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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63화 (63/222)

63

악마성

벨로크는 혀를 찼다. 붉은악마 한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던 흑요정을 날렵하게 받아낸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벨로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타고 있던 악마를 조종해 슬그머니 지면으로 내려왔다.

피막 날개가 펄럭거리고 풍압에 의해 바닥에 있던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윽고 땅을 밟은 흑요정이 악마의 등을 쓸면서 말했다.

“수고했다. 위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명령을 들은 악마가 다시금 날아오르려는 찰나. 주위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어디를 가려고!”

이자벨과 원정대원들이 날린 것이었다. 흑요정 사내는 또다시 웃었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간 순간. 빛이 반짝였다. 거뭇한 궤적들이 휙휙 거리더니 화살들을 튕겨냈다. 이자벨이 이를 악물었고, 원정대원들이 당황했다.

“씹, 뭐, 뭐야···”

“화살을 막는다고?”

흑요정의 부츠발이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화살깃을 꾸득 밟았다. 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입가의 미소를 헤실 거렸다. 이윽고 쥐고 있던 검을 검집에 척 넣으며 말했다.

“환영인사가 격하시군. 대뜸 주문부터 날리지를 않나. 이제는 화살까지. 이것이 지상인들의 법도인가?”

···

먼저 습격한 것은 그쪽 아닌가? 그리고 주문? 장황한 개소리들이 들려왔지만, 일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델은 주위 기사들과 함께 병사들을 통솔하느라 바빴으며 카라는 진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자벨은? 사내가 화살도 튕겨내는 검사라는 것을 알고 목표를 바꾸고 있었다. 그랬기에 벨로크가 나섰다. 그가 몇 걸음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너로군. 실실 쪼개던 놈이.”

사내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는 벨로크를 보더니 눈을 빛냈다.

“아아. 그래, 네놈이로군. 이상한 주문을 써서 내 부하들을 죽인 마법사. 음? 뭔가 이상한데?”

말을 내뱉던 사내는 벨로크가 매고 있는 검과 갑주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복장으로만 보면 기사처럼 보이는데··· 방금 전의 주문은 뭐지? 유물인가? 아니면, 육체파 마법사?”

벨로크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놈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 순간. 옆에서 화살을 장전하던 이자벨이 속삭였다.

“당신이 던진 돌을 보고 주문이라고 착각한 거 같은데요? 하긴, 누가 그걸 돌팔매라고 생각하겠어요? 눈만 깜빡이면 골통이 깨지는데.”

“음···”

벨로크는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었다. 화살도 튕겨내는 놈이 돌팔매하고 주문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저놈 뭐지? 어설픈 달인? 그게 아니면 내 근력이 그만큼 더 높아졌다는 건가?

두 사람을 지켜보던 흑요정이 다시금 검을 뽑아들었다. 얼마나 날카로운지 시퍼런 빛을 뽐내는 흑검이었다. 그는 벨로크의 입가를 주시하며 몸을 긴장시켰다. 허벅지와 양팔의 근육이 비죽 솟아올랐고, 가죽부츠가 바닥을 쓸면서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몇 걸음이나 움직이면 저 요상한 차림을 한 마법사의 목을 잘라낼 수 있을지, 언제쯤 부하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려야 할지 계산하고 있었다. 사내가 입가를 찢으며 말했다.

“지옥에서 피어나는 인간과 요정의 밀회인가? 그림 좋은데?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곧 내 검에 나란히 목이 떨어질 텐데.”

벨로크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그냥 허리를 숙여 바닥을 한 번 더 쓸었다. 아까 전보다 더 괜찮은 물건들이 잡혔다. 그는 어깨를 빙빙 돌리고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했다. 까끌까끌한 느낌이 장갑 사이로 전해져왔다.

“뭐하는 거지?”

흑요정이 달려들기 직전. 벨로크가 입을 열었다.

“주문이다. 막아봐.”

그의 어깨가 흐릿해졌다. 직후, 흑검이 쿵 울리며 불똥이 탁 튀었다.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타락요정의 양볼에 핏물이 촥 치솟았다. 요정은 검을 든 채로, 비명을 질렀다. 몸 곳곳에서 진한 격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사내는 고통을 참은 채, 뒷걸음질 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하늘을 부유하던 붉은악마들이 괴성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그중에서 몇 마리는 주인을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날아왔다. 물론, 벨로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박아두었던 검을 뽑아들고는 냅다 달려들었다.

벨로크의 거대한 체구와 보폭 그리고 날랜 발걸음은 흑요정의 예상보다도 더 빨리 그를 마주하게 해주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반 토막 난 돌멩이들을 보고 있던 흑요정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면서 양팔로 흑검을 꾹 쥐었다. 그러고는 다가오고 있는 짙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 미친놈이! 돌? 돌을 던졌다고?!”

“몰아치는 북풍이여!”

요정의 경악 어린 음성을 뒤로한 채, 카라가 서리 폭풍의 주문을 다시금 쏘아냈다. 하늘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그러자, 괴물들은 날개를 접고 투포환처럼 원정대에게 달려들었다. 곡도를 뽑아든 아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충격에 대비해라!”

부릅떠진 두 눈과 이를 꽉 깨문 표정, 병사들과 용병들이 악다구니를 썼다. 그들은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방패와 창을 추켜세웠다. 기사들 역시 제각각의 무기를 꼬나쥔 채, 전의를 불태웠다. 빛이 반짝였고, 사제들의 축복과 성기사들의 기도문이 원정대의 몸을 감쌌다.

다른 신, 다른 지휘관, 다른 소속, 오합지졸들이 만들어낸 방진이었다. 이윽고 급조한 인간 성벽과 악귀들의 손발톱이 충돌했다. 창날이 붉은 몸뚱이를 푹 꿰뚫었다. 하지만 악마는 내장을 비죽 흘리면서도 손톱을 휘둘러 기어이 인간 하나의 목을 날려버렸다.

“이 개새끼가!”

분노어린 음성과 함께 녀석의 몸뚱이에 각양각색의 무기가 떨어졌다. 악마는 곧 다짐육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와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다. 인간 소수에 악마 다수가 몰아닥쳤다. 피와 살점이 비산하고, 악귀들이 입을 쩝쩝거리며 만찬을 벌였다. 전장이었다. 그것도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치솟는 선혈과 쇠 냄새, 괴물들의 노린내, 혈류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까지. 붉은 달이 뜨는 폐허 아래에서 원정대는 미친 듯이 싸웠다. 그 중에서도 불꽃을 뿜어내는 성기사와 붉은 머리 마법사, 요정궁수의 활약은 단연 압권이었다.

그녀들의 손이 닿을 때면 괴물들은 그저 분쇄되어버렸으니까. 벨로크의 초월적인 감각은 주위의 이 모든 상황들을 실제처럼 그려낼 수 있었다.

그는 잠깐 상념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이 땅에 처음 떨어졌을 때도 이랬다. 비명과 고함이 끊이지를 않았으며 서로 간에 목숨을 끊기 위해 발악했었다. 싸우고 또 싸우고 몸에 묻은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뭐, 상대가 괴물이라는 것만 빼면 달라진 것도 없나?

고향땅을 벗어나, 오직 투쟁만이 가득한 세계를 살아가게 된 이방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검을 들어 올렸다.

“허억, 허억, 이··· 괴물이.”

머리는 산발을 한 채, 만신창이가 된 흑요정 하나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가의 미소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눈가를 바르르 떨어대며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녀석의 몸에서 떨어지는 피가 눈밭을 붉게 물들일 때. 벨로크가 한 걸음 움직였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녀석이 뒷걸음질쳤다.

벨로크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반응이었다. 저놈이 다음에 할 말도 왠지 예상이 되는데.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너, 인간.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 우리 같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군. 거절하겠다.”

칼 같은 대답에 타락요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윽고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포기 한 건가? 벨로크가 생각할 때. 흔들리던 사내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거칠게 내뱉던 호흡 또한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보기에 저건 삶을 포기한 자가 내비치는 행동이 아니었다. 비장의 한수를 뿜어내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끈덕짐이었다. 그래, 화살도 튕겨내는 검사인데. 이대로 끝나면 너무 시시하지. 벨로크는 기사로서의 호승심을 느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요정은 상체를 크게 숙인 채, 양발을 어깨너비 만큼이나 벌리고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검집을 왼손으로는 검의 손잡이를 꾹 쥐고 있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그 순간. 요정의 눈이 가늘어지며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로크의 날카로운 오감이 이를 먼저 감지해냈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앞에 빛살이 샥 지나갔다. 문장 투구가 파르르 울렸다. 몸을 스치는 진눈깨비를 보며, 벨로크는 속으로 웃었다. 이 검술이 무엇인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쓸만한데.

“상처 하나··· 내지 못한다고?”

울컥 피를 토한 흑요정이 고개를 내렸다. 거대한 대검이 어느 새 자신의 배를 꿰뚫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피하고 찔러 넣은 것이다. 벨로크는 검을 쑤욱 뽑고는 휙 털었다. 흑요정은 흑검을 탱그렁 떨구고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녀석의 얼굴은 입에서 뿜어내는 하얀 숨결만큼이나 창백해지고 있었다. 벨로크가 한 마디 내뱉었다.

“발도술. 꽤나 괜찮은 기술이군. 아델한테 가르치면 딱 맞겠어.”

흑요정은 입을 열려고 했다. 누구한테 가르친다는 거냐? 우리 가문의 비전을 네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질문은 입속을 공허하게 맴돌았을 뿐이었다. 휘둘러진 벨로크의 검이 타락요정의 머리를 툭 날려버렸으니까.

벨로크는 검을 집어넣을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까지 많은 경험치들이 보였으니까. 잠시 후, 눈밭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는 한 번 더 레벨업을 했다.

#

전투가 끝났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괴물 죽이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전후처리였으니까.

“어머니···”

“끄으으아!”

“조금만 참으십시오.”

“중상자들은 이쪽으로 옮겨주십시오.”

부상병들이 신음하고, 치료주문을 쓸 줄 아는 사제들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성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사제들의 숫자도 적었다. 하물며 주위 환경마저 따라주지 않았다. 천막도 없고, 들것도 없다. 모포나 뜨거운 물마저 부족했으니. 결국, 경상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상병은 페허 마을에 뼈를 묻었다.

“시체는 곧 흙으로 그분의 곁으로 돌아갈지니.”

죽은 자들의 얼굴에 천을 씌운 사제들이 성호를 그었다. 약식으로 하는 장례였다. 몇몇 병사나 용병들은 사제들의 눈을 피해 망자들의 품을 뒤적거렸다. 식량을 챙기기 위함이다. 물론 그들의 주머니에는 금반지나 보석 등이 더 많이 들어갔다. 종래에 가서는 눈치를 보던 기사들 또한 약탈에 가담했다. 이를 보던 카라가 혀를 찼다.

“함께 싸울 때는 언제고 죽으니까 남남이네. 속옷까지 벗겨갈 기세인데. 가만히 두고볼거야? 사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옆에 있던 아델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무심한 어투로 답했다.

“전쟁이란 건 원래 이런 거다. 약한 자는 살아남지 못해. 그리고 전리품은 승자의 당연한 권리지. 저들을 제지하려고 드는 게 오히려 사기를 떨어트리는 거다.”

아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금 말했다.

“더군다나 저들은 장기말들이 아닌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이냐. 우리가 대악마에게 닿을 때까지만 버티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해주는 건데.”

열정적으로 지휘하던 것과는 다른 냉담한 반응에 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라 씨는 전장에 나가보신 적이 없나 보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자벨이 묻자, 카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 공부만 주구장창 하다가 영지에 내려와서 정착했거든. 뭐, 그러다가 마녀로 몰려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지금은 대악마 사냥 파티에 끼게 되었지.”

이자벨은 어젯밤 카라와의 대화를 떠올리고는 슬쩍 웃었다.

“요람 속의 공주님이 보기에는 조금 과한 광경이었을까요? 전쟁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요. 강간, 살인, 약탈, 방화가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일종의..."

이자벨은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이윽고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그래, 놀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놀이란다. 나사 빠진 요정 같으니. 내면세계로 들어간 채, 능력치를 찍고 있던 벨로크는 기가차서 눈을 떴다.

"음..."

카라 또한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이자벨을 보고 있었다. 또 다른 헛소리가 나오기 전에 벨로크가 말했다.

“이제 가로막는 것도 없으니, 떠나면 될 거 같군. 저쪽도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모양이고.”

세 사람은 주위를 둘러봤다. 교단원들은 장례를 마쳤으며, 병사들도 약탈을 끝마친 채, 그들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일행이 원정대원들을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이미 그들은 이 무리의 중심이었다. 벨로크의 무력이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으니까. 아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다시 이동을 개시한다. 척후들 앞으로!”

새롭게 뽑아낸 정찰병들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고, 원정대는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벨로크 일행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생각은 똑같았다. 부디 이 전장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목이 온전히 붙어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꿈틀거리는 불안감을 실은 채, 군홧발들이 전진했다. 이윽고 폐허 마을을 빠져나온 원정대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절벽 위에서 봤었던 이제는 죽어버린 용병대장이 말했던 사방이 불타오르고 있는 마을이었다. 다만, 입구에서부터 선객이 여럿 보였다. 원정대는 발걸음을 뚝 멈췄다.

불씨가 타닥거리고, 이에 반사된 흉갑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그 밑에는 5미터는 될법한 거인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낯선 이방인들을 발견한 기사들이 시선을 돌렸다. 괴물의 시체를 의자삼아 턱 하니 앉아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한 명이 무기를 꼬나 쥐고는 일어났다. 이윽고 위협하듯이 말했다.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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