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악마성
게릭의 두 눈은 장벽 바깥을 빈틈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한 점 흔들림 없는 시선이 어둠 속을 꿰뚫을 것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살 박힌 손으로 창대를 굳건히 쥔 채, 서 있을 뿐이었다. 기세만 본다면 어딘가의 정예병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은 몸뚱이만큼 무겁지 않았다. 그는 쉴 새 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시발, 시발. 이럴 줄 알았으면··· 농사나 지을걸.”
변방에서 썩는 것이 싫어 도시로 온 무지렁이, 날건달로 빌어먹다 병사가 된 운 좋은 사내. 동료를 버리고 도망친 비겁자. 이 모든 것이 그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게릭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처음 기억은 밀밭이었다. 여물지도 않은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었다. 근처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가 하염없이 들렸었지.
그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면 맨날 하염없이 봐왔을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풍경이었다. 그다음은 더러운 뒷골목과 영주성, 마지막은 전장이었다. 피처럼 떠오른 보름달과 쏟아지는 괴물들이 그를 맞이했었다. 몇 안 되는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자들도 전부 다 괴물들의 손아귀에 죽음을 맞이했다.
-게릭. 나··· 나 좀 나 좀 살려···
복부가 갈라져 쏟아지는 장기들을 부여잡은 채, 신음하던 선임 한 명이 생각났다. 게릭의 두 눈은 여전히 장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나는 그저 잘 먹고 잘살고 싶었을 뿐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여기서 살아나갈 수는 있을까? 물 위를 떠돌아다니는 부평초 같군. 그저 휩쓸리기만 하는··· 그런 게릭의 귓가에 고함소리가 들렸다.
“괴··· 괴물!”
게릭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희끄무레한 어둠 사이로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빠르게 몰아닥쳤다. 일렁거리는 횃불 빛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역겨운 악취와 함께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가 고개를 올렸다.
얼굴이 곰보처럼 일그러진 거인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게릭은 속으로 욕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지? 내가 근무를 게을리 섰나?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역시 농사나 지었어야··· 몽둥이가 날아왔고, 그의 생각은 끊겼다. 병사 한 명이 죽었다. 이윽고 위와 같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습격이다! 거인! 거인들이 나타났다!”
“방벽은 어떻게 됐나?”
“무너진 지 오랩니다! 놈들 덩치를 보십쇼! 시발! 여기까지 밀고 오는 건 순식간일 겁니다!”
선임병의 질문에 방벽을 지키던 병사가 악을 쓰며 말했다. 선임병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이 진짜 요새라면 적이 들이닥쳤을 때. 울리는 경종 하나라도 있었을 거다. 드높은 감시탑도 있었겠지. 하지만, 여기는 말만 요새였지. 사실상 쓰레기 매립지였다. 튼튼한 석조가 아닌, 썩어빠진 판자 따위로 벽을 세워봤자 얼마나 가겠는가? 그렇기에 인간방벽을 세워놓고 비명소리를 감시탑 대신 쓴 거다. 전장터를 제법 굴러본 부사관의 생각은 그랬다.
중요한 건 자신이 방벽에 배치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사실을 상관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겁에 질린 병사를 뒤로한 채, 군영의 중앙으로 달려갔다. 소란을 들었는지. 이미 수십 명의 중무장 기사들이 천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있었다. 부사관은 그중 한 명의 기사에게 다가가 경례를 올리고는 말했다.
“가란 님. 습격입니다. 거인들입니다.”
“쉴 틈 없이 덤벼드는군. 그렇게 잡아 죽였는데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가.”
가란은 랜스를 어깨에 척 걸치며 푸념을 내뱉었다. 이윽고 부사관에게 손짓했다.
“교단과 다른 영주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라. 목숨을 걸고 응전하지 않는다면 다 죽는다고도 전하도록.”
“예.”
부사관이 떠나고, 가란은 몸을 돌려 공작이 기거하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님.”
“거인들이라고?”
“예. 지금 장벽 안에 있는 병사들과 교전 중입니다.”
시종의 도움을 받아 갑옷을 입고 있던 게오르그는 피식 웃었다. 교전이라니. 4미터가 넘어가는 괴물을 평범한 인간들이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짓밟히거나 먹히고 있을 텐데. 잘해야 시간 벌이 정도겠지. 공작은 척척 걸어갔다. 그리고 허리에는 룬검을 차고, 비슷한 문양이 새겨진 방패까지 들었다.
그는 노쇠했지만, 허리는 꼿꼿했으며 눈동자에는 힘이 넘쳤다. 여전히 강경한 육체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몸에 걸친 유물들만 해도 웬만한 괴물들은 쓸어버릴 수 있었으니. 그는 이미 한 명의 기사였다. 노기사가 말했다.
“출정 준비는?”
“공작님께서 미리 언질을 주신 덕분에 진작에 마쳤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가란이 감탄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다. 혹시나 해서 말해 본 것인데···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지. 이걸 들었다고?”
공작은 자신의 앞에서도 시건방질 정도로 당돌하던 젊은 기사를 떠올렸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동한다.”
천막을 나오자, 기사단이 그를 호위하듯 빙 둘러쌓다. 고향 땅이 싫어서 도망친 요정 검사, 강대한 권력에 이끌려 들러붙은 야만인, 전쟁터를 찾아 떠돌아다니던 검귀나 손재주가 뛰어난 난쟁이 등. 하나하나가 특별한 비전을 지녔으며, 강력한 유물들로 무장한 용사들이었다. 그래, 이들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공작은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봤다. 이윽고 친위대만 들을 수 있도록 중얼거렸다.
“모두들 잊지는 않았겠지? 절대 무리하지 마라. 전력은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
살아남은 다른 세력의 영주들도 있었고, 교단 역시도 건재했다. 이들 모두가 악마왕을 상대로 같이 싸워나가야 할 동료들이자, 왕위를 노리고 다퉈야 할 경쟁자들이었다.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는 노파심에 한 마디 더 뱉었다.
“만약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간다면··· 알고 있겠지?”
공작의 얼굴은 비교적 경무장을 한 채,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기사단 소속의 마법사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포탈주문을 사용하겠습니다. 하지만, 부작용은···”
“8할이다. 다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알겠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보험까지 준비해둔 노기사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진동 소리는 군영 전체를 아우르고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저 멀리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의 모습도 슬금슬금 보였다. 놈들에게 맞서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손에는 병장기를 든 병사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는 피식 웃었다. 과연 이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을까. 왕관을 손에 넣는 자는 누구일까? 뭐가 됐든 힘을 가진 자만이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더 강한 힘을 갈망했다. 권력 역시 필요했다. 그리고, 그 길을 막아선다면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생각이었다. 교단이든 성문을 부수는 기사든 누구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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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크다고 둔할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 만큼 신체에 자리 잡은 근육 또한 많았다. 이는 곧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보폭 또한 더 크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런 거인의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마치, 대저택의 기둥을 뽑아서 휘두르는 것만 같았다.
병사들은 방패를 들고 저항했지만, 맞는 족족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그들이 들고 있던 횃불이 하늘을 붕 날았고, 썩어빠진 집에 끼얹어져서 화염을 일으켰다. 사방이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이제 사람들은 괴물만이 아닌, 연기와 열기에도 맞서야 했다.
“개판이네. 이걸 대체 어떻게 수습하지?”
카라가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전의 그 주문을 사용하면 안 되나요? 눈보라를 일으키는 마법이요. 그걸로 불을 꺼트리면···”
이자벨이 석궁에 시위를 걸면서 말했지만, 카라는 고개를 저었다.
“수천 명이 주둔하던 곳이야. 주문 하나로 보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다른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가능하겠지만, 저들도 여력은 없어 보이네.”
이자벨이 주위를 둘러봤다. 과연 마법사들은 제각각의 마법을 괴물들을 향해 쏘아내고 있었다. 벼락이나 화염구 보이지 않는 힘 등이 악귀들의 몸뚱이를 강타했다. 눈앞에서 손발톱이 달려들고 있으니 화재에 신경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이자벨은 눈을 슬쩍 감았다가 뜨고는 화살 하나를 장전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타 죽기 전에 길을 뚫어야지.”
벨로크가 답할 때. 아델이 소리쳤다.
“전방에 거인입니다!”
일행은 시선을 돌렸다. 다 무너져 가는 건물 뒤편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았다. 가진 덩치만큼이나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될법한 크기였다. 녀석 또한 일행을 발견했는지 일그러진 얼굴을 한층 더 구겼다. 그건 앞으로 일어날 전투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벨로크가 보기에 저건 웃음이었다. 그것도 만찬을 앞두고 배를 슥슥 만지며 기대하는 얼굴에 가까웠다. 그의 생각대로였다. 거인은 혀를 날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이윽고 팔을 휙 휘둘러서 무너져가는 집을 아예 조각내 버렸다.
[새로운 고기. 암컷 고기. 야들야들 고기.]
섬뜩한 목소리가 주위를 지르르 울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나무 파편 사이로 녀석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하체에 거적때기 하나를 걸친 부랑자였다. 하지만, 몸 전체가 근육으로 꽉 차 있는 괴물 부랑자였다. 글쎄, 거인이라기보다는 나병 환자처럼 생겼는데.
[새로운 고기 왔으니. 이건 필요 없다.]
거인이 오른손을 홱 휘둘렀다. 카라가 보호막 주문을 외웠다. 반투명한 역장이 생겨났고, 거인이 던진 물건이 콰직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시체였다. 그것도 상체가 잘려 나가 하반신만 남은 살덩이였다.
“미친 괴물 새끼가!”
아델이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검과 방패를 빼 들었다. 그녀가 달려들기도 전에 벨로크가 나섰다. 괴물의 한 끼 식사가 되어버린 불쌍한 병사에 대한 분노는 물론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새롭게 나타난 이 괴물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나를 뛰어넘을까? 녀석이 줄 경험치는? 벨로크는 약간의 기대감을 담은 채, 몸 안의 근육들을 긴장시켰다. 그러고는 얼마 정도의 힘으로 검을 휘두를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절반? 아니면 전력을 다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어떻게 수치화해서 휘두른단 말인가. 그는 평소처럼 행동했다. 검은빛이 반짝였고, 거인의 몽둥이가 갈라졌다.
[우어?]
거대한 나무판자가 쩍 갈라졌다. 흩날리는 톱밥 사이로 거인의 당황한 눈동자가 보였다. 벨로크는 휘둘렀던 검을 끌어모았다. 이윽고 기세를 줄이지 않은 채, 돌진했다. 이번에는 검은 선 하나가 날아들었다. 거인은 반응할 틈도 없이 배를 꿰뚫렸다. 녀석이 컥 피를 토했다. 얼굴을 한층 더 일그러뜨렸다.
즐거워서 지은 표정이 아닌, 내장을 파고드는 격통 때문이었다. 녀석은 세상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그런 녀석의 눈에 화살이 퍽 박혔다. 이자벨이 쏘아낸 것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아델 역시 구부러진 칼날을 마구 휘둘렀다. 놈의 굵은 팔뚝이 마치, 햄처럼 썰려나가기 시작했다.
[끄어어어!]
배에 구멍이 뚫리고, 눈이 멀었으며 한쪽 팔도 못 쓰게 된 괴물이 아까전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다. 하나 남은 놈의 눈이 악의로 번들거렸다. 더 이상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지상 만물의 모든 것을 증오하는 악귀의 눈이었다. 놈이 입을 쩌억 벌렸다. 이빨에 끼인 고깃덩이 사이로 시커먼 어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그 속에서 넘실거리는 주황빛의 꿈틀거림 역시 보였다. 그 순간. 벨로크는 놈이 무슨 짓을 할지 예상했다. 용병대장이 했던 말이 기억난 것이다. 분명···
“불을 뿜는다고 했지.”
“벨로크 님! 위험합니다!”
아델이 기도문을 외우며 다급히 그에게 다가왔다. 뒤편에 있던 카라 역시 소리쳤다.
“내가 막을게! 고개 숙여!”
그녀의 손에는 시퍼런 얼음창 몇 자루가 들려 있었다. 거인의 입에 꽂아 넣어서 화염을 상쇄시킬 생각이다. 그 모습을 보던 벨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호들갑은··· 다들 진정해라!”
그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검신이 끼기긱 비명을 질렀고, 괴물의 몸뚱이 역시 비명을 질렀다. 놈의 강철 같은 피부와 뼈, 두터운 살덩이와 장기 등 모든 것이 날붙이의 움직임을 멈춰 세우고자 했다. 소용없었다. 이 모든 저항이 부질없는 것이었다. 벨로크는 미간을 슬쩍 구긴 채, 검을 들어 올렸다. 시커먼 궤적이 하늘을 수놓았고, 괴물은 쩍 반 토막이 났다. 쏟아지는 피와 장기들을 맞으며 벨로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건··· 매번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군.”
허탈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카라를 뒤로한 채, 벨로크는 대검을 쿵 찍었다.
“덩칫값을 못 하는 녀석이군. 경험치가 너무 작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악 어린 주변의 시선만큼이나 다양한 눈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괴물들의 것이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벌이가 적다면 더 많이 움직이면 된다. 작은 것을 모으는 건 익숙했으니까. 그는 다시금 검을 들어 올렸다. 칼끝에 맺힌 악귀들의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