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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52화 (5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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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어떤 건데?”

벨로크가 묻자, 카라가 주문서를 만지작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공간이동 주문이 각인되어있어. 좌표는··· 아리안 사막인데? 멀리도 도망치려 했군.”

타운 포탈 같은 건가? 벨로크의 눈이 조금 커졌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이 세계에 빠지게 된 것도 일종의 차원 이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저 주문서에 흥미가 생겼다.

“영주를 꼬드겨 자기 탐욕을 채우려 했던 놈이 가지고 있기에는 아까운 물건이지. 내가 잘 써주겠어.”

은근슬쩍 로브 자락에 주문서를 넣은 카라가 추천서를 벨로크에게 건네주었다.

이 여자가? 벨로크가 슬쩍 바라보자 카라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왜? 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그래, 마법 물품은 마법사가 관리하는 게 편하지. 포기한 벨로크가 박혀있던 검을 뽑아서 등에 멨다. 씨익 웃은 카라가 눈짓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죽일 거야?”

고개를 돌리자 카르벤의 영주가 공포스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주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제··· 제발 살려주시오. 나, 나는···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난 그저···”

“죽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델이 검집을 매만지며 말했다. 지금은 겁에 질려있다지만, 언제 앙심을 품고 일행의 뒤를 노릴지 몰랐다. 더군다나 주문 막이 갑옷의 존재 여부까지 알고 있으니.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것이다.

그러나 카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찝찝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영주를 바라봤다.

“내가 보기에 이 자는 사악한 마법사의 꼬임에 넘어간 것뿐이야. 무저항의 상대를 죽이는 건 조금 그렇지 않아?”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다. 죽이는 것만큼 확실한 입막음은 없다.”

“도망친 병사들은? 그들로부터 소문을 들은 성내의 다른 사람들은? 그들마저 다 죽인다고? 무고한 자들의 피가 셀 수도 없을 만큼 흐를 거야. 우리는 미치광이 살인광들이 아니야. 정도를 지켜야 해.”

“자비는 여유에서 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그게 네 목을 조를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건···”

아델의 냉정한 말에 카라가 말끝을 흐리자, 카르벤 영주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의자에서 내려온 그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 아닙니다! 맹세코 여러분들에게 보복하지 않겠습니다. 내, 내 이름을 걸겠습니다!”

카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벨로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결정은 리더님이 하시는 거지. 우리는 그저 따를 뿐.”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두 사람의 말 전부 다 일리가 있었다. 그의 검은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영주의 눈을 길게 주시했다.

짜리몽땅하고 남한테 휘둘리며 가신의 꼬임에 넘어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저지른 사내. 벨로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벨업 덕분일까. 아니면 대단한 갑옷을 손에 넣어서 그럴까. 그는 어째선지 카라의 손을 들고 싶어졌다. 변덕이라고 해도 좋았다. 벨로크가 말했다.

“부디, 그 맹세가 가볍지 않기를 바라지. 따지고 보면 부하들을 시켜서 우리들을 먼저 협박한 건 당신이니까 말이오.”

카르벤 영주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저 멍청이의 말을 믿은 내 잘못입니다!”

“그래, 다음부터는 부하들도 좀 가려 뽑도록 하시오. 내 뒤에는 교회가 있다는 것도 잊지 말고.”

벨로크의 말에는 사실 어폐가 조금 있었다. 그냥 교회의 신원보증서 한 장과 성기사 한 명이 끼어있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언어란 것은 본디 어떠한 상황에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서 그 여파가 달라졌다. 겁에 질린 영주의 협박 용도로는 충분하리라.

영주의 어깨를 한 번 토닥여준 벨로크가 몸을 돌렸다. 아델은 끝까지 영주를 노려봤지만, 이윽고 주인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마구간에 맡겨둔 말을 찾고는 도시를 떠났다. 도개교를 넘어 대로를 향할 때까지 성벽 위에서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직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건지 경비는 그들에게 꾸벅 인사할 뿐이었다.

“카르벤에서의 생활은 즐거우셨는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나리들.”

벨로크는 고개를 슬쩍 움직여서 옛 요정들의 땅과 인간들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 난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숲속으로 들어가는 모험가들과 뒤늦게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칼잡이들이 보였다. 저들은 도전자들이었다.

금붙이라도 주웠는지 히죽 웃는 얼굴로 숲을 빠져나오는 자들과 그들을 흥겹게 맞이하는 상인들도 보였다. 저들은 무언가를 이뤄 낸 사람들이었다.

벨로크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그 또한 쏠쏠한 수익을 얻어냈다.

목표로 했던 룬검과 룬아머는 얻지 못했지만, 주문을 막아내는 갑옷을 얻었고, 대마법사가 남긴 마도서의 봉인을 해제했으니까.

보물을 탐하는 도굴꾼으로서의 순위를 매기자면 순위권에 들 만할 것이다. 그는 이참에 기사질은 때려치우고 모험가로 전직을 하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가진 무력을 바탕으로 낯선 땅을 돌면서 황금과 보석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마법 물품도 얻을지 몰랐다.

무한한 물이 샘솟는 수통 같은 건 어떨까? 그걸 가지고 사막 왕국 아리안으로 가서 물을 파는 것이다.

피식 웃은 벨로크가 망상을 멈췄다.

그가 가야 할 길은 괴물과 악마를 쳐 죽이는 길이었다. 여기에 꿈과 낭만 따위는 없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일행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마침내, 카르벤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게 되자 카라가 입을 열었다.

“별 이상한 놈들 때문에 말이 끊기긴 했는데. 전에 내가 말했었지? 대악마가 숨어있는 거처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추적주문 말이군.”

“맞아. 벨로크. 그 반지를 좀 보여줄래?”

벨로크는 품속에서 검은색 보석 반지를 꺼냈다. 카라한테 건네려 하자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대악마의 기운이 가득 담긴 물건이야. 신의 축복도 받지 못한 나는 그걸 만지고 싶지 않아. 내가 미치는 꼴을 보고 싶어?”

머쓱해진 벨로크가 반지를 자신의 손바닥에 올리자, 카라가 로브 자락을 젖혔다.

받쳐 입은 천 옷 아래, 밧줄에 꿰인 마도서가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얄상한 손으로 마도서를 펼친 그녀가 말했다.

“네 갑옷에 주문을 새기던 중 일어난 일이야. 이 녀석이 빛을 뿜어내더니 저절로 열려버렸지. 네 말마따나 이 책은 굉장해. 그야말로 신비한 주문들이 가득이야. 이것만 있다면 나는··· 참.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홀린 듯이 책을 보던 카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책의 구절을 읽으며 입술을 핥은 카라가 벨로크의 손에 들린 반지를 향해 주문을 부렸다.

그 순간. 벨로크의 갑옷 문양이 번쩍였다. 카라의 주문을 흡수한 것이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이 되었다.

아니, 네가 만든 건데 네가 모르면 어떡해. 벨로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카라는 음. 하며 머리카락을 꼬다가 다시 말했다.

“그 갑옷에 대해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봐. 너한테 위해가 될 만한 주문만 아니면 상관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추적주문도 일종의 위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끝을 흐린 카라가 아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델. 네가 저 반지를 들고 나를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벨로크의 손에 있으면 내가 주문을 걸 수가 없어.”

“어떻게 할까요?”

아델이 허락을 구하자. 고개를 끄덕인 벨로크가 손에 들린 반지를 넘겨주었다.

파지직 하며 스파크가 일었지만, 아델은 인상을 찡그리며 이를 참아냈다. 이윽고 두 여인은 벨로크를 남겨둔 채, 말을 몰아서 저 앞으로 나아갔다.

주문을 외우는 카라의 나지막한 목소리, 빛이 번쩍이는 광경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눈을 슬쩍 감았다. 레벨업을 했으니, 스텟과 스킬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스텟은 뒤로한 채, 일단 스킬부터 살폈다.

‘기사의 검술’ ‘꺼지지 않는 투지’ ‘육감’ 세 개의 스킬과 함께 네 개의 스킬 포인트가 보였다.

벨로크는 고민할 것도 없이 투지를 찍었다. 악마란 본디 요상한 비술들을 사용하며, 그 기괴한 외형으로 인간의 공포심을 파고든다. 놈들을 상대할 때는 굳건한 육체만큼이나 강력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벨로크는 한층 더 견고해진 정신을 뒤로한 채, 스텟을 살폈다. 원래라면 따질 것도 없이 힘이었다. 하지만, 요 몇 주간의 여정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었다.

자신은 인간이었다. 먹거나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지치는 인간. 물론 범인보다 몇 십 배는 뛰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것도 언제 한계를 맞이할지 몰랐다.

그렇기에 벨로크는 체력을 찍었다. 그러자 몸의 피로가 대번에 풀리고, 혈관이 요동쳤다.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는 것도 느껴졌다.

그 옛날에 로벤에서 체력 스텟을 처음 찍었을 때하고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이것도 괜찮은데? 벨로크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 말 듣고 있어? 벨로크?”

벨로크는 슬쩍 눈을 뜨며 내면 속 세계에서 벗어났다. 반지에 주문을 새기는 것을 끝냈는지, 카라와 아델이 돌아와 있었다. 벨로크가 눈을 한 번 끔뻑거리고는 물었다.

“뭐라고 했지?”

카라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억지로 짓는 웃음에 가까웠다.

“네가 무슨 마법사야? 말 위에서 명상을 하게.”

“기사의 의식이라고 해두지. 그래서 놈의 위치를 알 수 있겠나?”

“벨로크님 그게···”

아델이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카라 또한 난감한 기색으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벨로크가 다시 물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나?”

카라가 중얼거렸다.

“수도야.”

“음?”

한숨을 내쉰 카라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악마. 아스타로트. 놈은 현재 왕국의 심장부에 있어.”

벨로크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 년은 대체 왜 거기 박혀 있는 거지?

“안 좋은 예감이 드는군.”

설마하니 악마가 된 왕을 때려잡아야 하는 일은 안 생기겠지? 벨로크는 진심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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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이 내려온 직후 수도에 있는 모든 교회가 들고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해명은커녕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계시죠. 아니, 아예 왕궁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막아버리셨습니다. 지금 수도의 상황은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군요.“

배 튀어나온 상인의 열변에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좀 더 말해보라는 듯 입을 열었다.

“신탁의 내용이 뭐였나?”

상인이 헛기침했다. 이윽고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으며 말했다.

“거대한 악이 그 총명한 눈을 가리니, 곧 망조가 다가왔음이라. 시신이 산을 이룰 것이고, 피가 바다를 적시리라. 그를 경계하라. 그는 너희 모두를 파멸시킬 것이다. 사자의 심장이 땅에 떨어졌다.”

“끝인가? 그것만 가지고 이 땅의 지배자를 의심한다고?”

상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도 모르는 이 젊은 기사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요 몇 달간. 수도에서 열린 공개 처형식만 수 백 건이 넘습니다. 그렇게나 인자하고 현명하시던 분이 이렇게 바뀌다니요? 악마의 농간이라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죠. 그게 아니라면··· 신탁은 그저 구실일지도 모르죠. 왕의 폭정에 대해서 항거할 수 있는 구실이요.”

“그렇군. 고맙네.”

“별말씀을요. 혹시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지요? 아리안 산 포도주도 있습니다요.”

“아니, 목적지가 가까워서 그렇게나 많이는 필요 없을 것 같군. 수고하게.”

“나리들도 살펴 가십시오.”

꾸벅 고개를 숙인 사내를 뒤로한 채, 벨로크 일행은 다시금 말에 올랐다.

소문에 능통하던 식료품 상인들의 마차도 덜그럭거리면서 멀어졌다.

벨로크는 안장에 매달아 놓은 가방을 뒤졌다. 이윽고 상인에게서 산 육포를 하나 꺼내고는 입에 물었다.

턱이 빠질 정도로 질겅거리고, 짭짤했지만 그는 이게 껌이라도 되는 양 씹어댔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건 카라와 아델 또한 마찬가지인지 두 사람 다 입을 열었다.

“사자왕을 죽이는 건 악마에 씐 영주를 죽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야. 그가 진짜 악마든 아니면 광증이 도진 인간이든 상관 없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거야.”

“욕심 많은 상인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요. 아직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소문도 근거가 있기에 퍼지는 거야. 더군다나 대악마의 기운이 담긴 반지도 수도를 가리키고 있잖아? 어쩌면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지도 몰라.”

이런 겁쟁이 같으니. 아델이 카라에게 한 마디 쏘아주려는 순간. 우물거리던 육포를 꿀꺽 삼킨 벨로크가 말했다.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최악을 가정하고 움직이도록 하지. 소문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왕의 군대와 대악마의 군대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니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의 스케일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제는 기사 둘과 마법사 하나만으로는 사태의 해결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소문대로라면 그들에게도 길은 있었다.

왕이 악마에 씌였다는 신탁이 내려왔으니. 교회들이 나설 것이다. 왕을 갈아치우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기 위해 권력을 탐하는 영주들 또한 몰리겠지. 진흙탕 싸움이 될 것이다. 뭐가 됐든 수도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이 자명했다.

자신들은 그 틈을 노려 대악마를 죽이면 된다. 그래, 참 쉽겠군. 벨로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세상은 대체 왜 이런 꼴일까?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벨로크는 다시금 생각에 잠겨 들었고, 카라는 마도서를 펼쳐서 새로운 주문들을 탐독했다. 아델 또한 기도문을 펼쳐 들었다.

다들 제 나름대로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듯 말들 또한 별 다른 투정 없이 느릿하게 걸었다.

하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세 사람은 곧 아드리아 왕국의 수도이자 대악마가 암약하는 도시. 아스크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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