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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49화 (4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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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설계도라고 거창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이건 주문서로 봐야 해. 내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은 마법이거든. 자존심 상하지만, 나는 이걸 보조할 뿐이야. 그러니까···”

벨로크는 카라가 들고 온 주문서가 한 장이라는 것과 그녀가 아델과 자신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갑옷 하나에 밖에 새길 수 없다는 건가?”

“···맞아. 그러니까 두 사람이 결정해. 누가 전설 속에 나오는 마법 갑옷의 주인이 될지.”

한 템포 늦게 카라의 입이 열리고, 벨로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양자택일이군. 잠깐 고민을 좀 해보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벨로크의 뒤편으로 다가간 아델이 그의 갑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퍽 익숙한 손길이었기에 벨로크는 자신도 모르게 벌거벗겨 저버렸다. 탱그랑 울리는 쇳소리를 뒤로한 채, 느릿하게 한숨을 쉰 벨로크가 물었다.

“괜찮겠나?”

“주인의 것을 탐하는 종자가 세상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너는 이제 종자가 아니다. 헬레나의 성기사 아니냐?”

등 뒤에서 머리카락이 스치는 감촉과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쯤 되시면 제가 무슨 대답을 할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벨로크도 피식 웃었다. 말하는 게 늘었군.

“여신이 알면 슬퍼하겠는데.”

“억지로 받은 힘이니. 전 잘못 한 거 없습니다.”

아델의 충성심과 벨로크의 배려심. 그로 인해 파생된 두 사람의 유대관계는 분명 보기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카라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을 뿐. 마법사가 손짓했다.

“결정된 것 같네. 갑옷은 저곳에 놔둬 주고, 두 사람은 잠시 나가 있어. 약 하루 정도 걸릴 거야.”

카라의 축객령과 함께 돌문이 쿠르릉 닫혔다. 예의 없는 작태에 아델은 한 소리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물품에 마법을 새긴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닐 테니까. 하물며 벨로크님을 위해서가 아닌가?

그래, 기사인 내가 이해해주지. 까칠한 주문쟁이 같으니. 아델이 속으로 궁시렁 거릴 때. 공동에 있던 이자벨이 그들을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요? 무언가 잘 안 풀렸어요?”

한층 후련해진 목소리, 피투성이가 된 얼굴과 머리칼. 스트레스 한번 거하게 푼 모양이군.

“아니, 잘 풀렸다. 마법사의 실험에 기사는 필요 없으니까.”

고개를 저은 벨로크가 구석에 던져놨던 배낭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수통과 헝겊을 꺼내더니 복수를 마친 요정에게 휙 던졌다.

이자벨은 묘한 표정으로 벨로크를 바라보다가 곧 손에 들린 헝겊에 물을 적셔서 얼굴을 벅벅 닦았다. 살색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야 좀 보기 괜찮군. 고개를 돌린 벨로크가 가방을 좀 더 뒤적거렸다.

전투가 끝난 직후라 그런가. 배가 고팠다. 그렇다면 이 굶주림을 채워야 했다. 전투력을 보존해야 했으니까.

괜히 기사의 덕목 중 하나가 잘 먹고 잘 쉬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알아차린 아델이 가방에서 부싯돌과 장작을 꺼내 들었다.

“불을 피우겠습니다.”

“확실히 그게 낫겠군.”

벨로크는 입에 빵조각 하나를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이 들지 않던 숲, 마법등이 켜져 있는 석실. 그들이 지나온 장소는 하나같이 시간개념을 박살내는 공간들이었다.

아마 지금쯤 바깥에서는 날이 저물었으리라. 다음 날을 위해서라도 일행은 식사와 휴식을 취해야 했다.

‘카라는··· 뭐, 괜찮겠지.’

벨로크가 잠깐 닫힌 석문을 힐끔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법이었다. 마음 한편에는 혹여 자신이 끼어들었다가 실험이 실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다.

그 순간. 부싯돌이 딱 소리를 내고 불똥이 튀었다. 아델이 입김을 불자.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석실 안에서의 야영이 시작되었다.

두 기사와 요정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스튜가 담긴 냄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꼬챙이에 꿰인 육포가 불길에 그을렸다.

스튜는 짜고 텁텁했으며, 육포에서는 노린내가 났다. 하지만, 야전에서는 이것도 사치였다.

일단은 불을 피우고 데운 음식을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몸의 피로가 풀리는 법이니까. 숙련된 전사이자 능숙한 살인자들인 세 사람은 이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먹었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괜찮군.”

벨로크의 까다로운 입맛 또한 이곳에서의 생활을 거칠수록 점차 무뎌졌으니 나름 괜찮았다. 인간의 적응력은 역시 놀라웠다.

배낭을 깔고 앉은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스튜만 퍼먹었다. 그 고요는 이자벨이 배낭에서 술 한 병을 꺼내자 깨졌다. 그녀가 술병을 흔들며 말했다.

“요정술이에요. 인간들 사이에서는 나름 귀하게 대접받는 물건이죠. 한 모금?”

“좋지.”

벨로크는 거절하지 않았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밍밍한 맥주나 싸구려 포도주 같은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 분명했다.

음주를 기사의 덕목 중 하나로 알고 있는 아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낡은 주석 잔에 투명한 술이 한가득 채워졌다. 이자벨이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들은 이 술을 요정의 눈물이라고도 부르더군요. 아마도 색깔 때문일 거에요. 하지만, 이 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모르는 게 약이라 이거군.”

피식 웃은 벨로크가 술잔을 내밀었다.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잔 세 개가 짤랑 부딪치며 서로의 식도로 넘어갔다. 딱딱한 빵을 안주 삼아 몇 번이나 술을 들이켰을까.

불쑥 찾아드는 생각에 벨로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정은 침울한 얼굴로 연거푸 술을 마시고 있었고, 얼굴이 조금 빨개진 아델이 고개를 들었다.

“벨로크님?”

“잠깐 확인해볼 게 있다.”

걸음을 옮긴 벨로크가 공동 곳곳에 널려있는 망자들의 잔해를 뒤적거렸다. 이놈이 어디 갔지? 몇 번을 휘젓자. 마침내. 벨로크는 자신이 목표로 했던 녀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전직 기사라고 보기에는 명예롭지 못했으며, 도적이라 부르기에 더 어울렸던 듀라한의 머리를. 하지만 부릅 뜨여있던 녀석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았으며, 살점마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죽었군.”

어쩐지 경험치가 올랐더라. 그 여자가 죽으면서 같이 죽은 건가? 그렇다면 대체 왜 살려 달라 한 거지? 내가 그 여자한테 죽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이 사실을 몰랐던 걸까. 이러면 내가 약속을 지킨 것인가? 못 지킨 건가?

벨로크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미 죽어버린 존재가 답을 줄 리가 없었다. 벨로크가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찌 됐든 세상에 존재하는 사악한 괴물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야영지로 돌아온 벨로크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잠깐 사이에 두 사람끼리 잔을 주고받았는지. 아델은 고개를 처박고 졸고 있었고, 이자벨의 얼굴은 더 빨개져 있었다.

슬쩍 손을 뻗어서 아델을 편하게 눕힌 벨로크에게 이자벨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며 잔을 권했다.

“한잔 더?”

벨로크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술을 한 모금 마시자, 앞에서 걸쭉한 욕설이 들려왔다.

“시발. 개 같은 마녀 같으니··· 로엔, 칼, 크리스. 모두... 살아만 있었다면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녀석들이었어. 다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친구들이 아니었다고.”

글쎄. 열정이나 의욕만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이 좀 가혹한데.

벨로크는 굳이 자신의 생각을 꺼내서 분위기를 흐리지 않았다.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까 죽였던 마녀의 전리품들을 살폈다. 기이한 빛을 뿜어내는 반지와 지팡이는 바닥에 내려두었다. 혹시나 저주라도 걸릴지 모르니까. 벨로크가 피 묻은 수첩을 펼쳤다.

내용은 별 게 없었다.

어릴 때부터 마법에 두각을 드러냈던 플로라는 마탑에 들어갈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금지된 주문에 손을 대었고, 마탑에서 파문당했다.

결국 사령술사가 돼서 대륙을 떠돌던 플로라는 곧 마녀들의 집회 스콜라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대악마와 거래하고 그녀로부터 명령을 받아 옛 요정들의 숨겨진 유적지인 이곳. 대마법사 아낙스의 거처로 들어와···

벨로크는 수첩을 접었다. 뒤의 내용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니까. 대신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 이자벨에게 물었다.

“이자벨. 멀쩡한가?”

“···물로온.”

이자벨이 크게 소리쳤다. 아닌 것 같은데. 오히려 잘 되었나? 벨로크가 말했다.

“아낙스라고 알고 있나?”

이자벨이 초록색 눈을 빛냈다.

“아낙스! 그 이름을 모르는 요정들은 세상천지에 없을 거예요. 그녀, 아니 그분은 요정들 사이에서 전설로만 내려오는 존재니까요. 대마도사 아낙스. 스스로의 힘으로 천상으로 올라간 자.”

“천상? 신들이 사는 곳?”

“대단한 업적을 쌓은 영웅들이 홀연히 사라질 때가 있죠. 병마나 죽음이 아닌, 말 그대로 증발해버리는 거예요. 우리들은 이를 가리켜 신들의 부름을 받아서 떠났다고 해요. 그럴듯하지 않아요? 아직까지 돌아오신 분들이 없기에 뭐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요정들은 그렇게 믿어요.”

신들의 부름을 받은 전사. 북유럽 신화나 뭐 이런 건가?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피워놓은 모닥불이 타닥 튀기며 석실에 짙은 그을음을 남겼다. 돌바닥과 지하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일까. 불꼬리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벨로크가 장작 몇 개를 더 집어넣었다. 그러자 먹이를 씹어 삼킨 녀석이 맹렬히 타올랐다.

실마리가 풀렸다. 대마법보호막과 마도서 갈드라보크는 요정 대마도사의 유물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물건의 유래를 알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의 목표는 여전히 건재했으니까.

대악마 아스타로트. 추적자들의 동선으로 봤을 때. 놈이 왕국 안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왕국도 넓었다.

대체 어디서 놈을 찾는단 말인가? 아니, 설령 찾았다고 해서 죽일 수 있을까? 녀석은 수 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뛴 괴물이었다. 대마도사의 유물이 강력하고, 그의 육체가 아무리 강건하다고 해도··· 기사의 상념은 거기서 멈췄다.

요정 여인과 헬레나의 성기사가 코를 골아댔기 때문이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고약하며 거친 소리였다. 피식 웃은 벨로크가 모닥불에 장작 하나를 더 넣었다.

불똥이 툭 튀며, 소용돌이 같은 화풍이 눈을 사로잡았다. 마치, 빨려들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벨로크는 한동안 홀린 듯 불꽃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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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됐어! 자. 한 번 입어봐.”

벨로크는 아델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갑주를 입었다. 그의 갑옷은 원래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대마법보호막을 새기자. 검은색 바탕의 철판 위에 기묘한 문양들이 양각된 갑옷으로 변해버렸다.

아델이 신나는 얼굴로 손뼉을 쳤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그야말로 벨로크님의 품격에 걸 맞는 물건입니다.”

안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 체구가 강대한 벨로크였다. 그런 상태에서 신비로워 보이는 갑옷까지 입자,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아름답군요.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아요.”

이자벨 또한 입을 벌리며 감탄했고, 눈 밑이 검게 물든 카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스크롤을 새기자, 주문막이는 물론, 갑옷 자체의 보호력까지 올라갔어. 아마··· 현존하는 갑옷 중 최고라고 봐도 좋을 거야. 어디 왕실의 보고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아.”

벨로크는 팔과 다리를 슬쩍 움직여보았다. 전의 갑옷처럼 여전히 편했다. 그냥 그림만 칠해 놓은 것 같았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 갑주라고?

실감이 안 나는군. 한 번 시험해봤으면 좋겠는데. 속마음을 숨긴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별말씀을··· 안에 있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 만으로 큰 도움이 됐는걸. 주문서들도 좀 챙겼고, 그 책의 봉인도 풀렸···”

신나서 말을 하던 카라가 이자벨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입을 다물었다.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이자벨은 머리를 짚으며, 헛구역질을 할 뿐이었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다 끝난 것 같으니. 출발하지.”

카라가 한층 볼록해진 자신의 짐을 메고, 나머지 일행 또한 짐을 챙긴 채, 유적을 빠져나갔다.

술자가 죽었기 때문일까. 숲은 고요했다. 들어올 때 숱하게 보았던 좀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덕분인지 나가는 길은 손쉬웠다. 카르벤의 성문이 금방 보였다. 그 순간. 이자벨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바로 떠날 셈인가?”

“네. 일단은 다른 동족을 만나서 지금의 상황을 알려야죠. 당신들한테는 큰 은혜를 입었어요.”

“어제 먹은 술값으로 받은 셈 치지.”

피식 웃은 이자벨이 품을 뒤져서 목걸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초승달 문양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목걸이였다. 벨로크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건?”

“혹여 요정들과 마찰이 생긴다면, 그걸 보여주세요. 절대 홀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교회의 추천서 같은 건가? 벨로크가 생각 할 때. 고개를 꾸벅 숙인 이자벨이 자리를 박찼다.

세 사람은 떠나는 요정을 뒤로한 채, 카르벤의 성문을 넘고는 곧장 여관으로 향했다. 마구간에 맡겨둔 말을 되찾기 위함이다. 가는 도중 카라가 말했다.

“대악마의 거처를 알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내가 말했었나? 이 책의 봉인을 풀었다고. 실험을 하는 도중 저절로 풀리기는 했는데. 그야말로 대단한 주문들이 즐비해. 그중에서 추적 주문 또한 있었어.”

벨로크가 품속에 넣어둔 검은색 반지를 꺼내 들었다. 대악마와 계약했다던 여인의 유품이었다.

“그렇다면 이걸 이용해서 놈의 행적을 알 수 있다는 건가?”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위험한 물건이니까. 일단 성기사인 아델이 반지를 쥐고, 내가 그 힘을 추적···”

“멈추시오!”

카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목에서 튀어나온 병사들이 일행을 포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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