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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55화 (55/222)

55

악마성

성문을 주시하는 두 눈과 매만지는 검 손잡이. 이 남자가 설마?! 불길함을 느낀 카라가 벨로크의 어깨를 탁 잡았다.

“잠깐! 네가 아무리 거인의 완력과 망령도 베어내는 검을 가졌다고 해도 저건 무리야!”

벨로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성문을 부술 생각 아니었어?”

“맞췄다.”

“이런 미친.”

카라가 욕설을 내뱉을 때. 눈썹을 꿈틀거린 아델이 벨로크의 어깨에서 카라의 팔을 떼어냈다.

“너는 지금 벨로크님을 못 믿는 건가?”

하지만, 전과는 달리 조심스러운 그 손길에 카라가 미묘한 눈으로 아델을 바라봤다.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 정신 나간 짓거리를 말려야 해. 살짝 고개를 흔든 그녀가 다시금 말했다.

“동료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 우리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검으로 성문을 부수는 게 말이 돼?! 이건 악마나 나무 몇 그루를 베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야! 더군다나 수도의 성문은 다른 곳들보다 배는 두껍고 튼튼해. 네 검만 부러질지도 몰라.”

카라의 열성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벨로크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있었다. 초월적인 청력 덕분에 들려오는 주변의 대화 소리 때문이었다.

“저 안개가 결계라고? 풀 수 있겠나?”

“제 실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성문을 부수는 게 낫겠군요. 저곳은 결계가 안 보이니까요. 하지만, 저 혼자서는 안 되고, 마법사들이 더 필요합니다. 아니면 공성 병기가 있어야 할 겁니다.”

“음··· 잠깐만 기다려보게. 휘하에 마법사를 데리고 있는 영주들이 분명 있을 터인데. 전령!”

“대주교님. 어떻게 할까요?”

“다른 교단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일단은 그들과 대책을 논의해 봐야겠습니다만···”

아직 왕궁 내부에 들어서지도 않았건만, 연합군은 벌써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대영주라고 하더라도 모든 영주들을 통솔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대영주들도 있었으며, 소규모로 연합한 영주들도 있었다.

당연히 그들 간에 세력이 나누어졌으며, 알력 다툼이 생겨났다.

물론, 이는 교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나로 통일된 군대가 아닌, 제각각의 이익을 위해서 모인 집단들의 한계였다.

“마법을 사용하면 할수록 제 주문력이 깎여나갑니다. 나중에 가서는 제대로 된 주문을 못 쓸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주시죠.”

“일단 다른 쪽이 먼저 나서는 걸 보고 행동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저희의 전력을 보존해야지요.”

지휘체계가 다르고 이끄는 사람이 여럿이니, 소통이 안 되는 것은 약과였다. 나중에 가서는 하이에나처럼 기회를 노리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벨로크는 확대시켰던 오감을 줄였다. 시끌시끌하던 소리가 한순간에 뚝 줄어들었다.

심력의 소모 때문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더 개판인 상황 때문일까.

벨로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나 이 새끼들을 믿을 수는 없다. 자신이 나서야 했다.

“말리지 마라.”

그 잠깐 사이 카라 또한 상황을 파악한 모양인지, 옅게 한숨을 쉬고는 벨로크의 뒤를 따랐다. 아델은 이미 벨로크의 옆에 붙어서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헤치고 있었다.

이윽고 일행은 닫혀있는 성문 근처로 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주위에도 선객들이 있었다. 제일 선두에 서서 병력들을 이끌던 대영주 게오르그 공작이었다. 그는 바빴기에 휘하의 기사들이 재빨리 달려 나갔다.

그중에서 제일 화려하게 차려입은 자가 입을 열었다.

“잠깐! 당신은 누군데. 공작님의 군영에 들어오는 거요?”

“군영이라니, 이곳에 영역이 어디 있단 말이오?”

벨로크의 물음에 기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수상한 주문쟁이 하나와 대검 기사 그리고 여기사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주위를 둘러보시오. 전부 다 게오르그 공작님의 봉신들이거나 가신들이오. 당신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대체 무슨 용무요?”

벨로크는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깃발이라든지 복장에 박힌 문양이라든지 뭔가 통일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벨로크가 말했다.

“우리는 성문을 부수기 위해 왔소.”

“성문을? 뭐, 공성 병기라도 가져오셨소?? 아니면 휘하의 마법사를 데리고 우리랑 힘을 합치려는 것이오?”

“둘 다 아니오.”

기사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러면 대체 뭘로 부수겠다는 거요?”

벨로크는 매고 있는 대검을 툭툭 두드렸다.

“이 검으로.”

일순 정적이 흘렀다. 화려한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도, 그의 부하들처럼 보이는 다른 기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지나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위 병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윽고 비웃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선두의 기사에게서 난 소리였다. 그는 어깨를 파르르 떨어가며 벨로크를 비웃었다. 자신들의 대장이 그러자, 부하들 또한 그를 따라 웃었다. 기사가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 생긴 것만 보면 기사 중의 기사로 보이는데. 그 입담은 광대와도 같구려. 그래,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라면 잘 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겠군. 다시 묻겠소. 무슨 용무로 여기 오셨소.”

“성문을 부수러 왔다고 하지 않았소?”

웃고 있던 기사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러니까 뭘로 말이오?”

“말하지 않았소. 이 검으로 부술 거요.”

“장난이 좀 과한 듯싶소만.”

“장난하는 거 아니오. 이유를 알았으면 이제 그만 비켜주지 않겠소?”

벨로크가 면갑을 철컥 올리며 말했다. 무채색의 검은 눈동자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흉갑 기사는 깨달았다. 저자는 진심이다. 정말로 성문에 검을 휘두르려는 생각이다. 미친 건가? 아니면 기사로서의 호승심인가? 흉갑 기사는 뭐라고 입을 열려다가 그냥 스윽 비켜섰다.

이 자를 상대하는 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가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벨로크의 어깨를 툭 쳤다.

“뭐, 우리가 강제할 수는 없지. 그래, 잘해보시오. 성문 파괴자.”

뒤편에서는 아직까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들이!”

“참아.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울컥한 아델이 나서려고 했지만, 카라가 말렸다. 이쯤 되자 카라 또한 벨로크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일행은 성문 앞에 섰다.

과연 왕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답게 다른 성의 문보다 컸으며 두터웠다. 통나무와 강철이 절묘하게 섞인 이 건축물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 묘한 위압감을 선사했다. 뒤편에 있던 카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기··· 내가 주문을 좀 날려볼까? 약해진 틈으로 휘두르면 더 쉽게 깨지지 않겠어?”

벨로크는 성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의 그 뱀 녀석하고 크기가 비슷한 것 같은데. 그가 피식 웃었다.

“아니, 괜찮다. 생각보다 쉽겠군.”

벨로크는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가슴께까지 끌어 모으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묵직한 대검이 달빛에 반사되며 번들거렸다. 그걸 쥐고 있는 흑기사 또한 밝게 비췄다.

부풀어 오른 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고, 체중을 받치고 있는 지면 또한 쿠르릉 파여 나갔다. 벨로크는 이 모든 감각들을 느끼며 느릿하게 검을 치켜 올렸다.

그간 찍었던 스텟 덕분일까? 아니면, 생사를 넘나들며 단련된 육체 때문일까? 수백 킬로는 넘어가는 이 쇳덩이가 이제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자신의 강함을 확인하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속으로 웃은 벨로크가 여느 때처럼 검을 내려찍었다.

일순 섬광이 일었다. 거센 풍압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강타했다. 하지만, 성문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그렇지. 검으로 문을 부순다는 게 말이 돼?”

“미친 짓도 정도가 있어야···”

비웃음을 머금던 한 귀족은 입을 헙 다물었다. 파지지직 소리가 들리면서 성문에 금이 쩍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가 벨로크가 발로 뻥 차자. 절정에 달했다.

콰아앙

후드드득 떨어지는 톱밥과 쇳덩이들 사이로 왕궁의 내부가 훤히 보였다. 철옹성 같던 성문이 칼질 한 번에 조각난 것이다.

검을 휙 털어서 잔해물을 털어낸 벨로크가 무심하게 고갯짓했다.

“들어간다.”

“역시, 역시 벨로크님 이십니다. 이런 무용을!”

“설마하니 진짜 해낼 줄이야···”

아델이 폴짝 뛰면서 벨로크의 뒤를 따르고 카라도 멍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녀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넋을 놓은 얼굴을 한 병사들과 귀족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전의 흉갑 기사 또한 두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이를 본 카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성문 파괴자의 위용을 실제로 보니까. 어떠신가? 지금 누가 광대 노릇을 하고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

말문이 막힌 흉갑 기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피식 웃은 카라가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두 사람을 뒤따랐다.

#

성문을 열었다고 해서, 곧바로 왕의 거주지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궁전은 드넓었으며, 안에는 여러 건축물이 즐비했으니까.

고개를 돌리니, 성벽 위에 퍼져있는 안개들이 하늘까지 뒤덮고 있었다.

이거 뭔가 좀 불안한데? 벨로크는 그런 생각을 하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넓게 펼쳐진 정원을 무작정 걸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수천 명의 군사 때문이었다.

이상했다. 불이 꺼져있는 건물들도 그렇고, 여기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모습 하나 보이지가 않았다.

벨로크가 의아함을 느낀 순간. 뒤편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경. 저는 바르투스 백작이라고 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혹여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소개가 늦었습니다. 경. 저는 아르토 자작이라고 합니다. 아까 전의 검술은 잘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전설에나 나올듯한 솜씨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콧대높은 귀족들이 너도나도 벨로크에게 말을 건넸다. 인간 같지 않은 전사와 친분을 나누기 위함이다. 하지만 벨로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미친놈들. 그들은 지금 적진의 한 가운데에 있는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롭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다니?

벨로크가 권력에 취한 이 머저리들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성벽 위에서 꿈틀거리던 안개들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일행은 물론 원정대의 발목을 휘감기 시작한 것이다.

“허어억. 이게 대체?”

한 귀족이 기겁하자, 벨로크가 카라를 바라봤다. 무언가 요상한 상황이 일어나려 하자, 마법사인 그녀에게 물어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카라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잘···”

그 순간. 벨로크의 문장 갑옷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전의 별것 없는 마법사의 주문을 막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세기였다.

굳이 육감이 보내는 경고가 아니더라도, 벨로크는 알 수 있었다. 이 요상한 안개의 주문이 지금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는 걸. 벨로크가 카라와 아델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주문 막이 갑옷의 보호범위 안에 두 사람을 넣기 위함이다.

“벨로크님?!”

안개는 이제 그들의 머리까지 차오른 것은 물론, 요상한 빛까지 뿜어내고 있었다. 벨로크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맹수 같은 눈이 안개의 밑에 깔려있는 선들을 포착했다.

마법진이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이를 확인한 순간. 문장 갑옷의 빛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마법진 또한 빛을 내뿜었다. 휘몰아치는 섬광에 벨로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스멀스멀 몸을 휘감던 안개의 감촉이 옅어지고, 빛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두 개의 숨결을 뒤로한 채, 벨로크가 슬며시 눈을 떴다. 이윽고 욕설을 내뱉었다.

“망할.”

방금 전 까지 보이던 인간들의 궁전과 잘 관리된 정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뒤틀린 땅과 헤집어진 묘지 그리고 그 속에서 기어 나오는 괴물들이었다.

“키르르륵.”

새롭게 나타난 먹잇감에 괴물들이 입가가 찢어지라 웃었다. 허공에 떠 있는 붉은 달이 세 사람과 악귀들을 처연히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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