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악마성
일행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느새 다가간 건지 이자벨이 끓어오르고 있는 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카라의 표정이 구겨졌다. 저 안에 뭐가 담겨있을지 예상이 갔으니까.
“네 입으로 말했잖아. 수프 끓여 먹는 마녀라고. 그거 들춰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게 빛나고 있어서···”
이자벨은 떠듬거리면서 말했다.
“응?”
그녀의 말에 호기심이 동한 카라가 가까이 와서 솥을 살폈다. 짐승의 얼굴이나 해골이 새겨진 표면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카라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인신 공양, 방금 전에 노파가 보여주었던 강력한 주문, 스프, 이윽고 그녀가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충 예상이 가. 이건 마법이 걸린 솥이야. 그것도 꽤나 사특한 종류로군.”
마법 냄비라고? 호기심이 동한 듯 벨로크와 아델 또한 다가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자 슬쩍 미소지은 카라가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촉매라는 게 있어. 마법을 사용할 때. 함께 사용한다면 주문의 위력을 강화시켜주는 거지. 이건 그 촉매를 만들어주는 솥 같아. 물론 그 재료는 너희들도 알다시피···”
말끝을 흐린 카라가 아직까지 끓어오르고 있는 솥을 발로 쾅 찼다. 냄비가 넘실거리며 안에 담겨있던 희생자들의 모습이 조금 드러났다. 로브 자락을 들어서 입가를 가린 카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먹어 치워서 주인에게 힘을 보태주는 마도구라니··· 그야말로 끔찍한 괴물이군. 이건 정화한다고 해서 쓸 수가 없겠어. 당장에 조각내버려야 해.”
카라는 신랄한 독설을 내뱉었지만, 벨로크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 가지 감정을 읽었다. 아깝다는 기색이었다. 요컨대. 마법사로서의 탐욕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재빨리 사라져 다시 또렷한 갈색 눈으로 되돌아왔다.
벨로크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에 떳떳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다들 제각각의 이유로 손에 피를 묻혔으니까.
그녀가 정신이 나가서 저 냄비를 끌어안고 제물 조금만 바쳐보자고 말한 것도 아니고. 어찌 됐든 훌륭하게 절제를 하지 않았나? 저 정도면 굉장한 인격자였다.
다만 그가 아쉬운 것은 이 악마라는 놈들이 가진 것이 쥐뿔도 없다는 것에 있었다. 경험치를 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밖에는 쓸모가 없다. 금붙이나 보석도 없고, 주문서도 없다. 마법이 걸린 물품은 사특한 주문이 걸려서 쓰지도 못한다. 거지같은 놈들.
벨로크는 저주받은 솥을 쾅 걷어찼다. 냄비가 바닥을 텅 구르고, 검붉은 스튜와 덜 녹은 잔해들이 바닥에 주르륵 흘렀다. 그 역겨운 모습에 세 사람이 구역질했다.
벨로크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묵묵한 표정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강하게 내려찍었다. 불길한 기운을 흩뿌리던 도구가 쩍 갈라졌다. 표면에서 흐르는 요상한 빛도 잠잠해졌다.
벨로크는 검을 휙 털고, 등에 멨다. 그가 떠나자고 말을 하려는 찰나. 주위가 부스럭거렸다. 동료들 역시 미련이 남았는지 죽은 노파의 품이나 그녀가 기거하던 오두막집을 뒤지고 있었다.
그는 희망을 조금 품었다. 그래, 숨겨둔 보물상자나 여러 가지 신비한 물품들이 있지 않을까? 그래도 마법사의 집인데? 벨로크 또한 한 팔 거들었다.
“별 게 없네요. 해골 조각상이나, 인간 박제상 같은 거 말고는···”
“마땅한 건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자벨과 아델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독초 몇 개를 건진 게 끝이야. 독극물이나 만들어볼까?”
카라 또한 시답잖은 소리를 했다. 벨로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악마들을 쳐 죽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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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빠져나오자, 황량한 땅이 일행을 반겼다.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공간이었다. 벨로크는 슬쩍 눈을 돌렸다. 이리저리 박살 난 풍차들과 무너진 집들, 양팔을 벌린 해골들이 허수아비처럼 박혀있는 논밭들이 보였다.
그가 보기에 이곳은 폐허였다. 그것도 무너진 지 꽤나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카라 또한 주위를 경계하면서 중얼거렸다.
“저것들이 이 곳을 둘러싸고 있어.”
전에 봤던 거대한 해골산들이 폐허가 된 마을을 둘러싸듯 감싸고 있었다. 초목 대신 시체에 둘러싸인 거주지라 이것 참 신박하군. 벨로크는 옛날 공포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을 떠올렸다.
기묘한 마력을 발하는 붉은 달과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땅. 그 속에서 기어 나오는 괴물들. 늑대인간? 이리저리 꿰맨 누더기 시체? 이번에는 어떤 괴물들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을까? 상념과 함께 걷고 있을 때. 그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수십? 아니, 수백 명이었다. 살아있었군. 이자벨 또한 귀를 쫑긋거리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매고 있던 석궁을 꺼내 들더니, 시위를 당겨 재빨리 화살을 메겼다. 장전된 석궁을 든 요정이 외쳤다. 일행에게 말할 때와는 달리 서늘한 눈빛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
-이 거리에서 알아챈다고? 악마가 아닐까 싶소만?
-생긴 걸 보면 요정이오. 귀쟁이들이 눈하고 귀가 좋다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요. 남작.
-뭐라? 자네. 지금 나를 무식하다고 돌려서 얘기한 것 같은데? 나는 만약을 대비하자는 얘기였네.
-저자들. 숲에서 나왔어요. 몸에 묻은 핏자국들을 보세요. 괴물들을 무찌르고 빠져나온 걸지도 몰라요.
-검은 갑옷에 대검이라고? 잠깐··· 그 괴물기사요! 성문도 박살냈다는 그 기사 말이오!
-그렇다면 인간이란 말이군!
웅성거림이 커졌다. 벨로크와 이자벨의 귀에는 다양한 얘기들이 들려왔지만, 두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수상한 기척을 느꼈을 뿐이었다.
아델이 검을 뽑았고, 카라가 지팡이를 들었다. 눈동자에 안광이 번뜩이며, 내면에 있는 주문을 뿜어낼 준비를 했다. 이자벨은? 그녀는 구멍 뚫린 집을 향해서 대뜸 석궁을 쐈다.
쐐애액
화살이 나무 등지에 퍽 박히고,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위협사격이었다. 내 주위에는 다 이런 여자들뿐이군. 벨로크가 그녀의 거침없는 성미에 감탄할 때쯤. 이자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금 화살을 메겼다. 그녀가 재차 소리쳤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몸에 바람구멍이 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모습을 드러내!”
“자, 잠깐 쏘지 마시오! 우리는 인간이오! 당신들이랑 같은 인간이란 말이오!”
누군가가 크게 외치며 튀어 나왔다. 통통한 몸매에 보석으로 장식된 검을 들고있는 중년인이었다. 이윽고 그를 필두로 폐허 속에 숨어있던 인간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법복을 입은 사제, 경무장한 용병이나 병사,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나 성기사 등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다들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아까 전의 그 뚱뚱한 귀족이 말했다.
“이, 이보시오. 일단 무기를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우리는 같은 편 아니오?”
벨로크를 제외한 세 사람은 여전히 무기를 꼬나쥐고 있었다. 아델이 코웃음을 쳤다.
“쥐새끼처럼 숨어있던 당신들의 뭘 믿고? 혹여 악마의 하수인 일지도 모르지 않나?”
“그건··· 다 사정이 있어서 그랬소. 붉은 털의 악마가 습격해온단 말이오. 게다가 우리 또한 당신들을 못 믿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소? 악귀들이 가득한 공간에서 느닷없이 사람들이 나오니까 말이오!”
맞는 말이었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도 있었으니까. 이윽고 이 의심은 아델과 상대측의 사제들이 성력을 뿜어내자 사라졌다. 어둠을 따르는 악귀들이 신의 힘을 사용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셀레네여. 실로 어마어마한 힘이군요. 혹여, 태양신의 대전사가 아니신지?”
“이 불꽃 틀림없어요. 대전사님이군요! 전사시여. 대주교님을 보셨나요?”
그 외에도 각양각색의 신을 따르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아델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들을 이끄는 자들은? 벨로크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사람들은 띄엄띄엄 선 채, 그들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갑옷이나 옷에 새겨져 있는 문양들 또한 제각기 달랐다. 이자벨이 속삭였다.
“제가 숲에 떨어졌을 때하고 똑같아요. 대악마의 마법 때문에 다들 각자의 집단에서 떨어져 뿔뿔이 흩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자벨이 말끝을 흐리자, 벨로크가 말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이 손발 잘린 오합지졸들이란 말이군.”
“맞아요.”
이자벨이 뻣뻣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 친구들을 어떻게 한다... 그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서로 대책을 세워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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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풍채에 사람 몸통만 한 대검, 화려한 문장 갑옷을 입은 기사가 소집령을 내렸다. 일견, 오만한 명령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식량이 떨어져서 말라죽거나, 괴물들에게 잡아먹힐 뿐이니까.
그렇다도해고 수십 혹은 수 백명끼리 만담을 나눌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직업별, 혹은 지위별 대표자들만 한 곳에 모였다.
다 잡아먹히거나 떨어져 나가서 부하가 셋만 남아버린 베테랑 용병대장, 명예를 찾아 갓 상경한 촌뜨기 기사, 병사하나 없는 귀족, 시퍼렇게 젊었지만 성력하나만은 뛰어난 사제 등이었다.
“이렇게 축축한데 불이 붙겠나?”
“위대한 마법의 힘이라면 안 될 게 없지.”
썩어빠진 집의 바닥을 부숴서 장작을 만들어낸 아델이 빈 공간에 툭 던졌다. 카라가 주문을 외우며 불꽃을 일으켰고, 한순간에 모닥불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털썩 앉았다.
벨로크는 어깨에 대검을 기대어 놓고는 손질을 시작했다. 아델은 주인의 갑옷에 묻은 피딱지들을 열심히 털어냈다. 카라는 마도서를 펼쳐서 새로운 주문을 익혔으며, 이자벨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새롭게 얻은 석궁의 시위를 점검하고 있었다.
일행의 태연한 모습에 원정대의 대표들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저들은 지금 상황이 긴장도 안 된단 말인가? 당장에 이 문을 열고 괴물들이 습격해올 수도 있는데?
그 순간. 깨진 창문 너머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모닥불이 일렁거렸고,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진 음영 또한 꿀렁거렸다. 한 사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 전의 콧수염을 기른 뚱뚱한 귀족. 피그오 남작이었다. 그가 말했다.
“이 지옥 같은 땅에 발을 들이민지 몇 시간이나 지난 건지 모르겠소. 나는 게오르그 공작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것뿐이오. 내가 왕에게 칼을 뽑지 않았다면, 그 욕심 많은 돼지가 내 성을 불태우고, 재산을 강탈해갔을 테니까. 하지만, 이딴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이런 지옥 같은 곳에 떨어질 줄 알았다면 차라리 성문을 걸어 잠그고, 공작의 부하들하고 칼을 맞댔을 텐데.”
말을 마친 남작이 고개를 처박았다. 이어서 몸 여기저기 흉터자국이 가득한 사내도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젠장. 내가 미쳤지. 돈에 눈이 멀어서 이런 사지로 들어오다니, 내 용병 짬밥이 이십 년이 넘어가는데. 사지도 이런 사지가 없수다. 달이 반짝이니 땅에서 관이 샘솟지를 않나, 나무에 목매달려 있던 시신이 벌떡 눈을 뜨더니 부하들을 찢어버리지를 않나. 이제는 하늘에서 웬 빨강 악마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잡아가기까지···!”
“셀레네여··· 이것이 정녕 당신의 뜻입니까? 이것이 거룩한 성전입니까?”
모닥불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열기와 주위를 둘러싼 어둠이 사람들을 취하게 만든 걸까? 그들은 하나같이 울먹거리며 고해성사를 해댔다. 벨로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원하는 대책 회의는 이런 감성 토로의 장이 아니었다.
귀족은 날카롭게 혀를 놀리며, 주변 지형이나 괴물들의 정보를 뱉어야 했다. 용병이나 기사는 황금과 명예를 위해 언제든지 검을 들 수 있어야 했다. 새하얀 법복을 입은 광신도들은 모시는 신을 위해 제 한 몸 바칠 줄 알아야 했다.
그래, 이들 모두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악마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꼴은 뭔가? 너무나 한심하지 않은가? 이 치들은 여기 내버려둔 채, 우리끼리 떠나야 하나? 평범한 사람이 아닌, 괴물 도살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아델이 코웃음을 쳤다.
“아까부터 봤지만, 한심하군. 겁에 질려서 벌벌 떨 뿐이라니.”
“누가 아니래? 수백 명이 모이면 뭐 해? 하나같이 구석에 박혀 있는데.”
“당신들 손에 들린 건 장난감인가요? 악마도 찌르면 죽는 생물이에요. 언데드는 머리를 박살내면 되구요.”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겁에 질려있던 이자벨이 이번에는 당당하게 말했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급변한 그녀의 태도가 재밌어서였다. 이자벨 역시 말하고나서 아차 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시뻘개진 얼굴로 석궁을 매만졌다.
이를 들은 남작이 열변을 토했다.
“우리라고 놈들하고 안 싸워봤겠소? 싸웠소. 검을 뽑아 들고 용맹하게 덤벼들었단 말이오! 하지만, 저 괴물들은 그런 우리를 농락하고 잡아먹었소!”
글쎄. 그렇다고 보기에는 당신의 몸과 그 검은 좀 안 맞는 느낌인데.
키르르륵!
그 순간.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쇠로 긁는 듯한 괴성이 울렸다. 여러 개였다. 벨로크 일행을 제외한 대표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숙였다. 그들이 겁에 질려서 소리쳤다.
“그놈들이다! 그놈들이 나타났어!”
“시, 시벌. 이번에는 누구를 물어가려고!”
벨로크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헬레나의 성기사와 붉은 머리 마녀, 허세부리는 요정 또한 스윽 일어났다. 이를 본 남작이 화들짝 놀랐다.
“어, 어디들 가시오?! 어서 이리 와서 숨으시오! 당신들의 칼솜씨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저 괴물들을 죽일 수는···”
벨로크는 남작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에 매고 있던 검을 휙 뽑았다. 수많은 악마들의 피를 머금은 날붙이가 흉흉하게 빛났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묵직함과 함께 기사는 발걸음을 옮겼다. 모닥불이 멀어지고, 부츠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그가 한 마디 던졌다. 차가울 정도로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천국은 없소.”
네 사람은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