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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53화 (5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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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아드리아 왕국의 건국 이래로 수많은 왕들이 있었다. 그런 왕들의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별칭들이 존재했는데. 이는 현왕인 에드워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자처럼 용맹하며 강맹한 힘을 가졌다 해서 붙여진 별명인데. 에드워드가 젊은 시절 달성한 위업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불릴 만도 했다.

수많은 괴물을 도살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영웅이었으니까. 그런 영웅에게 광증이 도졌단다. 아니, 이제는 악마가 씌였단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헛소문을 믿을 바에 네놈들이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하도록! 그렇지 못한 녀석은 경을 칠 테니까!”

수도 경비대의 책임자이자 평상시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경비대장이 일장연설을 했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으며 무거운 도끼 창과 철 투구를 쓰고 있는 그리즈 에게는 와 닿지 않는 얘기였다.

그는 어서 일을 끝마치고 은퇴 용병인 제이크가 하는 술집으로 가서 목을 축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꼬여만 갔다. 저 앞에서 여러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런 무엄한 것들이! 나는 바르토 백작이다! 설마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당장에 길을 비켜라!”

“나는 겔릭이요. 아르펜의 트롤 참수자라고도 불리지. 로흐반트 자작님에게 기사서임을 받았으며, 트롤 외에도 수많은 괴물을 잡았소.”

“우리는 신탁을 듣고 왔습니다. 잘못 된 게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하니까요. 이 모든 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불온한 마음을 품고 사병들을 끌고 온 귀족,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제 한 몸 바치기 위해 온 기사, 수도 대교회의 소집을 받고 각 지역에서 올라온 사제들까지.

현재 수도의 관문은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혼란의 극치였다. 그것도 범상치 않은 신분을 가진 자들이 즐비했다.

경비대장은 악을 쓰면서 마차를 검문검색을 하고 칼잡이들의 소지품을 살폈다. 상관이 그렇게 하자, 자연스레 그리즈 또한 그리 해야 했다.

그는 이것이 고역이었다. 평민 출신으로서 귀족들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하며 그들을 살피는 것이 말이다. 그리즈는 속으로 불경한 생각을 했다.

이건 전부 다 왕이 미친 짓을 해서 그렇다. 갑작스레 사람들을 목매달고 단두대를 내리지만 않았다면, 수도의 검문이 이렇게 힘들어졌을 리도 없었다. 자신의 업무강도도 평소처럼 낮았을 것이다.

젠장, 술이 고팠다. 그에게 수도의 안위 같은 것은 먼 미래의 얘기였다. 당장에 먹고 살 일이 급했으니까.

“후우. 다음 분들 오십시오.”

한숨을 내쉰 그리즈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거대한 대검을 멘 기사와 시뻘건 로브를 걸친 마법사, 단발머리의 여기사 한 명이 말에서 내려서 다가왔다.

평상시라면 굉장히 특이한 조합이라며 그리즈가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너무 바빴으며, 정신도 없었다.

그는 이 특이한 일행의 짐 가방과 무기를 살피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남자 기사가 답했다.

“수도에 아는 친척이 있어서. 관광차 오게 되었소.”

그리즈는 피식 웃었다. 관광? 지금 주위의 상황을 보고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리즈는 눈앞의 기사가 되도 않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내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이 기사 일행은 옆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귀족들이나 다른 자들과는 달랐다. 검문에 순순히 협조했으며, 그에게 호통 치지도 않았다.

아무리 봐도 소란을 일으킬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즈가 도끼창을 어깨에 척 기대며 그들을 통과시켰다.

“수도가 어지럽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죠.”

“고맙소. 당신도 고생하시오.”

세 명의 일행이 떠나가고, 그리즈는 다시금 손님을 맞아야 했다. 이번에는 험상궂은 귀족이었다. 뒤편에 있는 그의 사병들은 서슬 퍼런 기세를 뿜어냈다. 투구 속 그리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다시금 술이 고팠다.

#

일행은 말에서 내린 상태 그대로 잘 깔린 판석 도로를 걸었다. 확실히 왕국의 수도는 그 위세가 남달랐다.

평소에 자주 보이던 짚을 올린 회반죽 건물 따위가 아닌, 멀끔한 벽돌과 윤기 나는 목재로만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했다. 그 주위에 산재해 있는 높게 치솟은 탑들과 조각상, 사원들은 또 어떤가?

아델은 한 명의 기사로서 진중한 표정을 지은 채, 앞만 보고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카라가 입을 열었다.

“수도에는 지체 높은 분들이 많이 살지. 땅값은 또 오죽 비싸게? 이곳에 대저택을 지을 돈이면 지방에 괜찮은 성 몇 채는 지을 수 있을 거야. 중앙귀족들이 괜히 지방 귀족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란 거지.”

그녀 딴에는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지만, 아델은 무시했고, 벨로크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는 이미 이것들보다 훨씬 거대하며 신기한 건축물들을 보며 자랐으니까.

어디서나 부동산은 있는 법이군. 그래, 역시 땅장사가 최고지.

한참 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델이 입을 열었다.

“악마가 있다고는 믿기 힘든 광경입니다.”

“실감이 안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상인에게 들었던 얘기대로라면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은 사자왕이야. 어쩌면 그의 처소 안에 꽁꽁 숨어있을지도 몰라.”

카라가 손가락으로 왕궁을 가리켰다. 하지만 주위에 있는 건물들에 가려 첨탑 몇 개만이 보일 뿐이었다.

벨로크 또한 그녀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신탁이 내려온 직후, 왕이 왕궁의 문을 걸어 잠갔다고 했으니까.

“어찌 됐든 주위 상황을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것 같군. 일단 정보를 수집해야 할 텐데.”

“여관으로 갑니까?”

“아니, 일단은 조금 둘러보도록 한다.”

일행은 말고삐를 손에 쥔 채, 계속 걸었다. 아까 전 관문에서처럼 주위가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 번잡함은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분수대로 갔을 때 절정에 달했다.

“사자왕은 지금 당장 왕궁의 문을 열고, 진실을 밝혀내야 할 겁니다. 여신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입니까?”

“셀레네께서도 말씀하셨소. 지금 왕궁 안에는 거대한 악이 암약한다고 말이오. 하지만 왕은 무엇을 하고 있소? 오히려 밑의 가신들과 함께 숨어버렸지 않소? 상황은 명백하오. 이대로라면 큰 재앙이 일어날 터.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하오.”

제각기 다른 신의 문양을 새긴 사제들이 단상 위에 올라선 채,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포교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직업들 또한 용병이나 귀족, 장사치, 평범한 아낙 등으로 다양했다. 이를 보던 카라가 중얼거렸다.

“왕의 영역에서 사제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다니. 신탁이 정말 사실인 모양인데?”

아무리 교권과 왕권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곳은 왕이 거주하는 처소였다. 그런 땅에서 앞뒤 가릴 것 없이 행동하는 교회의 모습에서 일행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했다.

그 순간. 사람들을 제치며 무장을 한 기사들이 사제들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검집에 손을 올리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 이게 무슨 소란이요! 당장 집회를 중지하시오!”

단상 위에 있던 사제들은 눈을 슬쩍 돌렸다. 왕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들을 쏘아붙였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소이다. 왕이 악마에게 홀렸다는 사실을 말이오! 우리는 천상의 이름 아래 한 점 부끄럼이 없으니. 방해하지 마시오!”

“폐하의 명예를 어디까지 실추시킬 셈이오! 정녕 피를 보고 싶은 건가?!”

“해보시던지.”

기사의 서슬 퍼런 협박에도 사제들은 피식 웃었다. 이윽고 대낮의 광장에서 교단의 성기사들과 왕실 기사들 사이에 칼부림이 일어났다.

연설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결투의 관람객들이 되었다. 진짜 개판이네. 여기. 여관이라도 가야하나. 벨로크가 고개를 저을 때. 카라가 말했다.

“빠져나가자. 이런 소란에 휘말려봤자 좋을 게 없어.”

“그러지.”

벨로크 일행이 슬쩍 걸음을 옮겨서 광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서 아는 척을 해왔다.

“형제님들께서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일행의 고개가 돌아갔다. 떨어지는 태양 아래 근사한 갑주를 차려입은 성기사가 한 명 서 있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산골 마을에서 악마들의 추격을 받았을 때. 같이 싸웠던 사내이기도 했다.

‘이거 일이 쉽게 풀리겠군.’

그를 바라본 벨로크가 씨익 웃었다. 어디서나 인맥은 중요한 법이었다. 비록 그들이 원해서 엮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성기사의 이름은 뮬이었다. 벨로크는 이 젊은 기사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그간 대악마의 부하들을 잡고, 마침내, 놈의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뮬은 감동받은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이미 벨로크의 압도적인 무력과 아델의 성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일행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악마들을 도륙하시는 모습에서 짐작은 했었지만, 형제님들도 성전에 참여하시기 위해 온 것이군요.”

“성전이라? 확실히 무슨 일을 벌이긴 할 모양인가 보군?”

뮬이 주위를 슥 살폈다. 싸움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피와 내장이 비산하고, 주인 잃은 무구들이 바닥을 굴렀다.

물론, 그 대부분은 왕실 기사들의 것이었다. 숫자 차이가 워낙 심했으니까. 그 모습을 본 뮬이 흐뭇하게 웃었다. 정의나 자비를 미덕으로 삼는 성기사가 짓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광신도의 것에 가까웠다.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조금 그렇습니다만... 일단 저를 따라서 오시겠습니까?”

카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술을 쓰는 주문쟁이로서 교회가 싫은 것도 있었지만, 좀 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대로변에서 거리낌 없이 칼을 뽑아 드는 저들의 행동은 둘째 치고, 이 모든 상황이 대악마가 짜놓은 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국왕을 지지하는 귀족, 반란을 일으키려는 귀족, 신탁을 받고 왕을 저지하려는 교회까지.

그들 휘하에 있는 기사들이나 고용한 용병들까지 합치면 현재,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간들이 수도에 모여 있었다.

방금 전의 짧은 대립에도 저 정도의 사상자가 흘렀다. 하지만, 그 대립이 격화된다면?

악마를 상대하기도 전에 인간들끼리의 전쟁으로 다 죽어 나갈 것이다. 어쩌면 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왕궁에 틀어박힌 걸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을 귀족이나 교회가 못했을까? 그건 아닐 터다. 하지만 각자가 속한 단체의 이권이 걸린 순간 사람들의 눈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괜찮겠지 하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린다고 해서 들을 것도 아니고···’

고민에 잠긴 카라의 어깨를 벨로크가 툭 쳤다.

“응?”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차분한 검은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언제나처럼 낮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고.”

“응. 그렇지.”

카라는 머리를 흔들었다. 고민해봤자 현재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일단은 저 성기사를 따라가서 교회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우리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꽤나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은 뮬을 따라서 헬레나를 모시는 수도 대교회에 도착했다. 이윽고 그곳을 다스리는 대주교라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오늘 밤. 악마에게 홀린 왕을 끌어내리고 정의를 집행할 예정입니다.”

인자한 어투였지만, 속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나 빨리? 약간 당황한 벨로크가 물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 뜻이 맞는 겁니까? 반역을 일으킨다는···”

“반역이라니. 허허허. 가당치도 않습니다. 형제님.”

대주교 하이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눈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아까 전 뮬이 보여주었던 광신도의 미소였다.

“악마를 죽이는 것이 어찌 반역이겠습니까? 이건 여신의 뜻을 바로 세우기 위한 고귀한 성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수도에 있는 다른 교회들과도 이미 얘기가 끝났습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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