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악마성
대체, 레벨업이란 게 뭔데? 카라는 고대의 언어 같은 요상한 단어에 대한 지적 대신 다른 말을 던졌다.
“우리가 저놈들을 뚫고 갈 수 있을까?”
성 주위에도 깎아지른 절벽들이 즐비했다. 오직 구불구불한 외길만이 저 성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리고 그 길목에는 방금 전에 봤었던 밀림 같은 숲과 인골 산, 불타는 마을이 있었다.
아델은 이를 악물며 검집을 꾹 쥐었다. 결국,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래에 깔려있는 괴물들과는 필연적으로 부딪혀야 했으니까.
“뚫고 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
벨로크는 어깨에 메고 있던 짐가방의 끈을 꽉 조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슬쩍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여전히 달은 붉었고, 보라색 구름은 상한 내장처럼 꿈틀거렸다.
그 요사스러운 광경은 굳이 무거운 공기만이 아니라, 기묘한 압박감을 일행에게 선사했다.
이런 땅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게 없었다. 괴물들의 영역에서 사람은 살 수 없는 법이니까. 그 순간. 달이 반짝였다. 또다시 땅이 쿠르릉 울리고, 악귀들의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뒤편에 있던 묘지만이 아닌, 그들이 서 있는 땅 아래에서도 들렸다. 벨로크는 쓰게 웃었다. 존나 보채네. 사방천지에서 나오는군. 대체 얼마나 묻어 놓은 거지?
“마치 몰이를 당하는 기분이야. 우리를 계속 쫓고 있어.
카라가 핼쑥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벨로크는 절벽 아래에 있는 숲과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가늠해보고는 말했다.
“도망친다.”
눈치 좋은 아델이 다시금 카라를 업었다. 이제는 기력을 회복했는지 등에 매달린 그녀가 한층 더 격하게 버둥거렸다.
“내려줘! 나도 달릴 수 있어! 나도···”
아델은 뒤편에서 느껴지는 묵직함과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얼굴을 간지럽히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녀가 카라의 볼기짝을 짝 쳤다. 매서운 손길에 마녀가 악. 소리를 내자 아델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얌전히 있어라. 움직이다가 떨어지면 크게 다치니까.”
때려놓고 이렇게 다정하게 말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린 카라가 입을 꾹 닫았고, 두 기사는 쫓아오는 불사의 군대를 피해 달렸다.
괴물들을 마주하면 죽이기나 했지, 도망쳐본 적은 없던 벨로크에게는 나름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들은 빠르게 뜀박질을 해서 절벽 아래의 숲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아델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는 카라를 내려주었다. 벨로크는 중간중간 달려드는 괴물들을 벤 검을 후둑 털었다. 이윽고 그들은 숲의 입구에 쓰러져 있는 사람 한 명을 발견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사람이 아니었다. 귀가 뾰족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쟤가 왜 저기 있어? 치렁거리는 금발 머리와 몸에 달라붙는 가죽 갑옷을 본 카라가 소리쳤다.
“그때 그 요정 아니야? 이자벨이라고 했던가?”
“맞는 것 같군.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동족들이 걸린 역병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며 왕국을 떠돌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나? 일행은 쓰러져 있는 요정에게 다가갔다.
좋은 꼴은 아니었다. 활은 어디다 버려둔 건지 화살통만 매고 있었으며, 몸 곳곳에 생채기와 함께 피 묻은 칼을 손에 꾹 쥐고 있었다. 상황은 명백해 보였다. 숲을 빠져나온 후 힘이 다해서 기절 한 것이겠지. 아델이 물었다.
“깨울까요?”
“그래,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하군.”
그녀의 개인 속사정이든, 저 숲에 대한 정보든 들을 것은 많았다.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이 행동에 나섰다.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아델이 이자벨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키고는 뺨을 때린 것이다.
짜악
요정의 하얀 얼굴이 부어오르고 몸이 인형처럼 흔들렸다. 저 손길이 얼마나 매서운지 아는 카라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자··· 잠깐!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차라리 물을 붓는다거나 아니면 내 마법으로···”
하지만 아델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요정의 뺨을 한 번 더 때리면서 말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식량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그건 너의 주문 또한 마찬가지지. 또 헥헥 대면서 나한테 업힐 셈이냐?”
“그건···”
너는 또 왜 설득당해? 그냥 조심히 흔들어서 깨우면 되지. 카라가 말끝을 흐리자, 이번에는 벨로크가 만류하려 했다. 그 순간.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손이 참 맵네요··· 그래도 우리 이별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났군. 거짓말쟁이 요정.”
아델이 잡고 있는 이자벨의 머리채를 툭 놔주었다. 요정은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다시 바닥에 뉘었다. 어두컴컴한 하늘 사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만남은 짧았지만, 요정 인생사에서 여느 때 보다 강렬했던 그 기억이···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자벨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이것도 운명인가?”
약간 얼빠진 것 같은 그 대답에 당황한 카라가 물었다.
“괜찮아? 살짝 정신이 나간 것 같은데?”
이자벨이 슬쩍 눈을 돌려서 자신이 떨어졌던 숲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 과거를 회상한 그녀가 눈동자를 떨었다. 그 속에 담긴 것은 명백한 공포심이었다. 흐르는 숲과는 비교도 안 되는 괴물들이 저 안에 즐비했으니까.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굴러갔다.
벨로크 일행을 바라보자 흔들리던 초록 눈이 고요를 되찾았다. 그래, 괴물이라면 여기에도 있었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어째선지 마음이 든든했다. 고개를 흔든 이자벨이 한쪽 손을 뻗었다.
“멀쩡해요. 일단, 나 좀 일으켜 줄래요?”
벨로크가 그녀를 일으켜주었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자벨이 몸을 툭툭 털었다. 그러고는 매고 있던 작은 배낭에서 약초 몇 개를 꺼내더니 입에 넣고 우적 씹었다.
약초가 쓴지 그녀는 인상을 와락 찌푸렸지만, 끝끝내 그것들을 다 씹어 삼켰다. 이윽고 옅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상처들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오랜만이군. 떠난 줄 알았는데.”
대체 네가 왜 여기있냐? 라는 뉘앙스가 담긴 벨로크의 말에 이자벨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칼을 손으로 슥슥 쓸었다.
말 못해 줄건 없었다. 이미 이들과는 엮인 것들이 많았으니까.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 것 같고.
“전에 내가 말했었죠? 역병에 관해 조사하고 있다고.”
벨로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실은 일부 요정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지금 우리에게 퍼진 이 역병이 인간들이 퍼트린 게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왕국과 요정들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진 지가 언제인데. 대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아델이 반박하자 이자벨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말도 안 되는 억측이죠. 하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이 나라의 왕이 미쳤다는 소문이요.”
“그건···”
“광증에 빠진 왕이라면 제멋대로 협정을 깨고, 끔찍한 짓거리를 자행할 수 있다고 제 상관들은 생각했나 봐요. 그분들은 오래 산 만큼 인간에 대한 원망이 유별나거든요. 그 결과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 소문의 근원을 수집하라더군요.”
“하지만, 상황은 더 최악이었지.”
이자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소문이 축약되었던 거죠. 왕에게 도진 건 광증이 아니라 악마의 홀림이었으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왕궁터가 악마의 땅이 되어버렸다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일어난 거죠.”
목이 타는지 이자벨이 가방을 열었다. 수통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했다.
“이쯤 되니 한 가지 가설이 머릿속에 세워지더군요. 어쩌면 우리에게 퍼진 이 역병 또한 악마들의 농간이며 인간과 요정 사이에 불화의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일이 더러운 지하 세력들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그럴듯하군.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진짜 악마의 소행일 수도 있다. 대륙에 혼란을 일으키기에는 전쟁만 한 것이 없었으니까. 아니면 그녀의 상관들처럼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종족차별주의자 귀족이 벌인 테러일 수도 있지.
그래, 분명 흥미 있는 이야기군. 하지만, 그가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벨로크가 말했다.
“그래, 네 나름의 가설을 증명하려면 어찌 됐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건 변함이 없지. 말해봐라. 저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이자벨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마법진을 타고 여기에 떨어진 건 모두 같은 상황인 거 같으니까. 본론만 말할게요. 망령, 움직이는 나무, 거대한 버섯과 거미, 사람들을 잡아서 수프로 끓여 먹는 마녀.”
뭔 소리야? 벨로크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이자벨이 말했다.
“제가 저 안에서 봤던 괴물들이에요. 망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극도로 위험한 놈들이죠. 귀족가의 기사나 마법사, 교단의 성기사또한 당해내지를 못하더군요.”
아, 그 말이었어? 신박한 놈들이군. 벨로크가 흥미롭다는 기색을 보일 때. 카라가 물었다.
“놈들에 대한 자세한 얘기 해줄 수 있어?”
이자벨은 괴물들의 특징과 숲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담을 띄엄띄엄 얘기했다. 카라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아델은 전의를 붙태웠다. 이윽고 이자벨의 말이 다 끝났을 때.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녀석들이 줄 경험치가 얼마나 될지 기대되는군. 따라 올 텐가?”
겨우 빠져나온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자는 제안에도 이자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당신 옆만큼 안전한 곳이 또 있을까요?”
요정의 생존본능이 속삭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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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의 지팡이에서 마법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에서도 빨간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흰색과 붉은색의 염료가 상반되며 섞여 들어갔다.
알록달록 빛나고 있는 요상한 분위기의 숲을 일행은 용감히 헤쳐 나갔다. 이자벨이 검을 뽑아 든 채, 또다시 길잡이를 맡았다.
앞에서 쫑긋거리고 있는 귀를 보자 벨로크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익숙하군. 하지만, 새롭게 나타나는 괴물들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의 감각에 녀석들의 움직임이 걸려들었다.
놈들은 빛이 닿지 않는 경계 속에서 일행들을 노리며 스스슥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 몸통만 한 것도 있었고, 그보다 수십 배는 될 법한 놈들도 있었다. 벨로크의 오감은 이 모든 것을 구별해냈다.
이자벨 또한 이를 느꼈는지 귀를 쉴 새 없이 쫑긋거렸다. 그게 당신 레이더인가 보군. 성능은 좀 어때? 벨로크가 시답잖은 생각을 할 때.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요정의 녹색 눈이 어둠 속을 주시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놈들이 오고 있어요. 많습니다. 종류는···”
“네가 말했던 나무 괴물에 버섯, 그리고··· 망령 같은데?”
검을 뽑아 든 벨로크가 말했다. 이윽고 사방에서 괴성들이 들려왔다.
끄에에엑
“왔구나. 더러운 괴물 놈들.”
으르렁거린 아델이 검과 방패를 빼 들고 기도문을 외웠다.
“주변을 비출게!”
카라가 뭐라 중얼거리면서 주문을 외우자 여러 개의 광구가 하늘에 떠올랐다. 그녀가 손짓하자 광원체들이 날아가며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일행은 서로 등을 맞대며 사방을 살폈다. 이윽고 카라가 소리쳤다.
“세상에.”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이자벨의 말마따나, 웬 나무 한 그루가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놈은 마치 유령처럼 눈과 입에서 시퍼런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괴하게 뻗은 팔다리를 드륵 거리자 자욱한 흙먼지가 일며 주위가 요동쳤다.
쿠우우우
“놈이 끝이 아니에요!”
이자벨의 말에 일행은 시선을 돌렸다. 송곳처럼 솟은 평범한 나무들 사이로 연기 같은 것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벨로크는 안력을 집중했다.
희뿌연 사람 형체의 무언가가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저게 망령이군. 그럼 저건··· 시선을 내리자, 사람 몸통만 한 버섯들도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네 발로 기어와서 그런가, 속도가 제법 빨랐다. 버섯이라기 보다는 벌레처럼 보이는데.
끼이이익
별안간 녀석들이 점프했다. 그러자 아래쪽에 덜렁거리던 흉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골이 씨익 웃고 있었다. 소름 돋는 광경이었지만, 일행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델이 검을 치켜 올리며 소리쳤다.
“나를 굽어 살피는 여신이시여!”
그녀의 몸 주위에서 성력의 불꽃이 쾅 폭발했다. 숯덩이가 된 괴물들이 후두둑 나가떨어지자, 벨로크는 냅다 달려 나갔다. 그러자 악에 물든 나무의 광채가 더 짙어졌다. 웃는 듯했다.
녀석이 자신의 팔을 휘둘렀다. 통째로 짓뭉게 버릴 생각이었다. 이미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는지 가지에는 사람의 살점과 피, 갑옷 조각 등이 너저분하게 걸려있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코웃음을 쳤다.
기사의 대검이 번뜩였고, 괴물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