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악마성
으르렁거리듯 울리는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 빗금 그어진 판금 갑옷과 이가 빠진 무기들이 오히려 저들의 실전경험을 말해주는 듯했다. 벨로크가 보기에 저들은 기사단이었다. 갑옷 양식이나 철판에 새겨져 있는 문양이 똑같았던 것이다. 독수리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가 고민할 때. 옆에 있던 아델이 대신 나섰다.
“살아남은 원정대요. 그쪽은 누구시오?”
“이 마경에서 살아남았다? 대체 무슨 수로···”
기사는 아델의 말을 듣고도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무시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는 투구 속 눈동자를 굴리며 일행의 면면을 확인했다. 몇몇을 제외한다면 군기라고는 거의 없으며 패잔병처럼만 보이는 몰골. 이 자들이 정말 어떻게 살아남았지?
그 순간. 뒤편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얼마나 다급한지 벨로크와 아델의 어깨를 툭 치기까지 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릴 때. 용케도 살아남은 중년 귀족이 잔뜩 흥분한 채, 말했다.
“여명 기사단! 게오르그 공작님의 검이 아닌가? 그분이 여기에 계신 건가? 나, 나. 알아보겠소? 나 피그오 남작이오!”
“피그오 남작이라고? 공작님의 봉신 중 한 사람인가?”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년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러자, 남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기껏 목숨과 군사들을 이끌고 공작의 깃발 아래 합류했건만, 휘하 기사들에게조차 무시당한 것이다. 둘이서 치고받든 말든 벨로크는 주위의 대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명 기사단이라니··· 전쟁만 일어나면 사람 잡아대는 그 인간 백정들?
-사람뿐만이 아니야. 음지에 숨어 사는 괴물들 또한 찾아서 사냥한다던데.
-왕의 친위대를 제외하고는 명실상부 왕국 최고의 전사들이 아닌가.
오. 대단한 친구들이었군. 하긴, 그 정도는 되니까. 저 괴물을 사냥한 거겠지. 누워있는 거인을 보며 벨로크가 감탄할 때. 옆에 있던 카라가 중얼거렸다.
“왕궁에 들어오기 전, 성문 근처에서 마주쳤던 그 기사들 같은데? 우리들을 무시했었던 그 친구들 말이야. 생각보다 거물들이었군.”
“음.”
벨로크는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했다. 눈앞의 기사단은 대영주 휘하의 검들이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걸로 봐서는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존재한다는 거였다. 그 말은 곧 대영주인가 하는 인물도 이 근처에 있다는 뜻인데··· 어쩌면 뿔뿔이 흩어졌던 연합군들이 모여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벨로크가 슬쩍 기대할 때. 남작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 나는 최선을 다했소이다. 이 사지에 들어와서도 공작님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싸웠소. 내가 이 원정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아시오? 공작님을 알현케 해주시오! 나는 대접을 받을 권리가 충분히 있소이다.”
“저. 돼지가 지금 뭐라는 거야? 누가 누구를 이끌었다고?”
카라가 헛웃음을 지으며 피그오 남작을 바라볼 때. 거인의 시체에 앉아있던 기사들이 슬금슬금 원정대의 근처로 몰려들었다. 갑옷이 주황색들로 반짝이자 무슨 횃불들이 다가오는 듯했다.
한 기사가 속닥거렸다. 이윽고 그 속삭임은 금세 주위로 퍼지며 그들끼리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열변을 토하는 남작을 바라보지 않았다. 자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 기묘한 문장 갑옷을 입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중되자 벨로크 또한 그들을 바라봤다. 뭘 봐? 흑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 기사가 떠듬거리며 말했다.
“다··· 당신은 성문 파괴자?”
“날 아시오?”
“음··· 그새 잊어버리신 모양이군. 하긴, 우리 첫 만남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지.”
벨로크의 눈이 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붉은색의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흉갑을 입은 사내였다. 뭔가 기억날 듯 말 듯 했다. 그가 말했다.
“가란이라고 하오. 여명 기사단의 고문을 맡고 있소. 그때 성문에서 귀공을 맞이했던 자 이기도 하지.”
아. 그 친구로군.
“그렇군. 무슨 일이오? 이제 우리들에 대한 오해가 좀 풀리셨소?”
가란이 투구를 벗었다. 턱수염을 길게 기른 중년 기사의 얼굴이 붉게 빛났다. 그는 건틀릿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을 쓱 훔치더니 벨로크를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풀리다 뿐이겠소? 그때의 무례를 사과드리겠소. 진정한 기사를 못 알아볼 정도로 내 안목을 썩어있을 줄은 몰랐으니 말이오.”
그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피그오 남작을 슥 보더니, 경멸하는 눈초리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오합지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눈앞에 있는 사내의 무력 때문이었을 테니까. 정곡을 찔린 남작이 입을 헙 닫고, 가란은 벨로크를 쳐다보며 다시금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그가 말했다.
“이곳은 얘기를 나누기 좋은 곳은 아닌 듯싶소만, 일단 우리를 따라 오시겠소? 공작님께서도 경을 뵙기를 고대하고 있으시오.”
벨로크는 슬쩍 일행을 바라봤다. 아델은 콧대 높은 저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자, 내심 뿌듯해하는 표정이었고, 이자벨은 웃고만 있었다. 오직 카라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저렇게 정중하게 나오는 거로 봐서 무슨 제안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영입 제안 일수도 있어. 너는 대단한 기사니까. 거절한다고 쳐도 일단 따라가는 게 맞아. 연합군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그들이 본 주변 상황은 또 어떤지 들어둬야 할 건 많으니까.”
마법사다운 조언이었다. 네가 제일 낫군.
“좋소.”
벨로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가란이 주위 기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복귀한다! 모두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도록!”
“예!”
#
공작의 군영은 폐허 마을과 불타는 마을, 해골산들의 경계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 교묘한 위치선정과 더불어 주변을 둘러싼 방벽을 보고 일행은 혀를 내둘렀다. 썩은 판잣집을 뜯어서 방책을 만들고 횃불까지 비치해놓자. 웬 요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런 걸 만들었다고? 수완이 대단한데. 벨로크의 감탄을 뒤로한 채, 일행은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군데군데 창을 든 채, 경계를 서는 병사와 기사들, 교단원들도 보였다. 흩어졌던 연합군들이 요새 안에도 상주했던 것이다.
“알렉스 경!”
“다르! 살아있었군!”
“주교님! 세상에 신이시여!”
일행의 뒤를 따르던 원정대원들은 한두 명씩 지인들을 찾아 사라졌다. 혹은 방벽의 뒤에 있으니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빠져나갔다. 종래에는 벨로크 일행과 그들을 안내하는 기사 가란 밖에 남지 않았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서로 간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얄팍한 정이 여기서 툭 끊겨버린 것이다. 물론, 아쉽지는 않았다. 홀가분할 뿐이었다. 걸어가던 중 가란이 말했다.
“대악마의 마법이 발동했을 때. 경들은 어디서 떨어지셨소?”
“묘지였소. 그리고 숲을 지났고, 폐허 마을을 거쳐왔지.”
벨로크가 대답하자, 가란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놀란 듯했다.
“경들도 만만치 않게 고생하셨구려. 우리 또한 마찬가지였소. 웬 얼어붙은 땅에 떨어졌었는데···”
가란의 말은 대강 이랬다. 벨로크가 살폈던 세 구역 말고도 여러 가지 구역들이 이 땅에는 존재하고 있었다. 수천 명의 연합군들이 제각기 다른 땅에 떨어졌고, 결국 그들 나름대로의 고생을 거쳐서 현재 이곳에 모였다는 얘기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 게오르그 공작의 노력이 컸다는 허풍 아닌, 허풍이 섞여 있었다. 벨로크는 권력자에 대한 맞장구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모인 이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전부요?”
가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만 명이 넘어가던 원정군은 어느새, 그 숫자가 절반이 넘게 줄어있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소. 이런 말 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우리 기사단이나 주교급, 고위 성기사 분들을 제외하고는 사기도 바닥을 치는 형편이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닌 듯 싶소만.”
가란은 쓰게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비단 정신적인 문제만이 아닌, 병장기의 보급이나 식량 수급 또한 문제였으니까. 마치, 구멍이 숭숭 뚫린 배를 타고 대해를 건너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중년 지휘관은 더 이상 입을 열어서 푸념을 내뱉지 않았다. 그가 맡은 역할은 이곳까지 저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으니까. 그가 말했다.
“일단 공작 각하를 한 번 만나보시겠소? 참. 일행분들께서는 여기서 대기해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꼭 무언가 제안할 게 있거나, 꿍꿍이속이 있는 귀족들이 독대를 제안하고는 했다. 벨로크는 공작이라는 사내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할지 생각하며, 천막을 젖혔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귀족이 흔들의자에 턱 하니 앉아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팔을 기댄 채, 벨로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벨로크는 눈앞에 있는 노인네의 권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에 천막을 설치하고, 책상과 탁자까지 설치하다니, 이걸 끌고 왔을 병사들이 고생 좀 했을 것이다.
“그래, 성문을 부순 영웅께서 오셨군. 만나서 반갑네.”
여명 기사단의 단장이자, 북쪽 야만인들의 땅. 하이랜드와의 접경지대를 맡고있는 전쟁 귀족. 이번 반란소동의 주모자 중 하나인 게오르그 공작이 말했다.
“영웅이라. 사치스러운 별명이군.”
벨로크가 무심히 답하자, 게오르그는 피식 웃었다.
“글쎄, 내 기준에서는 칼질 한 번으로 성문을 부순 자는 영웅이 맞네. 혹은 괴물이거나. 정말이지··· 내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기행이었지.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유물인가?”
갑옷이 유물이긴 하지. 굳이 답할 의무가 없었기에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휘둘러서 부쉈소.”
게오르그 또한 깊이 캐묻지 않았다. 그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번 더 벨로크를 띄워주었다.
“내 수 많은 전쟁터를 돌아다니고, 수많은 기사들과 전사, 마법사들을 만나봤네. 걔 중에서는 대단한 비전을 지닌 자들도 여럿 있었지. 하지만, 자네만 한 사람은 처음 보는군.”
“얼굴에 금칠이나 해주려고 부르셨소?”
게오르그는 서랍을 뒤졌다. 이윽고 파이프 하나를 꺼내고는 입에 물었다.
“그럴 리가. 나는 지금 궁지에 몰려있네. 왕의 목을 취하고 왕좌에 앉을 다짐으로 출정했건만, 오히려 괴물들만 주구장창 죽이고 있지. 충성스러운 내 병사들과 기사들. 북쪽 야만인들과의 전투로 단련된 내 칼날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고 있어. 엄청난 손해일세.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라고 볼 수 있겠지. 왜냐고? 왕궁 바깥에 있는 저 무지렁이들은 우리의 이러한 노력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세상에! 왕궁 안이 이런 저주받은 장소란 걸 알았다면 난 결코 여기 오지 않았을 걸세. 오히려 더 좋은 기회를 노렸을 거야!”
게오르그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열변을 토했다. 벨로크는 그런 노인네를 보면서 생각했다. 말하는 게 전사라기보다는 꼭 장사치 같다고. 어쩌면 수많은 인원들을 통솔하는 장군이니. 병사들과 기사들을 숫자놀음으로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건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물었다.
“본론만 말하시오.”
“음. 미안하군. 내 잡설이 길었네. 이건 몸에 익힌 습관이라 할 수 있네. 귀족으로서의 허례허식 말일세. 법도나 예의 같은 것이 있지 않나.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벨로크의 눈이 가늘어지자. 게오르그는 헛기침을 했다. 이윽고 부싯돌을 튀기며 파이프를 한 모금 빨았다.
“자네의 지칠 줄 모르는 용맹과 실력, 내 높이 평가하네. 특히나 이런 전시 상황일수록 그 무력은 빛이 나는 법이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 혹시 모시는 사람이 있는가?”
또 이거로군. 요즘 인기가 많아지는 느낌인데.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없소.”
뿜어내는 흐릿한 연기 사이로 게오르그의 눈동자와 입가 미소가 조금 커졌다.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혹시 기사단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당신이 이끌고 있는 기사단 말이오?”
게오르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긴 하지만, 왕의 친위대를 제외한다면 왕국 최강이라고 자부한다네. 개개인 하나하나가 특별한 비전을 지닌, 일당백의 용사들이지. 나는 이들을 이끌고 저 마귀왕을 끌어내릴 생각이야. 그렇게 된다면? 기사단원들은 각각 영지 하나씩을 받는 거지. 아니, 활약에 따라 두 개씩도 받을 수 있겠군. 물론, 어마어마한 명예 역시 뒤따를 걸세. 어떤가?”
그의 어투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긴, 왕국 최고의 기사단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할 말은 그걸로 끝이오?”
“설마... 거절인가?”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어서 말이오.”
그깟 영지 몇 개쯤,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에 얻을 수 있었다. 로벤에서도 그랬고, 뱀 영지에서도 그랬다. 과정이야 조금 귀찮았을지도 몰라도 그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는 젊은이의 허세처럼 보이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냥 무던하게 답했다. 그가 원하는 건 이 땅에서의 호의호식이 아니었으니까.
“하. 그런가? 그렇다면 내 하나만 더 묻겠네.”
“무엇이오?”
게오르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아. 별건 아닐세. 자네가 혹시 왕좌에 관심이 있나 싶어서 말이지.”
이게 무슨 개소리야? 벨로크가 당황하자. 게오르그는 의자에 느긋하게 앉았다. 그러고는 손에 들린 반지를 벨로크 쪽으로 향한 채,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따금씩 그런 친구들이 있지. 가진 힘과 지식을 주체하다 못해 감당못할 꿈을 꾸는 친구들이 말일세. 지금 내 군영에도 여럿 있네. 몇몇 떠돌이 기사나 마법사들. 그래, 교단원들 또한 그렇군. 그 치들은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앉아 이 왕국을 교단이 지배하는 땅으로 바꿀 생각이야. 난 자네가 혹여 그런 불온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되는군. 칼질 한 번으로 성문을 부수는 기사라니. 충분히 위협적이니까 말이야.”
벨로크는 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러자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했는지 게오르그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다스리는 자의 고뇌를 모르는 자만이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걸지도 모르지. 지지기반이 없는 자가 왕좌에 오르면 어떻게 되겠나? 당장에 나라의 온 귀족들이 정통성을 의심하며 승냥이처럼 달려들걸세. 결국 이 나라는 해변의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고 말이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나? 그러니까 헛된 생각 말고 내 밑에서···”
벨로크가 공작의 말을 끊었다.
“왔군.”
“음? 뭐가 말인가?”
“전투준비를 하시오. 발걸음 소리가 요란한 게 거인 놈들인 거 같으니.”
“뭐라고? 아니, 자네···”
벨로크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익숙한 달빛과 눅눅한 어둠이 그를 맞이했다. 막사 옆에 꽂혀있던 횃불 또한 꼿꼿하게 몸을 흔들며 주변의 고요함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인간을 벗어난 초월적인 오감이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화염이 솟구치는 마을을 거칠게 헤집으며 이쪽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괴물들을. 좀 많군.
벨로크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한 자리에는 모였지만, 서로 딴 마음을 먹고 있는 이 인간들이 과연 얼마나 살아남을지 궁금했다. 각자 손에 들린 비수로 서로를 찌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의 앞으로 세 명의 여인들이 다가왔다.
검은머리, 빨강머리, 금발머리 등 형형 색색의 머리칼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역시나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믿을 것은 동료들밖에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