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숲의 주인
“겁먹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은 칭찬해주지. 찾으러 갈 수고를 덜었어.”
비웃음을 머금은 여인이 끼고 있던 팔짱을 슬쩍 풀었다. 로브의 소매가 내려가며 가녀린 손목이 엿보였다. 그 덕택일까. 여인의 손에 잡힌 흉물이 더 눈에 띄었다.
인골을 깎고 이마에 보라색 보석을 박아 넣은 요사스러운 지팡이였다. 값 좀 나가 보이는데? 벨로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성기사랑 요정년은 구울 먹이, 떡대랑 마법사는 실험재료로 쓰기 딱 이군.”
크아아아
여인의 말에 화답하듯 주위에 있던 언데드들이 괴성을 질렀다. 입 주위가 뜯겨나간 구울이 잇몸 채로 딱딱거렸다. 세 구의 듀라한 또한 푸른 귀화를 뿜어내며 옆구리에 낀 머리통으로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여인의 옆에 떡하니 서 있는 흑기사였다. 시커먼 철갑을 온몸에 두른 채, 거대한 전투 망치를 들고 있는 녀석은 시종일관 흉포한 기세를 뿜어냈다.
이를 본 카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단신으로 영지 하나는 가볍게 초토화 시킨다는 괴물이 눈앞에 있었다.
“죽음의 기사···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게 백년 전쟁 때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걸 여기서 보다니. 환장하겠군.”
여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녀가 손을 뻗어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죽음의 기사를 쓰다듬었다.
“너. 빨강머리 촌년아. 이걸 알고 있는 걸 보니까. 아주 맹탕은 아니군. 그래, 이 녀석은 내가 만든 최고의 걸작이지. 이 근방에서 이름 좀 날린다는 기사들을 잡아 와 실험에 실험을 거쳐···”
쐐애액
여인의 말은 갑작스레 날아온 화살에 의해서 막혔다. 이자벨이 쏜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죽음의 기사가 손을 까딱거리자 간단히 막혀버렸다. 건틀릿 사이에 잡혀 파르르 떨리는 화살대를 보며 일행이 눈을 크게 떴다.
“맨손으로 화살을 잡는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무시무시하군.”
카라가 낭패 어린 음성을 내뱉을 때. 여인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쯧. 그렇게 느려 터져서는 내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해. 숲에 들어와 있던 네 동족들에게 듣지 못한 거니? 아, 이미 다 죽었나?”
“이 마녀가!”
여인이 깔깔거리고 분노한 이자벨이 다시 화살을 쏘려고 할 때. 벨로크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톨리오의 머리통이 들려있었다. 여인이 눈에 이체를 띄었다.
“톨리오. 살아 있었구나. 반갑다. 내 충실한 시종아.”
“주··· 주인님. ”
듀라한 머리가 눈깔을 이리저리 굴리며, 기사와 여인의 눈치를 동시에 봤다.
이 녀석 설마··· 지금 어디에 붙을지 고민하는 건가? 감이 좋은데.
피식 웃은 벨로크가 손에 들린 머리통을 굴리며 장난치듯이 가지고 놀았다. 손에 착 감기는 것이 마치 강철 공 같았다.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는 명백했다. 여인이 말했다.
“젊은 기사야. 톨리오를 나한테 돌려주지 않으련? 내 그렇다면 너한테 보상하겠다.”
“무얼 줄 거냐.”
기사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여인의 입술이 가늘어졌다.
“특별히 고통 없이 죽여주마. 그리고 너를 괜찮은 언데드로 만들어주지. 어떠냐?”
여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상대의 수락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그저 강자로서의 여유를 나타내기 위한 말장난이었다.
“그것참 구미가 동하는군.”
하지만, 이어진 벨로크의 대답에 여인이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건가?
“후후후. 너는 저년들이랑은 달리 말이 꽤나 통하는구나. 그래, 그러면 내 물건을 돌려주겠나?”
“잘 받아봐라.”
벨로크의 손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응? 여인은 웃던 얼굴 그대로 조각나버렸다.
듀라한의 머리가 빗살처럼 날아가 골통을 부순 것이다.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석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머리 없이 기우뚱 넘어가는 여인의 모습뿐이었다.
일순 석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요정 궁수의 화살도 잡아내는 죽음의 기사도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투구 안 녀석의 붉은 광망이 거세게 흔들렸다. 당황한 듯싶었다.
이자벨이 입을 떠듬거리며 물었다.
“주··· 죽은 건가요? 이렇게 쉽게?”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 년도 뭔가 숨겨둔 게 있는 모양인데.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바닥에 누워있던 여인의 시신이 부들부들 떨더니 벌떡 일어났다. 익숙한 전개로군.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목숨이 두 개씩은 되는 모양인데. 벨로크가 혀를 차며 검을 잡았다.
[이런 미친 기사놈 같으니! 너. 대체 뭐 하는 새끼냐! 아스타로트님의 힘을 받은 이래로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은 없거늘.]
사라진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려대는 여인이 벨로크를 손가락질했다. 섬뜩한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주위에 있는 시체들이 더 끔찍하게 생겼다. 벨로크는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그저 석실의 넓이를 쓱 가늠해보고는 자신의 대검을 툭툭 치며 달려 나갔다.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라.”
“가세하겠습니다!”
아델 또한 몸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벨로크를 뒤따랐다. 이에 화답하듯 듀라한 세 기와 죽음의 기사 또한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피조물들을 앞세운 채, 상황을 관조하던 목 없는 여인이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위에 달린 해골이 입을 쩍 벌리며 이마의 보석에서 나오는 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네놈들은 편히 죽을 수조차 없으리라. 영혼마저 가지고 놀며 고문해주겠다.]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음산한 말을 무시한 카라가 손에 들린 얼음창을 던졌다.
여인은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구울 몇 마리가 재빨리 자리를 박차 썩은 몸뚱이로 카라의 주문을 막아냈다.
틈을 노린 이자벨이 화살을 쐈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몸을 방패삼아 때웠다. 결론적으로 피가 튄 로브 자락에 단춧구멍 하나가 추가됐으며, 여인이 꾸미고 있는 모종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혀를 찬 이자벨이 활 대신 검을 뽑아 들고는 전장에 난입했다. 2대1의 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한쪽만 거들어줘도 전투가 한결 수월해질 거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모두 조심해! 적의 주문이야!”
낭패 어린 얼굴을 한 카라가 소리쳤을 때. 여인이 지팡이를 크게 치켜 올렸다. 요사스러운 빛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감쌌다.
죽음의 기사와 듀라한. 두 놈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던 벨로크는 자신의 몸이 갑작스럽게 무거워지자, 인상을 찌푸렸다. 저주인가? 생각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왼쪽에서는 듀라한의 도끼가 오른쪽에서는 죽음의 기사가 망치를 휘둘러왔기 때문이다. 타이밍에 맞춰 동시에 날아드는 것이 꽤나 합을 맞춰본 듯 절묘한 공격이었다.
한쪽을 막거나 쳐내면 곧바로 다른 쪽의 공격에 피떡이 될 상황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전사가 아닌, 벨로크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오감을 집중시켰다. 일순 세상이 느려지며, 녀석들이 휘두르는 무기들 또한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툭툭 끊겼다. 벨로크에게는 그 작은 틈 하나면 충분했다.
저주에 걸려 신체 능력이 저하되었다고 하더라고 그의 육신은 여전히 강건했다. 손에 들린 대검도 장창마냥 기다랗고 성벽처럼 굵었다.
허리를 슬쩍 숙여 종아리와 허벅지를 단단히 받친 벨로크가 한 바퀴 회전했다. 원심력을 얻은 그의 대검이 거칠게 휘둘러지며 망치를 튕겨내고, 듀라한의 도끼마저 튕겨냈다.
째앵
지글거리는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하던 석실 내부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울렸다. 뒤편에서 여인과 주문 대결을 펼치던 카라가 보기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개의 무기가 동시에 튕겨 나가며 녀석들이 주춤 물러난 것으로 보였다.
쿠오오오
대단한 위명답게 죽음의 기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튕겨 나간 망치의 힘을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켰다. 그러고는 다시금 내려찍었다.
벨로크는 대검을 방패처럼 받쳐서 막아냈다. 콰앙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잠깐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직후 무릎으로 대검을 팍 쳐서 놈의 망치를 밀어낸 벨로크가 바닥을 굴렀다.
그의 머리 위로 파공성과 함께 도끼가 휘둘러졌다. 귀가 웅웅 울리고, 전투가 주는 열기로 인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벨로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한쪽 손으로 땅을 짚은 채, 재빨리 일어난 후 대검을 비수처럼 들어 올렸다. 상대의 접근을 막기 위한 거대한 장창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기사는 상체를 비스듬히 틀며 이를 피했다. 그러고는 망치를 휘둘렀다. 뿐만 아니라, 뒤편에서는 듀라한이 도끼를 든 채, 덤벼들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아도 벨로크는 초월적인 오감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상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졌다. 산자에 대한 적의 또한 하늘까지 치솟고 있었다. 죽음의 기사의 붉은 광망이 호선을 그렸다. 이제 곧 인간기사의 육신을 깨부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순간. 죽음의 기사의 오른쪽 어깨가 잘려 나갔다.
“···?”
한층 가벼워진 몸뚱이와 맞지 않는 균형. 바닥을 구르는 전투망치. 그제서야 녀석은 자신의 어깨가 잘렸단 걸 알아차렸다.
당황한 죽음의 기사가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벨로크의 어깨견갑이 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콰아앙
갑옷이 형편없이 우그러진 녀석이 바닥을 굴렀다. 놈이 쓰러진 걸 확인한 벨로크가 짧은 심호흡과 함께 몸을 돌렸다.
코앞까지 날아온 도끼가 보였다. 하지만, 그의 검이 더 빨랐다. 일순 흐릿한 잔상만 남긴 채, 선이 되어버린 대검이 도끼를 가르고 그 주인까지 갈랐다. 몸이 토막 난 듀라한이 쿵 쓰러졌다.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 파스슥 꺼지고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머리가 눈을 비죽 굴렸다. 저건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고. 벨로크가 검을 어깨에 툭 걸치고는 발걸음을 옮길 때. 한쪽 팔만 남은 죽음의 기사가 비명인지 아우성인지 모를 괴상한 소리를 내며 덤벼들었다.
대검이 번뜩였다. 몸이 사선으로 쪼개지고, 투구에서 뿜어지던 붉은 빛이 점멸했다. 벨로크가 시선을 돌렸다. 멀끔했던 가죽 갑옷이 이리저리 헤지고 머리가 산발이 된 이자벨이 정신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가 도끼에 쪼개지기 직전, 벨로크의 대검이 놈의 머리를 갈랐다.
한숨을 쉰 그녀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기사의 강철 건틀릿이 요정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 때 마침. 헬레나의 성기사가 또 다른 망자기사 하나를 재로 만들어버렸다.
침을 퉤 뱉은 성기사가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 카라와 주문 대결을 펼치던 여인이 얼빠진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이 없었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벨로크가 보기에는 그랬다.
[말도 안 돼··· 무력화의 저주가 분명 몸을 휘감았을 텐데? 그 상태로 죽음의 기사를 물리쳤다고? 네놈은 대체···]
제 잘난 맛에 살아가던 놈들이 계획이 틀어지자, 곧 바로 당황하고 만다. 이제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래, 나한테 죽어나간 놈들 전부다 그랬지.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설마 이게 끝인가?”
[뭐···라고?]
“지금까지 상대한 악마 놈들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도 않아. 시체 뒤에 숨어서 인형 놀이나 하는 수준이로군.”
벨로크가 여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 들린 대검이 바닥을 쿠르르 긁으며 섬뜩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 흉측한 기세에 마녀들의 집회. 스콜라의 일원이며, 이 땅을 공포로 물들이던 여인. 플로라가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자신의 검지를 바라봤다.
불길한 빛을 내뿜는 검은색의 보석이 박힌 반지가 보였다. 이 숲의 결계를 파괴하는데 사용했던 대악마가 준 아티팩트이기도 했다. 이걸 사용하는 것은 그녀로서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살고 봐야했다.
[그분의 이름으···]
그녀가 반지 낀 손을 앞으로 내밀며 입을 열려는 순간.
“어딜.”
벨로크가 던진 대검이 여인의 몸통을 갈라버렸다. 피가 푹 치솟고, 바닥이 쿠웅 울렸다. 뻗었던 여인의 손목이 끈 풀린 인형처럼 축 가라앉았다.
“끝났군.”
걸음을 옮긴 벨로크가 여인의 시체에 박혀있던 대검을 툭 뽑았다. 경험치가 들어왔다. 저 마녀가 완전히 죽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여정의 목표를 이룰 시간이었다.
잠시 피떡이 된 여인과 기사가 하던 짓을 바라보던 카라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무자비한 전사가 납셨군.”
“비열한 수작질은 사전에 차단해야 하는 법이죠. 역시 벨로크님 이십니다.”
검을 집어넣고 방패를 등에 멘 아델이 웃으며 손뼉 쳤다.
“다들 수고했다.”
아델의 어깨를 툭툭 친 벨로크가 주위를 둘러봤다. 죽어버린 마녀의 뒤편에 문 하나가 보였다. 그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흐릿하기는 했지만, 저 뒤에 있는 방안에 변질석이 있었던 것 같다.
벨로크가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 자신이 사용하는 이 대검도 보통 물건이 아니다. 그간 수많은 전투를 거쳤지만 이 하나 나가지 않았으니까. 거기다가 영체타입의 악마를 베기까지 했지. 그런 대검에 마법을 부여해서 룬검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얼마나 강해질지 짐작도 안 되었다.
벨로크가 흡족하게 웃었다. 간만에 레벨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강해지는 것이 꽤나 기대가 되었다. 그래, 판타지는 역시 마법무구지.
“내 생각에는 저 안에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물건들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