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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벨로크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접시에 놓인 과자를 한 입 깨물며 노인을 바라봤다. 아델도 팔짱을 낀 채, 눈썹을 꿈틀거렸으며, 카라 또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일순 방안에 고요가 흘렀다. 공통적인 생각은 하나였다.
이 노인네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그들이 교단 소속 일원들을 구해줘서? 아델이 성기사라서? 그렇다고 이런 얘기를 바로 꺼낼 정도로 우리의 신뢰 관계가 두터웠나?
세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하자 하이넥이 슬쩍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델을 향했다.
“제 말이 의심스러우신가 보군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신의 대전사께 거짓을 고할 정도로 이 하이넥 타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전사? 내가 여신한테 성력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 부르는 겁니까?”
아델의 물음에 하이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은 교단원들에게 얘기는 들었습니다. 대악마의 하수인들을 처리하신 것은 물론, 하멜른의 교회를 정화시키고, 그분의 선택을 받으셨다면서요? 사실 제가 이렇게 세 분 앞에 나타난 것도 위명이 자자한 대전사를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력을 한 번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할까요?”
아델이 벨로크를 바라보며 허락을 구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하이넥은 이윽고 아델의 몸 주위에서 불꽃이 피어나자 눈을 크게 떴다.
“오오! 역시나 어마어마한 성력 입니다. 불꽃의 권능이라니. 여신이시여!”
감탄한 하이넥이 성호를 그었다. 그 후로는 혼자서 뭐라고 떠들어댔다.
여신께 직접적으로 성력을 받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둥. 보통 평범한 사제나 성기사들은 신이 아닌, 대주교나 성기사단장으로부터 성력을 나눠 받는다는 둥.
잡다한 얘기였다. 뭐? 품앗이 같은 건가? 아무튼 대주교의 말을 요약하자면 아델은 꽤나 대단한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적어도 헬레나를 모시는 교회에서는 그녀를 귀빈으로 취급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이넥이 아델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카라가 벨로크의 어깨를 툭 치고는 눈빛을 보냈다. 일이 잘 풀렸다는 뜻이었다.
벨로크 또한 긍정했다. 기왕 손을 잡고 적을 상대할 거라면 조력자와의 관계는 늘 우호적인 게 좋았으니까. 벨로크는 탁자 위에 놓인 과자를 몇 개 더 집어먹고는 말했다.
“대주교님. 조금 전에 주신 제안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여신의 검과 신실한 기사, 그리고 마법사··· 께서 도와주신다면 참으로 든든하겠지요.”
하이넥은 카라를 보며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윽고 싱긋 웃었다. 벨로크가 말했다.
“그 전에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이번 성전에 저희가 참여하게 된다면 태양신의 교단에 속해서 싸우게 되는 겁니까?”
말이 성전이지 반란이자 대규모 군사작전이었다. 일행이 한 집단에 소속되면 좋든 싫든 그들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다. 벨로크는 그게 탐탁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동료들을 제외한 남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럴 바에 기회를 봐서 그들끼리 행동하는 게 나았다. 그런 벨로크의 마음을 알았던 걸까. 하이넥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그렇게 되겠지요. 하지만 굳이 저희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여신의 검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강제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이 땅에는 너무나도 많은 세력들이 모여있기 때문이죠.”
하이넥은 인자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다시금 번들거렸다. 벨로크는 노인네의 눈 속에 잠재된 감정들을 읽었다. 의무감, 그리고 욕망이었다.
의무감이야 여신의 뜻을 대행하기 위해서라고 쳐도 뭐? 욕망? 이 땅에서 왕과 악마를 몰아내고 왕이라도 되시려고? 꽤나 세속적인 늙은이인데. 하이넥이 말했다.
“이번 성전에 참여하기 위해. 저희를 포함한 교단들은 물론, 수십을 넘어 수백 명의 귀족들이 제각각 군대를 끌고 왔습니다. 기사는 수백에 용병들은 수천이 되겠죠. 거기다가 한몫 잡기 위해 나선 뒷골목 건달들, 시민병들까지 합친다면? 이건 폭풍입니다. 막을 수 없는 변혁의 소용돌이죠.”
“오늘 밤.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건가요? 왕과 악마를 끌어내리기 위해?”
카라의 질문에 하이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포교를 한 이유도 그 때문이죠. 힘을 집결시키기 위해서. 왕의 부하들은 대부분이 왕궁 안에 있었으니, 수월하게 진행된 셈이죠.”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애초에 오늘 밤에 왕궁을 습격할 거라는 얘기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거군. 그래서 쉽게 말해줬던 건가?
벨로크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갑게 식어있었다. 수천 명의 군대가 왕궁을 습격한다.
그 틈바구니에 기사 둘과 마법사 하나가 낀다고 해도 티 하나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제각각의 사람들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행동할 때. 그들도 움직이면 그만이다. 그가 말했다.
“성전에 참여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따로 행동하도록 하죠.”
“뜻대로 하십시오.”
하이넥은 여전히 인자하게 웃었다.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굳이 눈앞의 세 명이 아니라도 그의 손발이 되어줄 칼들은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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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크 일행은 교회에게 양해를 구하고 작은 방을 하나 얻었다. 대악마 혹은 놈에게 홀린 왕과의 결전이 몇 시간밖에 남지 않았으니, 나름의 준비를 해야 했다.
하나밖에 없는 창문 사이로 투과해온 빛이 카라를 비췄다. 떨어지는 태양의 높이만큼이나 시뻘건 색이 카라의 붉은 머리를 비췄다.
카라는 입고 있는 로브를 벗었다. 그러고는 로브를 창문에 걸쳐 바깥을 가리고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주위에 붉은 역장이 퍼지면서 그녀의 목소리 톤이 조금 달라졌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 주문이야. 이 정도는 되어야 안심하고 계획을 짜지 않겠어?”
벨로크는 어깨에 기대어 둔 대검을 손질하며 답했다.
“계획이라··· 귀족 놈들과 교회가 아스타로트의 하수인들과 왕의 군대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틈을 타. 우리가 놈을 죽인다?”
“정녕 옳으신 말씀입니다. 기사라면 때때로 틈을 노려야 하는 법이죠.”
아델이 자신의 판금 갑옷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그간의 전투로 인해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흠이 갔다. 대장장이한테 수리를 맡겨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고 그리하면 되겠지. 그녀는 진짜로 그렇게 믿었다. 대악마를 상대하러 가서 살아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곧 벨로크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녀의 고양이 같은 눈매가 확 치켜떠지며 벨로크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이윽고 그 시선은 돌아가서 붉은 머리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한숨 소리 때문이었다.
“네 말처럼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 하지만, 그사이에는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할 거야. 대악마의 하수인들이 생각보다 강하다거나 숫자가 많다면? 어쩌면 왕의 군대들이 모두 악마의 힘을 받아들인 괴물들이 되어있다면? 과연 인간들의 군대만으로 상대가 가능할까? 그것도 거창한 대의나 의지 없이 오직 욕망으로만 이루어진 집단이?”
“교회가 있지 않나?”
벨로크의 말에 카라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보기에 그 치들 또한 못 믿는 것은 마찬가지야. 조금 전의 대주교라는 사람도 그렇고, 아까 전에 포교를 하던 놈들도 그래. 세속에 물들 때로 물든 그놈들이 다루는 성력이 과연 악마들에게 얼마나 통할까? 내가 장담하는데. 교회는 약해졌어.”
카라의 신랄한 비난에 아델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하고픈 말이 뭐냐. 또 겁을 집어먹은 거냐?”
“아니, 여기까지 온 이상. 나약함은 발목을 잡을 뿐이겠지. 내 말은 준비를 단단히 하자는 거였어. 우리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고.”
고개를 저은 카라가 자신의 배낭을 열고는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대부분이 주문서들이었지만, 간혹 물약 같은 것도 몇 개 보였다.
카라가 시뻘건 병 몇 개를 벨로크와 아델에게 내밀었다.
“일단 이건 상처에 듣는 회복 포션이야. 재료가 얼마 없기에 몇 개 못 만들었어. 마시거나 환부에 뿌리도록 해. 트롤의 피로 만든 거니까 효과는 좋을 거야.”
잠깐 트롤의 피? 카라의 말에 벨로크는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옛날에 루크의 대장간에서 녀석을 퇴치하고 피를 담았던 기억이었다. 설마? 카라가 슬쩍 웃었다.
“맞아. 네 가방에서 나온 걸로 만든 거야. 저번에 여관에서 묵을 때 방안을 굴러다니던걸 주운 거니까. 훔친 건 아니다?”
기름 묻은 헝겊으로 검을 닦고 있던 벨로크가 멋쩍게 웃었다. 가방에서 썩어갈 뻔한 걸 용케 가공했군. 고마울 따름이었다.
“까먹고 있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이건 주문서들이야. 대마법사의 유적에서 찾아낸 것들이지. 나는 마법사니까 너희들이 쓰도록 해. 사용법은 간단해. 적을 앞에 두고 그냥 찢으면 돼. 자. 설명해줄게. 이건 비전 화살이고, 이건 환영술에 관한 거야. 쉽게 말해서 너와 똑같은 분신을···”
그녀는 한참이나 가지고 있는 주문서들을 설명해주고는 벨로크와 아델에게 나눠주었다. 그러고는 한 개의 주문서를 자신이 챙겼다. 그걸 본 아델이 물었다.
“그건 무슨 주문서지?”
카라는 조금 복잡한 눈으로 손에 들린 주문서를 쳐다봤다. 가급적이면 이걸 안 썼으면 좋겠는데···
“공간이동 주문서.”
“카르벤에서 얻은 그것 말이군.”
카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표정을 착 가라앉혔다. 이는 주위의 어둠과 역장에서 나오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합쳐져서 꽤나 요상하게 보였다. 그녀의 기색이 이상하자, 아델이 카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설마, 우리를 버리고 도망을···”
카라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너희 둘을 데리고 이걸 찢을 거야. 목숨은 하나니까.”
어둠 속에서 마녀의 갈색 눈이 두 기사를 아니, 자신의 동료들을 올곧이 바라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장소에 도착할 확률이 8할이고, 어디 차원의 틈으로 튕겨 나갈 확률이 일 할이야. 온몸이 찢겨나갈 확률도 일 할이지. 제법 확률 높은 도박이지만, 꺼림칙한 건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하면 되겠군.”
피식 웃은 벨로크가 손에 들린 헝겊을 툭 던졌다. 그러고는 검을 어깨에 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을 뻗었다.
카라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아델 또한 슬쩍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카라가 그녀의 손을 마주 잡고 일으켰다.
창문에 걸쳐두었던 붉은 로브가 휙 걷혔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시퍼런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됐다. 대악마를 처단할 시간이었다. 검은 머리칼의 기사와 헬레나의 성기사, 붉은 머리칼의 마녀는 나란히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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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거리는 횃불 아래 두터운 군홧발들이 판석을 거침없이 짓밟았다.
그 숫자가 물경 수천에 헤아렸으니, 제 아무리 튼튼한 돌바닥이라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금이 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지금 그들이 행하려고 하는 것은 거룩한 성전이었으며, 명예와 권위를 잃은 통치자를 심판하는 일이었으니까.
“모두 나를 따르라! 오늘 밤. 내 역사를 새로 쓸 것이다.”
뒤룩뒤룩 살쪄서 갑옷이 잘 맞지도 않는 귀족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그 뒤로 수많은 병사가 따랐다.
그다음에는 웬 콧수염을 멋스럽게 기른 중년인이 자신을 따르라고 소리쳤다.
역시나 그의 뒤에도 수많은 병사가 있었다. 그런 귀족들의 고함소리와 병사들의 철그럭 거리는 소리에 수도의 밤은 소란스러웠다.
대업에 참여하는 대신, 자신의 목숨을 더 소중히 여긴 일부 시민들은 커튼이 처진 창틈 너머로 병사들의 행진을 힐끔 보고 있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군대였다. 이는 성기사들과 사제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발걸음은 제멋대로였으며, 몇몇은 넘어져서 아군들에게 깔리기도 했다. 또 다른 몇은 눈치를 보더니, 탈주를 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굳게 닫혀있는 왕성의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 귀족이 말했다. 이 중에서 땅과 사병들을 제일 많이 가지고 있는 대영주 중에 한 명 이었다.
“무언가 이상하군. 저런 안개라니···”
굳게 닫힌 성문을 뒤로한 채, 왕궁을 둘러싼 성벽 위에는 경계병 대신 스산한 안개들이 꿈틀거렸다. 마치, 그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듯했다. 하지만, 대영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짓했다.
“사다리를 가져와라!”
병사 몇이 성문 근처에 재빨리 사다리를 댔다. 이윽고 몸이 날렵한 몇이 사다리를 타고 훌쩍 몸을 날렸다. 안으로 침입해서 닫힌 성문을 열기 위함이다.
대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교단도 그렇고 다른 영주들도 전부 다 그를 따라 하고 있었다. 대영주는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제일 빠를 터다. 하지만, 그 생각이 오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한 명도 안 나오는 거냐?”
성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 병사들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비명소리도 없었다.
벨로크 일행 또한 병사들의 주위에 끼어서 지금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빛나는 갈색 눈으로 안개를 노려보던 카라가 낭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 결계가 쳐져 있어. 저기 보이는 저 안개 보여? 저건 전부 다 악마의 비술이야. 성벽을 넘어갔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마법사나 성직자들이 저 안개를 해주 할 수도 있겠지만, 제일 쉬운 방법은···”
카라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안개가 안 끼인 장소가 딱 하나 보였다. 두터운 나무와 철판을 겹겹이 끼우고 보강한 성문이었다. 그녀가 턱짓했다.
“성문으로 정면돌파 하는 거야. 물론 공성 병기가 필요하겠지만,”
“그렇군.”
벨로크는 짧게 답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응? 잠깐... 너 설마?”
카라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벨로크는 말없이 자신의 대검을 꾹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