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악마성
“어찌 됐든 잘 됐어. 저 치들은 오합지졸들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용해먹을 수 있을 거야. 괜찮은 변수가 될지도 모르지.”
신랄한 말을 내뱉은 카라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윽고 숟가락을 들어서 그릇에 담겨있던 스튜를 황급히 떠먹었다. 작은 입이 오물거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걸쭉한 내용물들이 그녀의 배속으로 들어갔다. 잘 먹네. 많이 고팠나 보군. 벨로크는 술병을 기울여 빈 잔을 채워주었다.
“고마워.”
카라는 시뻘게진 얼굴로 히죽 웃고는 다시금 말했다.
“설마하니 수백 명의 군사들을 이끌게 될 줄이야.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아델이 눌어붙고 있던 스튜를 휘저으면서 물었다.
“단합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놈들이 우리를 따른다고?”
카라는 입술을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대가 길잃은 아이처럼 방황하고 있던 건 구심점이 없어서야. 즉, 우두머리가 없었기 때문이지. 대악마의 마법 때문에 모두들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자비한 전사가 한 명 나타났지. 사람 몸통만 한 대검을 휘두르며 악마들을 일거에 토막 내는 검사가 말이야.”
마녀의 갈색 눈이 벨로크를 진하게 주시했다. 그는 막 술병을 기울여 아델의 빈 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아델은 둥둥 떠다니는 호박색의 액체를 한 번, 벨로크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조심히 홀짝거렸다. 그렇기에 대답은 이자벨이 했다.
“사방에서 괴물들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 압도적인 무력만큼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없죠. 그들에게 있어 당신은 구원자이자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뒤를 따르기에 충분해요.”
“타당한 말이군. 벨로크 님이라면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시니까.”
“얼굴에 금칠들을 해주는군.”
아델마저 쫑알거리자 짧게 답한 벨로크가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입안을 파고드는 씁쓸함과 함께 식도를 타고 넘어간 독주가 몸을 화끈하게 데웠다.
그는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코올을 아무리 섭취해봤자 오히려 몸의 체온을 떨어트릴 뿐이라는 것도 안다. 눈속임일 뿐이지. 그들이 내게 갖는 환상 또한 마찬가지. 벨로크는 텅 비어버린 술병을 바닥에 던졌다.
“나는 영웅이 될 생각이 없다. 그들을 이끌 생각도 없고 말이지. 못 따라오면 버릴 거다. 보모 노릇은 사양이니까.”
카라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이 매정한 사내 같으니. 하지만, 너의 그런 사고방식··· 난 나쁘다고 생각 안 해. 저들이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심으로 우리 뒤를 따를 리가 없잖아? 하루아침에 없던 게 생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우리 곁에 붙어서 안전을 도모하겠다는 속셈이겠지. 그러니까 우리도 이용해주면 되는 거야. 방패로 써먹든 함정 해제로 써먹든 말이야.”
카라는 우리라는 단어에 힘을 팍 주면서 말했다. 카라의 얼굴은 이제 머리칼만큼이나 시뻘게져 있었다. 벨로크는 느슨하게 풀려있는 그녀의 어깨를 한 번,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는 아델의 얼굴을 한 번, 흥미로운 표정을 지은 채, 귀를 쫑긋거리고 있는 이자벨을 한 번 바라봤다. 그가 말했다.
“그래, 이런 세상이지. 서로 간에 이용해먹으려 드는 세상.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는 동료들을 챙기는 것만 해도 벅차군.”
카라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방안이 다 울릴 정도로 요란했으며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동안 생각해왔던 거긴 한데. 너는 참 이상해. 기사로서의 명예라고 해야 하나? 사고방식? 이런 게 조금 남들과는 다른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들을 대하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 명령을 내리는 것 같으면서도 배려해주고··· 남의 얘기도 곧잘 듣지. 그리고 친절하고··· 또.”
얘 취한 거 같은데? 카라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리자 아델이 그녀의 팔뚝을 짝 쳤다. 화들짝 놀란 카라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악! 왜, 왜?”
“어디서 주책이냐. 지금 벨로크님에게 꼬리치는 거냐?”
“아니, 난 그냥···”
카라는 한숨을 푸후 내쉬었다. 이윽고 양손으로 얼굴을 쓸더니 고개를 팍 숙였다.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고 싶었어.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차가운 지하감옥에서 조리돌림이나 당하다가 뼈를 묻었을 테니까.”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투명한 실선 몇 개가 주르륵 흘렀다.
“너! 이 울보가···”
아델이 당황해서 그녀를 달래고, 이자벨은 눈동자에 호선을 그리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남우는 걸 보고 웃는다고? 역시나 이 여자도 정상은 아닌데. 벨로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때. 이자벨이 말했다.
“당신들의 유대감. 정말이지 보기 좋네요. 서로를 위한다는 게 진정으로 느껴져요. 상명하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게 동료라는 거죠.”
“왜? 우리 파티에 끼고 싶나?”
“어머. 전 이미 이 파티의 길잡이이자 활잡이가 아니었나요?”
이자벨의 너스레를 벨로크는 무표정하게 받아넘겼다.
“글쎄, 견습이라고 해두지. 너는 어차피 가야 할 곳이 있지 않나? 왕국에 퍼진 역병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면서?”
“제 생각에 당신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역병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나저나 견습이라··· 그렇게라도 생각해줘서 고맙네요.”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긍정하다가 다시금 물었다.
“이 견습 딱지는 어떻게 하면 땔 수 있죠?”
벨로크는 농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녀의 초록색 눈은 진지하게 반짝였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렇게 열정적이야? 정말 우리들을 따라다니면 역병에 대해서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도망치고 싶은 걸 수도 있다.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의무감이란 것들에게서. 그러고 보니 군인이라고 했지. 군대 일이 힘들어서 때려치우고 싶은 걸 수도 있겠군. 그쪽 바닥이 어지간히 더러워야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취했거나.
벨로크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땔감을 안 넣어서 그런가. 모닥불의 기세는 한껏 약해져 있었다. 그 위에 있는 수프 냄비 또한 굶주린 일행의 배를 채우느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 달래는 소리, 재촉하는 요정의 음성.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숙련된 괴물 사냥꾼들이라고 해도 술과 모닥불만 있으면 고해성사를 멈출 수 없는 모양이군.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이번 여정에서 살아남는다면 정식단원으로 승격시켜주도록 하지.”
“대악마가 죽는 날이 저의 진급식이 되겠군요. 좋아요. 기대하고 있도록 하죠.”
이자벨이 경례를 하며 환하게 웃었고, 벨로크 또한 피식 웃었다. 일행의 얼굴에 깔린 피로감은 눈 녹듯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타닥거리던 모닥불이 잔불만이 남고, 도란거리던 말소리마저 사그라들었을 때. 그들은 뭉그적거리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하늘은 붉었고, 주위는 어두컴컴했지만, 일행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다시 악마들과의 드잡이질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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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은 피그오 남작이었다. 그는 두툼한 모포를 깔고 집 안에서 자고 있다가 벨로크 일행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눈동자를 굴리며, 따라붙었다.
그를 시작으로 사제. 용병, 기사, 병사까지 남은 원정대원들 전부가 눈을 비비며 일행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잠시 후, 수백 명의 무장병들이 네 사람의 꽁무니를 따르기 시작했다.
갑옷이 철그렁거리는 소리, 로브 자락이 바닥을 가르는 소리, 용병들의 한탄과 욕설, 병사들이 수통을 열어 물을 꿀꺽거리는 소리까지 수많은 잡음들이 폐허 마을을 요동시켰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피어나는 흙먼지를 보던 카라가 피식 웃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올 거랬잖아.”
“소란스럽군.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사방에 알리는 꼴이야. 저놈들을 어떻게 다룬다?”
벨로크가 귀찮게 됐다는 식으로 얘기하자. 아델이 나섰다.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제자리에 뚝 멈췄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부라리며 몇 명의 병사들을 꼬집었다.
“너! 그리고 너! 이리 와라.”
“예··· 예! 부르셨습니까!”
“너희들은 지금부터 정찰대다. 우리들보다 한발 앞서 이 근방을 둘러봐라. 그리고 특이사항이 나타나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해라.”
“···”
그들을 이끌던 선임병도 아니고, 아예 소속이 다른 기사가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은 망설였다. 아델은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왜 말이 없나? 너희들이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버리고 갈 것이다. 나의 주인이신 벨로크님은 실로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겁쟁이들에게까지 손길을 내밀 만큼 너그럽지는 않으시니까. 자. 어떻게 할 테냐?”
병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아델의 치켜떠진 눈매와 벨로크의 거대한 대검을 바라봤다. 특히나 거뭇한 기운마저 뿜어내는 날붙이에 시선을 더 오래 뺏겼다. 저 칼날에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죽었던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병사들은 큰소리로 외쳤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당장 움직여!”
“예!”
병사들이 후다닥 자리를 박찼다. 이윽고 그들은 폐허가 된 마을을 염탐하며 주위를 살폈다. 언제나 시작이 어려울 뿐이었다. 한두 명이 명령을 따르기 시작하자, 곧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일행에게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 어디서나 다수의 품에 있고 싶어 하지 소수가 되어 떨어져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하물며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라면야 더더욱. 아델의 협박과 회유를 지켜보던 카라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좀 놀랍네. 저 바보들을 이렇게 자유롭게 다룰 줄이야.”
“역시 기사 출신답네요. 대단한 용병술이에요.”
이자벨또한 감탄하자 벨로크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하 하나는 잘 뒀다니까. 오합지졸이던 원정대는 단 네 명의 사람에 의해 점점 하나로 뭉쳐지고 있었다. 그 순간. 큰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전령! 저··· 전령!”
아까 전 아델이 정찰 임무를 내보냈던 그 병사였다. 동료들은 어디로 간 건지 온몸에는 피가 가득 묻어있었고,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슨 일이냐.”
아델이 묻자 병사는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그, 근처의 해골산에서 붉은 악마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웬 검은 피부의 요정하나가···”
“왔군.”
한 손을 들어서 병사의 횡설수설을 막은 벨로크가 검을 뽑아 들었다. 곧이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여러 가지 괴성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고개를 올렸다.
수십을 넘어 수백은 될 것 같은 피막 날개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수놓으며 날아들고 있었다.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자벨이 눈가를 찌푸렸다.
병사의 말대로 제일 선두에 있는 악마의 등 뒤에는 웬 요정 하나가 타고 있었다.
“그때 여사제가 말했던 흑요정이 저자로군요! 악마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녀석 같으니!”
“괴··· 괴물!”
“노··· 놈들이 나타났어! 게다가 저 숫자는 대체...!”
“이 병신 같은 새끼들이! 모두 무기랑 방패 들어! 그리고 하늘을 주시해라!”
아델이 겁에 질린 병사들에게 호통치며 엉덩이를 걷어찰 때. 날아오던 악마들 또한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이윽고 위협이라도 하듯 원정대의 머리 위를 천천히 날아다녔다. 놈들의 짐승 주둥이가 열렸다.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심약한 몇몇이 오줌을 지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 다른 몇은 소리를 지르면서 대열을 이탈해 도망쳤다. 그럴수록 악마들의 괴성을 더욱 커졌고, 날갯짓은 격하게 커져만 갔다.
“이놈들이!”
이자벨이 석궁을 탕 쐈지만, 악마들은 화살이 닿지 않는 범위내에서 날아다니며 그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흑요정의 입가 미소가 짙어졌다. 벨로크의 눈에는 그 건방진 낮짝이 보였다. 이 새끼가? 그는 검을 바닥에 턱 꽂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땅바닥을 한 번 쓸었다. 마침 적당한 크기가 손에 잡혔다.
“잠깐, 너 설마···”
주문을 외우던 카라가 당황스런 미소를 지을 때. 벨로크의 어깨가 흐릿하게 움직였다. 파공성이 울리고, 악마들의 대가리가 퍽 터졌다. 흑요정은 웃고있던 얼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덤벼라.”
면갑을 철컥 올린 그가 검을 집어들고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