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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48화 (4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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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이자벨의 목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돌아갔다. 이글거리는 눈을 한 요정이 피 묻은 검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벨로크의 앞을 막아선 아델이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뽑으며 말했다.

“이 비열한 귀쟁이가. 이제 와서 주인행세를 하려는 건가?”

이자벨의 걸음이 툭 멈췄다. 요정의 초록색 눈동자가 벨로크 일행을 지나서, 머리가 날아가고 반 토막 난 여인의 시체로 향했다. 고개를 슬쩍 저은 그녀가 말했다.

"몇 달 전부터 왕국에 역병이 퍼졌어요. 검은 반점, 기침, 오한 등이 대표적인 증상이었죠. 요정들에게만 퍼진다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어요. 감염성이나 치사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 생각은 오판이었어요. 치료법이 없는 게 문제였죠. 왕국의 내로라하는 의사나 마법사, 사제들조차 그 병을 고치지 못했거든요. 이대로 가다가는 요정왕국의 몇천 년 역사가 열병 하나에 사라질 위기였죠.”

남쪽 끝자락 나스 밀림에 위치한 요정왕국의 상황에 카라는 흥미로운 기색을 내비쳤고, 벨로크는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델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차이는 하나였다. 아델은 자신의 생각을 곧장 입 밖으로 뱉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동정이라도 해달란 거냐?”

이자벨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왕국 내에서 방법을 찾지 못하자. 저희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어요. 아드리아 왕국, 동쪽의 아리안, 서쪽 신성왕국이랑 북부 야만인들의 땅까지. 수많은 동족이 사명을 띤 채, 전역으로 흩어졌죠. 그중에서 이곳 흐르는 숲으로 향한 동족들도 있었고요.”

이자벨이 부릅뜬 눈으로 여인의 시체를 노려봤다.

“나도 그중에 한 명 이었어요. 사정이 있어서 뒤늦게 합류했었죠. 설마하니, 그게 내 목숨을 살릴 줄은 몰랐죠. 나는 비겁자에요. 무력하게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이방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한칼을 거들었을 뿐인 비겁자. 내 손으로 저 원수의 목을 베지도 못하다니···”

허탈함과 비통함이 섞인 요정의 음성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대로면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숲의 지도를 가지고 있던 것도, 목적을 숨긴 채, 합류를 요청한 것 전부다.

생각보다 어깨에 짐이 많은 여자였군. 그런데 지금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지?

“그래서 이 말을 꺼낸 이유가 뭔가?”

벨로크의 질문에 입가를 일그러트린 이자벨이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락해주신다면 저년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고 내장마저 토막 내서 동족들의 묘비에 바치고 싶어요.”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겨우 그거였어?

“유적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은 게 아니라. 고인능욕이 하고 싶단 거로군.”

이자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진실을 밝힌 것은 동족들의 복수와 우리들의 옛땅을 정화해준 영웅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마녀의 시체를 인도받기 위함입니다. 이 땅의 악귀들을 몰아낸 건 당신들입니다.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승자의 당연한 권리죠.”

이제 보니 정신머리는 제대로 박힌 여자였군. 잠시, 이자벨의 진지한 시선을 마주하던 벨로크가 쪼그려 앉아 여인의 품을 뒤졌다.

반 토막이 났기에 챙길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아까 전에 눈 여겨 보았던 해골 지팡이와 검지에 끼인 반지, 가죽 표지의 노트 한 권은 챙길 수가 있었다. 허리를 편 벨로크가 말했다.

“이건 이제 쓸모가 없으니. 마음대로 하도록. 네 말마따나 망자들의 넋을 달래는 데 사용해도 좋겠군.”

“고마워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이자벨이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겠지. 그녀가 앞으로 할 행동을 알고 있기에 벨로크가 카라를 툭 쳤다. 닫혀있는 문을 열란 뜻이다.

카라 또한 같은 마음인지 재빨리 주문을 외우며 문의 봉인을 해제했다. 지팡이에서 빛이 반짝이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석문이 쿠르릉 열렸다. 떨어지는 흙먼지와 돌조각들 사이로 안의 광경이 점차 드러났다.

벨로크는 어째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이 안 되었다. 어쩌면 그가 알던 유물들보다 더한 것들이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마법사인 카라 또한 갈색 눈을 호기심으로 빛내고 있었다.

일행은 요정의 욕설과 칼질 소리, 살점이 토막 나는 소리를 뒤로한 채, 방 안에 들어섰다. 벨로크는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방은 전에 지나쳤던 다른 방들과는 달랐다. 좀 더 수상쩍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댔으며, 서적이나 비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종이 등. 잡동사니들이 더 많았다.

결정적으로 방 안에는 더 이상 다른 곳으로 향하는 통로나 문이 보이지 않았다. 비밀통로 같은 것이 또 있는 게 아니라면 변질석은 이곳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방을 슥 훑어본 카라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 여자가 이미 한 번 털어먹은 모양이야. 무슨 실험도 한 모양인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비커와 무언가를 기입 해놓은 듯한 뻣뻣한 새 종이. 먼지 하나 없는 서적들은 이미 사람의 손길이 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설마하니 변질석을 무슨 실험에 써먹은 것은 아니겠지? 벨로크가 걱정할 때. 아델이 물었다.

“뒤져볼까요?”

“아니.”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조바심이 일었지만 이런 일은 원래 전문가한테 맡겨야 했다.

“마법사의 방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겠지. 카라한테 맡긴다.”

카라가 슬쩍 웃었다.

“고대의 마법사가 남긴 유산이 손상되는 건 슬픈 일이지. 내가 부탁하고 싶었던 건데. 알아줘서 고마워.”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지팡이를 꾹 잡은 카라가 눈을 빛냈다.

“두 사람은 쉬고 있어. 변질석이나 무언가 특별한 것을 발견하면 곧바로 말해줄게.”

“부탁한다.”

고개를 끄덕인 벨로크가 바닥에 주저앉자. 아델 또한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투구를 벗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방안을 뒤적거리고 있는 카라에게서 옆으로 옮겨졌다. 아델이 말했다.

“벨로크님.”

“응?”

“무엇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축 늘어진 단발머리를 한 아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딴에는 순한 표정을 지은 것이지만, 찢어진 눈꼬리로 인해 한 성격하는 여인으로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벨로크에게는 이제 가족처럼 익숙한 모습이었다. 벨로크가 부드럽게 웃었다.

“뭐든지.”

“전에 오커영지에서 벨로크 님이 말씀하셨죠. 강해지게 해주겠다고 다 방법이 있다고. 이 유적지가 원래의 그 목표였지 않습니까.”

악마와의 격차 때문에 아델이 무력감에 휩싸였을 때 해준 말이었다.

벨로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룬검과 룬아머만 얻는다면 너도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변질석이란 것이 이곳에 그렇게 많습니까?”

“우리 두 사람이 쓰기에는 충분한 양이라고 알고 있는데.”

카라는 인챈트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였으니. 그녀의 도움을 받아 갑옷에 하나 박아 넣고, 무기에 하나 넣으면 끝이다. 벨로크가 생각하고 있을 때. 아델 또한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저는 이미 여신의 성력을 받았습니다. 벨로크 님이 다 써주십시오.”

“두 사람분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후일을 대비해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아직도 하멜른에서의 일을 담아두고 있는 건가?”

“그건···”

아델이 말끝을 흐리자.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점점 여신의 성력을 자유롭게 다루는 동시에 강해지고 있었다.

악마가 습격해왔을 때도 그렇고, 방금 전도 듀라한 한 구를 혼자서 잡아내지 않았던가. 아델이 성기사가 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벨로크가 말하려는 순간. 카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하나씩 있어. 뭐부터 들을래?”

말에 담긴 내용도 그렇지만, 그녀의 표정이 심각했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양자택일이라니, 안 좋은데. 이런 면에서는 소시민적인 태도를 못 버린 벨로크가 말했다.

“안 좋은 소식부터 듣지.”

“네가 말했던 변질석을 비롯한 유물들이 없어. 정확히는 사라졌다고 봐야겠네.”

밖에서 이자벨이 욕하는 것처럼 벨로크도 속으로 욕했다. 설마하니 또 비밀방 같은 공간을 찾아야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아까 전 실험이니 뭐니, 외쳐대던 마녀가 손을 쓴 건가? 의문을 접어둔 채, 벨로크가 물었다.

“좋은 소식은?”

굳어있던 카라의 얼굴이 슬며시 펴졌다. 그녀의 목소리 또한 부드럽게 풀어졌다.

“네가 목표로 했던 룬아머나 룬검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나가는 걸 찾았어.”

사람 좀 놀래킬 줄 아는군. 벨로크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대체 어떤 거지?”

“자. 이걸 봐.”

카라가 웬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벨로크가 이를 살폈다. 옆에 있던 아델 또한 눈을 굴렸다. 종이에는 그들이 처음 보는 신기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옆에는 지렁이 같은 알 수 없는 글씨들이 적혀있었다. 룬어를 모르는 아델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뭘 보란 거냐? 지금 마법사라고 자랑하는 거냐?”

헛기침을 한 카라가 종이를 슬쩍 뒤로 뺐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펴 그림을 집으며 말했다.

“미안. 그러니까 이건, 주문막이의 갑주를 만들 수 있는 설명서야. 즉··· 대마법보호막이지.”

“보호막? 이름만 들어보면 무언가 굉장한 게 나온 것 같은데?”

벨로크의 물음에 카라의 목소리 톤이 커지며, 갈색 눈이 열망으로 번뜩였다. 그녀는 지금 세기의 발견을 한 기분이었다.

“쉽게 말해서 갑옷에 보호막 주문을 새길 수 있다는 거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겠어? 주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사가 될 수 있는 거라고.”

특출나게 강력한 몇몇 주문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술을 막아낸다는 전설 속의 갑옷. 이야기책에서나 나오는 보물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가 지금 그녀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흥분한 카라가 말을 이었다.

“이 유적에 먼저 침입했었던 그 여자 역시. 저 설계도를 발견한 게 틀림없어. 방 안에 있던 변질석이나 유물을 이용해서 먼저 실험을 한 모양새더라고. 오히려 잘됐어. 덕분에 재료는 갖춰졌으니, 입히기만 하면 끝이야.”

카라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벨로크와 아델 또한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힘과 권력 좀 있는 영주들이 왜 곁에 마법사를 두겠는가?

전부 다 그들이 가진 괴상한 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기상천외한 주문들이 존재하는 만큼. 그 위험성도 어마어마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 전부를 막아낼 수 있다고?

눈에 이체를 띈 벨로크가 물었다.

“바로 시작할 수 있나?”

“물론.”

카라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에는 마법진을 그리는데 필요한 도구들은 물론, 각종 비약이나 촉매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마치, 방의 원주인만 사라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뭐지?”

두 사람을 바라보던 카라가 미안하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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