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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56화 (5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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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성

요상한 빛이 번쩍이더니, 한순간에 주위의 광경이 바뀌었다. 벨로크는 이게 무슨 주문인지는 몰랐지만, 꽤나 고약한 상황에 걸려들었단 건 알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곳은 인간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땅이라면 묘비 아래에서 시체들이 기어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 달의 색깔도 피처럼 새빨갛지 않았을 테니까.

그의 생각을 대변하듯, 외딴 공동묘지의 울림은 계속해서 커져갔다. 주위에 쳐져 있던 철창들이 흔들거리고, 낡아빠진 십자가가 툭 부러졌다. 오랜 시간 매장되어있던 팔이 하늘로 치솟았다.

키이이이

공허한 눈덩이가 씰룩거리고, 꺼멓게 탈색된 이빨이 으르렁거렸다. 땅을 벅벅 긁으며 다가오는 악귀들은 인간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분위기 한 번 죽이는군.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대악마가 사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벨로크는 사납게 웃었다.

이런 일로 겁을 집어먹기에는 그간 겪어온 상황들이 너무도 엿 같았으니까.

품에 안겨있던 카라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을 떠듬거렸다.

“여긴 대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설마 전이마법인가? 말도 안 돼. 별다른 기색도 못 느꼈는데.”

마법사인 그녀도 지금의 상황을 모르는 눈치다. 하긴, 대악마쯤 되면 이미 수백 살 묵은 괴물이었다.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요상한 술법들도 많이 알 테니, 인간들의 영역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짓거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한다. 생각은 그 뒤다.”

괴물들을 턱짓한 벨로크가 안고 있던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배에서 느껴지던 묵직함이 사라지자, 카라는 한숨을 후 쉬었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을 쓸며 지팡이를 꾹 쥐었다.

아델은 시뻘게진 얼굴로 벨로크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검과 방패를 들었다.

키르르륵

일행이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에 무덤가의 괴물들은 이미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뼈만 남은 팔다리나 텅 비어버린 백골, 두 갈래로 낼름거리는 구울의 혓바닥이 짓쳐들었다.

벨로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방심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전력을 다해서 힘을 뺄 생각도 없었다.

그의 레벨도 많이 높아졌다. 이제 저런 것들이 주는 경험치는 미미했다. 후딱 처리해버리고 주변을 좀 둘러봐야 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하니까.

카라가 입술을 중얼거렸고, 아델이 그녀를 지키며 기도문을 외웠다.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여느 때처럼 앞으로 나섰다. 울퉁불퉁한 땅을 크게 내딛으며 검을 내려찍었다.

궤적에 걸린 악귀 한 마리가 척추 째로 갈라져 죽었다. 쏟아지는 검은 피와 뇌수를 뒤로한 채, 다시 횡 베기를 했다.

반월을 그린 검날에 기어 오는 구울은 머리 윗부분이 날아갔다. 해골들은 허리가 부서졌다. 역시나 경험치가 짠데. 벨로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로크님! 뒤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리자, 카라가 눈을 빛내며 지팡이를 치켜 올리고 있었다. 주문이었다. 벨로크는 덤벼드는 구울의 배를 걷어차고는 뒤편으로 물러났다. 이를 본 카라가 양팔을 펼쳤다. 이윽고 낭랑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모든 것을 파고드는 빛이여!”

마녀의 갈색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 광채는 평상시 그녀가 보여주던 안광보다 더욱 밝았는데. 벨로크는 이게 강력한 주문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란 것을 몰랐다. 그냥 화려한 퍼포먼스에 눈이 갔다. 뭔데? 뭐가 이렇게 요란해? 카라가 지팡이의 끝을 괴물들에게 향했다.

“꿰뚫어라!”

빛이 점멸하며 보랏빛의 광선이 쏟아졌다. 이윽고 그 광선은 작은 화살로 변해서 마치 소낙비처럼 괴물들에게 쏟아졌다.

짓눌린 땅이든 낡아빠진 돌이든 썩어빠진 살점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파괴적인 빛무리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해시켰다.

끼이이익

괴물들은 뭔가를 해볼 틈도 없이 터져나갔다. 벨로크는 경험치를 뺏겼다는 사실도 잊은 채, 감탄했다.

묘지를 뒤덮고 있던 놈들이 주문 하나에 끝장난 것이다. 역시 기사 말고 마법사를 했어야 했는데. 속마음을 숨긴 그가 말했다.

“처음 보는 마법인데?”

“비전 화살이라는 거야. 너희들에게 나눠준 스크롤에도 있는 마법이고, 이 마도서에 쓰여 있던 마법이기도 하지. 그간 열심히 익힌 보람이 있었어. 생각보다 괜찮은데? 주문력을 좀 많이 쓴 것만 빼면···”

카라는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구기며 허리춤의 책을 만지작거렸다.

“대단한 위력이군. 훌륭하다.”

아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녀의 말에 더 놀란 것은 카라였다.

“응? 네 입에서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가 나온다고?”

아델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델은 인정해야 했다.

이 마녀는 진짜 대단한 솜씨를 지닌 마법사이며, 일행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껏 저열한 질투심에 휘말려 그녀에게 막 대했다는 것을. 물론 하루아침에 든 생각은 아니었다.

하멜른에서부터 시작해 산딸기 마을, 흐르는 숲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이 그녀의 인식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결정적인 것은 대교회에서 공간이동 주문서를 든 채. 꺼낸 그 한 마디였겠지.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너를 동료로 인정하겠다.

벨로크님에게 선을 넘는 수작만 부리지 않으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을 마친 아델이 턱을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흥. 칭찬을 해줘도 문제구나. 전처럼 욕이라도 한 바가지 듣겠느냐?”

앙칼지게만 굴던 여기사가 뜻밖의 행동을 보여주자 카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슬며시 웃었다.

“아니, 사양할게. 좋은 말만 듣고 살기에도 벅찬 세상이니까.”

오. 이건 좀 장족의 발전인데. 벨로크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하늘 위에 떠 있던 달이 번쩍 빛났다.

핏빛 직사광이 묘지를 화악 비추자. 주위의 안개가 한층 더 짙어졌다. 벨로크는 돌연 인상을 구겼다. 그의 초월적인 오감이 또 다른 괴물들을 포착한 것이다. 정확히는 땅을 파는 소리와 가래 끓는 신음성을 들은 것이지만. 아델 또한 마찬가지인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벨로크님··· 이건?”

“아무래도 두 번째 손님들이 찾아온 것 같은데.”

벨로크는 땅에 박아두었던 검을 수욱 뽑았다. 이윽고 달의 번쩍임이 줄어들고, 꾸물거리던 안개가 옅어졌다. 그 안에서 또다시 괴물들이 나타났다.

일행은 다시금 싸웠다. 카라의 손에서 벼락이 날아들었고, 아델과 벨로크는 검을 휘둘렀다. 괴물들은 전과 같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과도한 주문사용으로 인해 카라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끝났겠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핏빛 월광이 반짝였다. 역시나 안개가 끼었고 괴물들이 나타났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일행은 그만 질려버렸다.

특히나 레벨업이라는 개념이 없는 두 사람은 그 강도가 더더욱 컸다. 카라는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묘지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끝없이 쏟아지는 괴물들이라니! 무언가 이상해!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야!”

“벨로크님! 어떻게 할까요?”

아델은 방패를 휘둘러서 해골 병사 하나의 머리통을 박살내고는 물었다. 급박한 전투 와중, 벨로크는 검을 휘두르면서 짧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대악마의 거처처럼 보이는 이상한 공간과 기묘한 달과 안개, 괴물들. 무한리젠 뭐 이런 건가? 야금야금 체력을 갉아먹으며 지치게 하려고? 그래, 분명 끔찍한 짓거리군. 하지만 자신한테는 아니었다. 이것들도 계속 잡다 보니 경험치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삼는다면? 난 더 강해질 것이고, 오래 살았다고 허세부리고 있는 그 괴물도 결국에는 내 검에 목이 달아날 것이다. 라고 생각할 때쯤 카라가 크게 소리쳤다.

“벨로크! 결단을 내려야 해!”

그녀의 다급한 어조에 벨로크는 생각을 멈췄다. 시선을 돌리자, 카라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흐릿해진 안광과 한층 더 헝클어진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아델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지. 방패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괴물 같은 힘과 체력을 지닌 기사는 버틸 만 했지만, 동료들은 아니었다. 벨로크가 말했다.

“아델. 카라를 업어라. 길을 뚫겠다.”

“네.”

“응? 자··· 잠깐!”

카라가 버둥거렸지만, 중무장을 한 채, 악귀를 때려잡는 여기사의 완력은 당해낼 수 없었다.

“말려들지 않게 조심해라.”

검 손잡이를 꾸욱 쥔 벨로크가 잽싸게 달려 나갔다. 목표는 눈앞에 보이는 철창이었다. 일단은 이 묘지를 벗어날 셈이다.

진창이 된 바닥과 구덩이, 괴물들이 그를 막아섰지만,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제는 완연한 칠흑빛을 띤 대검이 번뜩였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괴물들이 토막 났다.

대단한 기예였지만, 포위망을 뚫기에는 부족했다. 벨로크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오감을 극도로 집중시켰다.

찍어 내린 검에서 튄 흙덩이 하나하나, 그의 몸을 찢어버리기 위해 휘둘러오는 악귀의 손발톱 하나하나가 상세히 느껴졌다. 이윽고 세상이 느려졌다. 오직 벨로크만이 이 멈춰진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강철 기사는 검을 휘둘렀다. 그것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재빨리 휘둘렀다.

투명한 궤적이 그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며 폭풍처럼 몰아쳤다. 검의 폭풍이었다. 풍압만으로 주의의 공기가 바르르 떨렸으며 카라의 머리가 새처럼 솟을 정도였다.

괴물들은 일행에게 손 하나 뻗지 못한 채, 갈려 나갔다. 달이 번뜩이며 새로운 괴물이 나타나는 것보다 벨로크가 쳐 죽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뒤따르던 두 사람은 홀린 듯이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다시금 발을 옮겼다.

콰직

마지막 괴물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벨로크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한 번 털었다. 그러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력의 소모가 큰 기술이었다. 자주 사용할 건 못 되었다.

달이 또 반짝이기 전에 벨로크가 주먹을 휘둘렀다. 쇠꼬챙이처럼 박혀있던 기물이 바닥을 굴렀고, 일행은 묘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제 됐지? 내려줘! 빨리!”

남의 등에 매달려있는 것이 못내 불안한지 카라가 버둥거렸지만, 아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벨로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벨로크는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흐릿하게 보이는 안개 너머의 광경과 주위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나 악다구니, 비명, 낄낄거리며 조롱하는 괴성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그의 청력에도 미약하게 들릴 정도면 멀리 떨어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마법을 사용해서 원정대를 뿔뿔이 흩어놓은 건가? 자신은 주문 막이 갑옷 덕분에 무사했던 거고? 아니, 그것보다 저곳을 뚫고 가야 되는 거면 조금 엿 된거 같은데.

“벨로크님?”

“상황이 꼬이는군.”

벨로크가 턱짓했다. 아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순간. 안개가 젖히고 주위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꽤나 높이가 있는 절벽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맙소사···”

침음성을 내뱉은 아델이 카라를 업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엉덩방아를 찍은 카라가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내밀었다. 이윽고 그녀 또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곳은 대체···”

절벽 밑에 있는 울창한 숲을 지나치자, 해골이 가득 쌓인 산이 여러 개 보였다. 그 위에 앉은 뿔 달린 악마들이 피막 날개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불타오르고 있는 마을이 하나 보였다. 흉측하게 생긴 거인 하나가 울부짖는 병사를 꽉 움켜쥐고는 불덩이 속에 던져대고 있었다.

카라는 욕지기가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어디를 봐도 괴물, 괴물이었다. 이곳은 악귀들의 틈바구니였다. 마치, 지옥이 강림한 것만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올렸다.

저 끔찍한 공간의 끝에 기괴하게 생긴 성 하나가 우뚝 치솟아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저기에 있을 것이다.

수백 살 묵은 망령이자 타락의 재림이며, 왕국을 혼란에 빠트리려는 괴물. 대악마 아스타로트...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처럼 침착하며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카라는 그 말뜻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놈한테 도착할 때 쯤 이면 레벨업을 몇 번이나 할 지 모르겠군.”

하지만 어째선지 그 속에는 강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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