. 이놈의 불지옥 난이도 같으니. 벨로크는 속마음을 숨긴 채, 쓰게 웃었다. 정비를 끝낸 일행은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얼만큼이나 걸었을까. 벨로크의 시선에 거대한 철문 하나가 보였다. 강철 특유의 매끈한 광택 너머에 소머리 괴물이 양각되어 있었다. 녀석의 코에 동그란 고리 두 개가 붙어있었다. 이 뒤에 숨어있나? 이자벨이 문에 얼굴을 대고는 귀를 쫑긋거렸다.
"잘 모르겠어요.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나도 잘 모르겠군."
초인적인 감각을 지닌 전사마저 고개를 젓자, 카라는 혀를 찼다.
“어찌됐든, 뭐가 날아오거나 튀어나올지 몰라. 주문을 외워둘게.”
카라가 나직히 주문을 읊어댔고, 아델 역시 기도문을 외우며 성력을 끌어올렸다. 갑옷이 있으니 주문은 확실히 막아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건 역시 투사체인가? 이자벨과 벨로크 역시 칼을 뽑아 들었다. 벨로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가 말했다.
“열겠다.”
그는 정중하게 문을 밀어내는 대신 강철 부츠를 거칠게 휘둘렀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을 때. 일행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눈앞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아니, 뭔가 이상한데? 벨로크가 그렇게 생각할 때쯤. 콰아아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시꺼멓기만 하던 검은색이 휘몰아쳤다. 차오르는 기포와 조여드는 숨통, 목덜미에 와닿는 차가움까지.
일행은 그만 물줄기의 홍수에 휩쓸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