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악마성
집채만 한 기둥이 우지끈 쓰러지고, 악의 가득한 시퍼런 눈이 광채를 잃었다. 거인을 상회하는 압도적인 근력과 초월적인 강도를 지닌 대검이 만나 벌어진 놀라운 일이었다.
괴물의 주름진 절단면에서는 톱밥과 수액 대신 검붉은 피가 콸콸 치솟고 있었다.
새끼. 생긴 것만큼이나 끔찍하네. 벨로크는 검을 쓱 털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 번 쳐다봤다.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그 영감탱이 이걸 대체 뭐로 만든 거지? 역시나 악마의 피 때문인가? 벨로크는 짧은 상념을 끊었다. 이윽고 재빨리 뒤돌아서 검을 휘둘렀다.
궤적에 걸린 버섯 괴물 하나가 반으로 토막 나며 나뒹굴었다. 또다시 끈적한 피가 튀며 그의 갑옷에 짙은 훈장을 남겼다.
슬쩍 시선을 올리자 흰색과 붉은색으로 뒤섞인 배경에 다른 색 하나가 끼어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음침한 색과는 다른 선명하고 깨끗한 색이었다. 태양신의 불꽃이었다.
“여신이여!”
아델이 화염검을 휘두르면서 날아드는 망령들을 조각내고 있었다. 열기 때문에 숲이 불타오르자 카라는 얼음창을 던져대며 그것을 진화하고 있었다.
이자벨은? 그녀는 평범한 쇠붙이가 망령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지. 아델의 주위에 서서 얌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날 보고 있어? 벨로크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어주었다.
그 순간. 초록색깔 눈이 커졌다. 그녀가 허공을 짚으며 뭐라 소리 질렀다. 벨로크의 귀에는 그게 들렸다.
“위, 위! 피해요!”
벨로크는 슬쩍 고개를 올렸다. 희뿌연 피부를 가진 여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치렁거리는 머리카락과 실핏줄이 터진 눈, 귀까지 찢어진 입까지, 망령이었다. 그녀가 큼직한 입술을 떠듬거렸다.
-원한을··· 풀어야겠다. 나에게 육신을···
한순간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망령이 벨로크에게 팔을 뻗었다.
오래전, 죽어버린 그녀에게 있어서 저 뜨거운 육체는 어둠 속의 등불과도 같았다. 가지고 싶다. 내 것으로 만들어···
-끼이이악!
시로도록 차가운 팔이 기사의 갑주에 닿은 순간. 스파크가 튀며 망령이 튕겨 나갔다. 영혼마저 뒤흔드는 고통에 망령의 몸뚱이가 한층 더 흐릿해졌다. 녀석이 고개를 들었고, 벨로크가 면갑을 철컥 올렸다.
심연처럼 어두운 칠흑색 눈동자가 타락한 영혼을 주시했다. 그 무심한 눈을 마주한 순간 망령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티끌만큼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포식자를 눈앞에 둔 사냥감처럼··· 망령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휘둘러진 검이 영혼을 가르고 바닥마저 부숴버렸으니까.
“이봐요! 괜찮아요?”
혹여 그가 빙의되었다고 생각한 이자벨이 호들갑을 떨었고, 아델이 다급히 다가왔다. 그녀가 벨로크의 갑옷무새를 매만지며 걱정스런 시선을 던졌다.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다.”
벨로크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망령의 손길은 실제로 그에게 아무런 타격 하나 입히지 못했으니까. 고대의 유산인 문장 갑옷 덕분일까? 아니면 한층 더 레벨이 높아진 ‘투지’스킬 덕분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 몸뚱이의 정신력이 그만큼 강해진 것일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그가 위험을 느낀 일은 없었다. 그저 새로운 괴물들이 준 경험치를 슬쩍 확인했을 뿐이다. 숫자가 깡패였을까? 레벨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희들도 고생했다.”
아델의 어깨를 툭툭 쳐준 벨로크가 바닥에 있던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연기 때문에 몇 번 기침을 한 카라가 말했다.
“뭘 하려고? 아직 남아있는 놈이 있어?”
“숨어 있는 놈이 하나 있군.”
벨로크는 손에 들린 돌을 툭툭 튕기며 몸을 돌렸다. 그의 두 눈이 어둠에 잠긴 숲속을 주시했다. 얄상한 가지위에 앉아서 깃털을 정리하고 있는 생물이 하나 보였다. 평범한 까마귀였다. 하지만 붉게 빛나는 눈으로 빈틈없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저 작은 미물에게서 음습한 꿍꿍이를 느꼈으니까. 그의 시선을 눈치 챈 걸까. 녀석이 날개를 푸드득 거리며 날아오르려 했다.
그 순간, 벨로크의 어깨가 흐릿하게 움직였고, 빛처럼 쏘아진 투사체가 까마귀를 퍽 터트려버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날개들을 확인한 벨로크가 손을 털자. 이자벨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방금, 뭘 한 거죠? 돌을 던진 건가요? 그, 숨어있는 녀석을 죽이기 위해서?”
“죽였다. 웬 새 한 마리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더군.”
어둠 속을 꿰뚫어 본 것도 모자라, 돌맹이 하나로 저런 위력을? 여전히 괴물 같은 사내로군. 말문이 막힌 이자벨이 입을 닫았고, 아델은 주인의 갑옷에 묻은 살점을 털어대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서서 벨로크의 말뜻을 곰곰히 되짚어보던 카라가 입을 열었다.
“훔쳐보는 새? 퍼밀리어 주문인가···”
“그게 뭔데?”
벨로크가 묻자, 카라가 다시 말했다.
“새나 작은 짐승을 길들여서 마법사의 눈으로 사용하는 주문이야. 수정구로 엿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은밀히 상대를 염탐할 수 있지. 다만 생물체에 눈을 부착한다는 건 그 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해. 피조물과의 연결이 갑작스럽게 끊기면 술자도 큰 타격을 받거든. 그래서, 웬만한 마법사들은 생물체에게 눈을 함부···”
카라의 말이 길어지려 하자, 벨로크가 이를 끊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이 숲에 마법사가 있다는 거군?”
카라는 눈을 힐끔 떴지만,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이자벨이 말했던 사람으로 수프 끓여 먹는 마녀의 짓거리가 아닐까?”
“당신 말이 맞을 거에요. 그 여자, 아니 그 괴물은 사람들이 어디 숨어있던 손쉽게 찾아내더군요.”
과거를 회상한 이자벨이 침음성을 흘렸고, 벨로크는 검을 집어넣고는 고갯짓했다.
“카라. 네 말대로라면 지금 그년은 큰 타격을 받았을 테니. 이 틈에 숲을 빠져나가도 될 것 같은데.”
“퍼밀리어 주문이 끊겼을 때. 술자가 입는 타격은 피조물이 생전에 받았던 고통과 어느 정도 비례해. 아마 그년은 지금쯤···”
자신도 당해본 적이 있는지. 말끝을 흐린 카라가 몸을 떨었다. 이윽고 씨익 웃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에 바닥을 구르며 발광하고 있을걸? 네 의견에 나도 동의해. 어서 빠져나가자.”
불타고 찢어진 괴물들의 시신과 흩뿌려진 피와 내장, 녹다 만 얼음, 연기가 피어오르는 수풀을 뒤로한 채, 일행을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듣지 못했지만, 숲의 깊은 곳에서는 때아닌 비명이 울리고 있었다.
“끄으으으!”
두툼한 몸체를 가진 거구의 노파가 배를 부여잡았다. 이윽고 침까지 흘려가며 바닥을 굴렀다. 오래된 나무집이 끼이익 소리를 지르고, 그녀의 몸과 부딪친 가구들이 박살났다.
평소에 그녀가 아끼던 사람 두개골로 만든 잔이나, 박제된 인간조각상 같은 것들도 와르르 깨졌지만, 노파는 개의치 않은 채 발광했다.
“미친, 기사 놈이! 죽인다. 죽여버리겠어!”
대악마의 하수인이자 그분의 정원을 관리하는 노파는 상처받은 자존심과 고통에 한참이나 씩씩거렸다. 이윽고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옅게 심호흡을 한 노파가 집 문을 열어젖혔다.
넓게 펼쳐진 마당 아래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 위에는 거대한 솥 하나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노파의 일그러진 얼굴이 조금 호선을 그렸다. 맛있게 익어가고 있는지 볼까? 그 순간. 비명이 울렸다.
“사, 살려줘! 제발!”
“아아아악!”
노파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솥 앞으로 다가와 살펴보자, 반쯤 녹아내린 팔이 솥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를 킁 풀고는 바닥에 놓인 국자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콱콱 찔러넣기 시작했다.
부들거리던 팔이 솥 안으로 쑤욱 들어가고, 검붉은 국물이 흘러넘쳤다. 욱욱하는 신음과 함께 비명소리 또한 더 커졌다. 노파의 광대가 하늘로 치솟고 미소가 짙어졌다.
“익은 것 같은데.”
국자를 넣어서 스프를 한 바가지 푼 노파가 입을 가까이 댔다. 맛이 아주 좋았다.
부글거리던 마음 역시 조금은 가라앉은 듯했다. 손에 들린 국자로 거대한 솥을 쿵 친노파가 킬킬거렸다.
“네놈들의 육수는 무슨 맛일까 기대되는구나.”
국자를 툭 집어 던진 노파가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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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품처럼 쌓아놓은 뼈 무더기가 쿠릉 흔들렸고, 통째로 벗겨져 나무에 걸려있던 인간 가죽도 나풀거렸다. 전부 다 숲을 헤매는 네 명의 인간들이 일으킨 소란이었다.
일행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계속해서 걸었다. 떨어지는 달빛 아래로 그들의 면면이 휙휙 지나갔다. 피와 살점에 푹 젖어 악귀처럼 보이는 형상이었다. 당장에 인근 영지로 내려간다면 수배령이 떨어질 정도였다. 그런 악귀 중 하나가 말했다. 탁한 금발 머리의 요정이었다.
“출구가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보세요. 달빛이 점점 더 들어오고 있잖아요?”
숲이 옅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좋은 소식이군.”
짧게 답한 흑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배를 찔린 망령 하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아델은 침을 퉤 뱉고는 냅다 발길질했다. 카라에게 달려들던 거미 하나가 으직 소리를 내며 뭉개졌다. 카라가 기겁했다.
“으, 벌레라니 너무 싫어.”
산채로 사람을 태워 죽인 여자가 할 소리는 아닌데. 아델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벌레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마라.”
“고작? 말도 안 되는 소리! 저 끔찍한 흉물을 봐! 꿈틀거리는 다리랑 눈 좀 보라고! 그야말로 지옥에서나 나올 법한 역겨운 생물...”
아델은 말없이 한 쪽 손을 들어 올렸다. 더 말하면 엉덩이를 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칭얼거리던 카라가 입을 꾹 닫았다. 말 잘 듣네. 어지간히 아팠나 보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벨로크의 감각에 뭔가 걸렸다. 많았다. 낌새를 차린 이자벨이 발걸음을 멈췄을 때.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떠나기 전, 환영 인사를 준비한 모양인데.”
“우회할 수 있을까요?”
“아니, 사방에서 오고 있다.”
이자벨의 말에 고개를 저은 벨로크가 그녀를 뒤로 보내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에 어둠 속을 꿰뚫고 다가오는 형체들이 보였다. 무언가 이상한데?
허리를 숙인 벨로크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 몇 개를 주웠다. 뒤편에 있던 카라가 주문을 외웠다. 떠오른 광구가 주변을 비췄다. 그제서야 일행은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수풀과 나무, 바위 사이로 병장기를 손에 든 인영들이 철그럭 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이곳에 떨어진 병사들이었다. 아델이 소리쳤다.
“원정대? 이보시오. 멀쩡하오?”
그에 화답하듯 비틀거리면서 다가오는 한 기사가 입을 열었다.
“도, 도와주시오. 우리는··· 끅.”
사내의 머리가 수박 깨지듯 퍽 터졌다. 벨로크의 투석 때문이었다. 카라가 기겁했다.
“벨로크?! 대체 왜···?”
벨로크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의 손잡이를 꾹 움켜쥐고는 다가오고 있는 인간들을 노려봤다.
“악취미군. 배 속에 넣어둔 건가?”
그 순간. 머리 잃은 사내의 시체가 부들거렸다. 이윽고 배가 부풀어 오르더니 콰득 터졌다. 쏟아지는 피와 내장 사이로 얄상한 다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유를 되찾은 녀석이 몸을 부르르 털자, 네 쌍의 컴컴한 두 눈이 달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키이이이
시발. 저게 왜 저기서 튀어나오는거야. 카라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지팡이를 꾹 쥘 때. 숲 안쪽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걸걸한 노인네의 음성이었다.
“넣어둔 게 아니라, 스스로 움직인 거지. 유령거미는 숙주의 뇌를 파먹으면 알을 까기 위해 배속으로 가거든.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지? 말투도 습성도 생전의 그 기사와 일치했는데?”
원흉이 등장하셨군. 수프 끓여 먹는다는 그 괴물인가? 벨로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심장 소리가 안 들리더군.”
“수십 보 앞 생물체의 고동 소리를 듣는다고? 웃기지도 않는구나! 한낱 칼잡이 놈이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군.”
목소리가 킬킬 거렸고, 돌아가던 벨로크의 고개가 우뚝 멈췄다. 무채색 두 눈이 시꺼먼 숲 속을 주시했다. 그래, 거기 숨어 있었군.
“잘 들리고, 잘 보인다. 네년의 그 얼굴도 말이지. 기다려라. 이 매부리코 괴물아. 지금 대가리를 쪼개줄 테니까.”
피식 웃은 벨로크가 손을 뻗었다. 어깨가 흐릿 움직였고, 어둠 속에서 찢어질 듯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