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68화 (68/222)

68

악마성

왕의 정병들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성문이 쾅 닫혔다. 사냥감을 노리던 짐승이 음험하게 웃으며 아가리를 닫은 모양새였다. 밖에서 새어 들어오던 공기, 미약한 달빛마저 사라지고, 흔들리는 주황 색깔의 불빛과 시뻘건 안광들만이 가득했다. 매끈한 광택을 자랑하는 강철 갑주들이 그 빛을 받아 붉은 윤곽선을 그렸다.

“환영식이 성대하군. 엿 된 거 같은데.”

벨로크는 검을 뽑아 들고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정면에 보이는 거대한 계단, 여러 개의 뻥 뚫려있는 복도, 발코니 등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판금 갑옷 입은 기사, 경무장한 병사, 로브 쓴 마법사나 셔츠 입은 하인, 그냥 천을 둘러쓴 괴인까지 복장도 다양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안광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을 뿜어낸다는 것이었다. 제일 처음 등장했던 기사가 고개를 팍 젖혔다. 이윽고 소리를 질렀다.

끄-에에엑

기괴한 괴성은 철 투구 속에서 웅얼거리며 한층 더 끔찍해졌다. 그 안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만이 진득하게 흐르고 있었다. 기사의 안광이 더욱 흉포해졌다. 이윽고 갇혀있던 무언가가 해방되듯 그의 몸체가 뚜둑 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그가 말했다.

[그분의··· 칵!]

벨로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저 훌쩍 점프하고는 검을 내려찍었다. 흐릿한 궤적과 함께 융단 깔린 바닥이 쿵 박살났다. 3미터 넘어가는 괴물이 되어가던 기사는 반으로 쩍 갈라졌다. 검은 피가 주르륵 흐르고 대악마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이 텅 굴렀다. 벨로크는 손에서 느껴지던 반발감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나 인간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이런 괴물이 수천이라. 좋지 않은데.”

그의 뒤를 따라 동료들이 재빨리 다가왔다. 지팡이를 든 채, 주위를 경계하던 카라가 말했다.

“시작됐어.”

예의 괴성이 들렸다. 이번에는 홀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일행은 서로 간에 등을 맞댄 채, 무기를 들어 올렸다. 변신을 마친 마귀왕의 정병들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하나같이 검게 물든 갑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위로는 가시들이 삐죽 솟아있었다. 덩치 또한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놈들의 전술은 간단했다. 창과 방패, 검을 든 병사들은 통로나 계단을 넘어서 돌격해왔다. 석궁병이나 마법사들은 발코니 위에서 원정대를 내려다보며 화살을 쏴 재끼거나 주문을 쏘아댔다. 게오르그 공작이 외쳤다.

“방패 병들은 앞으로! 전열을 사수해라! 기사단은 궁병과 마법사들을 먼저 처리한다!”

살아남은 여명 기사단이 유물의 힘을 끌어올렸고, 방패를 꼬나 쥔 병사들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의 뒤편에는 기다란 장창을 든 병사들이 자리했다. 대열의 중간중간 교단 측의 성기사나 자유 기사들이 자리한 채, 지시를 내리거나 틈을 메웠다.

원정대는 닫혀버린 성문을 벽 삼아서 후방을 확보했다. 이를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며 장벽을 만들었다. 고슴도치가 천적을 상대로 가시를 뿜어내듯, 사방에서 덤벼드는 적을 막아내기 위한 방진이었다.

“회개하라! 배교자들아!”

“어둠의 피조물들아! 여신의 이름으로 네놈들을 심판하겠다!”

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축복을 내렸다. 주위에 있는 병사들의 몸에 성수를 끼얹기도 했다. 머리까지 차올랐던 공포가 조금씩 가라앉는다. 미칠 듯이 뛰어대던 심장 역시 한층 편안하게 약동했다. 교단 측의 기도문,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 용병들의 욕설, 어머니를 부르짖는 신참병사의 넋두리와 함께 두 집단이 충돌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타락 병사. 놈의 흉흉한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연기라도 뿜어내듯 헉헉대는 거친 숨결과 탁한 루비 같은 동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윽고 인간을 상회하는 초월적인 힘이 방패를 강타했다. 방패는 툭 부서졌다. 병사 역시 한순간에 팔이 꺾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크아아악!”

“뒤져!”

대신에 뒤편에 있던 병사들이 재빨리 나섰다. 기다란 장창이 놈의 갑옷 틈새를 꿰뚫었고, 피가래를 뿜는 녀석의 목 위로 검이 떨어졌다. 틈이 생기면 메운다. 그리고 또 싸운다. 악전고투를 거친 원정대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의 머리 위로 쇠뇌의 화살들이 날아다녔다. 운 없는 자들은 투구 사이로 안구가 꿰뚫려 즉사했다.

“끄륵.”

벼락이 떨어지고, 불덩이 역시 작렬했다. 이를 상쇄하기 위한 주문이나 보호막 역시 반짝거렸다. 그 화려함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다. 마치, 네온사인 같았다. 이명이 삐이이 울리고, 종래에는 그들 모두가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른 채, 손에 들린 날붙이를 찌르고, 내려찍기만 했다. 오직 자신의 심장 고동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벨로크 일행 역시 그 전장의 한복판에서 발버둥 쳤다.

“오롯이 나만을 비추는 여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바랍니다. 저들의 무정한 칼날을 막아낼 힘을 내게 주소서.”

아델이 무릎을 꿇은 채,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녀의 몸에서 성력의 불꽃이 피어났다. 왕의 정병들과는 다른 선명하고 깨끗한 색이었다. 그녀가 손짓했다. 그러자 불꽃이 화르르 퍼져나가며 일행을 중심으로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이는 곧 쇠뇌의 화살이나 투척 무기 같은 투사체들을 모조리 막아내었다. 떨어지는 마법은 벨로크의 문장 갑옷이 흡수해버렸으니. 아비규환의 전장 속 일행이 서 있는 장소는 제일 위험함과 동시에 제일 안전한 곳이었다.

끄-으라아아

벽 너머로 시커먼 음영이 졌다. 이윽고 불꽃이 넘실거리며 이를 뚫고 괴물 병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몸을 흔들어 재끼며 몸에 붙은 역겨운 찌꺼기를 떨쳐내려 했다. 이윽고 녀석의 핏발 서린 눈동자가 사방을 주시했다. 검을 든 요정,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 역겨운 빛을 뿜어내는 성기사, 그리고 대검 기사가 보였다. 괴물 병사는 캭하며 고개를 까딱거리고는 자신의 팔을 거세게 휘둘렀다. 갑옷의 관절부가 퉁 뜯겨나가며 무기 든 손이 촉수처럼 뻗어 나갔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벨로크는 손을 슬쩍 움직였다. 카라를 노리던 칼날이 대검과 충돌하며 챙. 소리를 냈다. 마법사부터 노리는 걸 보니 기본적인 이지는 남아있는 모양이다. 괴물 병사가 튕겨 나간 손을 다시금 회수했다. 길이로 보니 채찍처럼 휘두를 생각인 것 같았다. 두고 볼 생각은 없다. 벨로크는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강철 부츠가 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짧은 심호흡과 함께 땅을 박찼다. 점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 끝에는 장창처럼 보이는 거대한 검이 있었다. 악마 병사는 반응하지 못했다. 놈의 상체는 공성 병기에라도 맞은 듯 펑 터져버렸다.

놈을 필두로 사방의 불벽이 흔들거렸다. 괴물 병사와 기사 수십 마리가 각자의 무기를 꼬나쥔 채, 달려들었다. 하지만, 카라의 주문이 완성되는 것이 더 빨랐다. 그녀가 지팡이를 바닥에 쿵 찍으며 소리쳤다.

“이자리스의 불꽃이여!”

괴물들의 발밑에 시뻘건 마법진이 떠올랐다. 카라가 양손을 펼쳤다.

“솟구쳐라!”

바닥이 칙칙 연기를 뿜으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악귀병들은 달려오는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 순간. 마법진의 빛이 더 커졌다. 악귀병들은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였다. 돌벽이 쾅 폭발하며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들은 끈 풀린 인형처럼 하늘을 날았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구르고 있는 놈들을 향해 세 명의 전사가 나섰다.

“뒈져라!”

아델은 무쇠 방패의 모서리를 휘둘러 악마병의 투구를 퍽 으깨버렸고, 이자벨은 투구의 눈구멍 사이로 세검을 무자비하게 찔렀다. 벨로크는 망치 휘두르듯 검을 내려찍었다. 카라가 주문을 외우는 동안 그녀를 지키고, 그녀의 주문이 터져 나오면 반격한다. 일행은 그렇게 싸워나갔다. 하지만, 전투 도중 벨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끝도 없이 나오는군.”

그의 시선이 돌아갔다. 원정대는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었지만, 적들은 통로나 중앙 계단을 타고 끊임없이 나타났다. 개미 때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다른 녀석들보다 화려한 갑주를 입은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구 역시 붉은 깃털로 장식한 것이 꽤나 지위가 있어 보이는 놈들이었다. 그들이 손짓했다.

[아드리아의 자랑스러운 병사들아. 물러서지 마라! 놈들을 왕의 처소에 들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더러운 침략자들을 죽여라! 물어뜯어라!]

[사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하이에나 같은 저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놈들이 나타나자 악귀병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공격이 좀 더 교묘해졌으며 날카로워졌다. 원정대의 비명 또한 더 커졌다. 지휘관들인가? 사라졌다는 왕국 군의 장군들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겠는데. 벨로크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카라가 말했다.

“안 좋아. 숫자가 줄기는커녕 점점 늘고만 있어. 거기다가 저들은 지치지 않지만, 우리는 지치고 있지. 아무래도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무슨 선택이요? 최대한 안 아프게 죽는 선택?”

석궁을 쏴서 악귀병 하나의 목을 꿰뚫은 이자벨이 농을 던졌다. 카라는 헛웃음을 지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다시금 말했다.

“이대로 원정대와 함께 저 괴물들을 다 쳐죽일 때까지 싸우던지. 아니면 놈들을 무시한 채, 어딘가에 숨어있을 대악마를 노리던지. 둘 중 하나를 말이야.”

그녀의 주문이 다시금 작렬했다. 쏘아져 나간 비전 화살이 달려들던 악마기사의 몸을 강타했다. 그 틈을 노려 벨로크가 녀석을 베어냈다. 확실히 무슨 수를 써내야 하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가 고갯짓했다.

“우두머리를 노린다고 쳐도 저놈들을 뚫을 수가 있나? 지금도 끝없이 쏟아지는데.”

카라의 주문은 강력했지만, 시전하는 동안의 틈이 있었다. 벨로크의 대검 역시 칼이라는 무기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한 번에 두셋 정도를 베어내는 것이 다였으니까. 아델의 성력이나 이자벨의 화살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바보들이. 그새 새카맣게 까먹었네. 카라는 벨로크와 아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허리춤의 가방을 툭툭 쳤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생각해봐. 대마법사의 던전에서 가지고 나온 주문서들이 있잖아! 하나하나가 강력한 위력을 가진 스크롤들 말이야! 그걸 사용하면 저 포위망도 뚫어낼 수 있을 거야!”

“그래··· 그게 있었군.”

아델이 바닥에 꽂아두었던 검을 툭 뽑았다. 그러고는 허리춤의 가방을 뒤져서 주문서들을 꺼냈다. 벨로크 역시 주문서들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이윽고 몇 장은 손이 비어있는 이자벨에게 건네주었다. 요정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녀가 종이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 정도 양의 주문서라니··· 전략 병기 급이네요. 제 상관들이 봤으면 침을 흘렸을 정도예요.”

카라가 피식 웃었다. 이윽고 로브 자락을 젖히며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영지 하나는 가볍게 초토화 시킬 양이지. 다들 준비됐어? 목표는 저기 보이는 계단이야. 끝에 통로 하나가 보일 거야. 내 생각에 성의 위쪽으로 향하는 곳은 아무리 봐도 저곳뿐이야. 그리고 왕이나 대악마 쯤 되면 꼭대기 층에 자리 잡고 있겠지.”

타당해 보이는 의견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시선이 홀의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엉망이 된 융단을 밟으며 몰려드는 괴물들의 파도와 그 너머에 있는 통로 하나도 보였다. 카라가 눈을 빛냈다.

“계획은 간단해. 놈들을 향해서 주문서를 찢는 거야. 그러면 잠깐의 틈이 생기겠지. 달리는 거야. 괴물들이 몰려들면 또다시 주문서를 찢고, 달려. 이걸 반복하면 돼.”

어린애도 알아들을 정도로군.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크게 한 발 내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대검이 번뜩이고 몰려오던 병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 카라가 소리쳤다.

“지금!”

일행이 주문서를 부욱 찢었다. 벼락이 갈래처럼 쏟아지고 화염으로 된 창이 날아갔다. 일순 섬광이 일며 성이 쿠르릉 떨렸다. 주문에 직격된 괴물들이 문자 그대로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과연, 대마법사의 유산답게 가공할 위력이었다. 벨로크는 감탄할 때. 악귀병들을 지휘하던 장군의 고개가 돌아갔다.

[스크롤인가?! 무슨 저런···]

“달려!”

카라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뛰었다. 벨로크와 아델, 이자벨 역시 텅 비어버린 계단을 향해 달렸다. 짓뭉개진 살덩이나 반쯤 녹아버린 갑옷 파편이 일행의 부츠 발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렸다. 일행의 꿍꿍이속을 알아차린 장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마··· 막아라! 왕에게 가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끄에에에-엑

쇠뇌의 화살과 주문이 일행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소용없었다. 성력의 보호막과 주문 막이 갑옷이 있는 한 투사체로는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몸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때마다 일행의 손에 들린 주문서가 가공할 마법을 뿜어냈다. 석재 계단이 쿠르릉 울리고 주문이 지나간 융단이 흉측하게 타오르며 말려들어 갔다. 통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베··· 벨로크 경! 우리를 내버려 둔 채, 어디를 가는 건가?!”

[이익! 막아라! 막아야 한···]

공작의 다급한 음성과 괴물들의 괴성, 타락한 왕국 장군의 악다구니를 뒤로한 채, 일행은 어둠에 잠긴 통로 속으로 몸을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