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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주인
“더러운 주문쟁이놈이··· 감히 벨로크님의 물품에 손을 대다니.”
“그걸 우리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지 싶은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는 짓도 도굴이니까.”
아델이 분개하자 또 다른 주문쟁이가 이마를 긁적였다. 아니, 아닌가? 로브의 품에 넣어둔 마법서를 만지작거린 카라가 말을 바꿨다.
“그렇다고 해도 괘씸해! 녀석 때문에 이 책의 비밀을 못 풀 수도 있는 거잖아?!”
“일이 꼬이는군.”
벨로크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악마들의 훼방에 짜증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숲을 개판으로 만든 것은 그렇다 쳐도, 설마하니 유적지까지 침범했을 줄이야. 재주도 좋다.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놈도 변질석을 노리고 온 건가? 룬검이나 룬아머를 만들기 위해서?”
변질석. 무기나 갑주에 박아 넣을 시, 물품들의 성질을 변화 시켜 특별한 힘을 부여해주는 신비로운 돌. 그 가치가 남다르고 발굴되는 숫자가 워낙 적기에 왕국에서도 애지중지하는 보물. 일행이 이곳에 온 본래 목적이기도 했다.
“네 말만 들어보면 대단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의 안식처 같은데. 그렇다면 꼭 변질석 만이 아니라, 챙길 것은 많을 거야. 남겨진 연구자료라던지, 주문서 등도 있을 테니까. 무슨 속셈이지···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카라가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툭 부러뜨리며 말했다.
“그래, 우리보다 한발 앞선 도둑놈이 있는 상황이지. 어이. 망령의 재림.”
벨로크 또한 긍정하며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톨리오를 탁 쳤다.
“하명하십시오.”
그간 굴리고 던져 대서 그런지. 대답이 즉각 튀어나왔다. 벨로크가 녀석의 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네놈의 주인이라는 녀석이 자리 잡은 유적지로 가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지름길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벨로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자식. 처음의 이미지가 완전히 깨지는군.
“넌 기사라고 보기에는 눈치가 과하게 좋군. 마치 도적 같아. 그래, 네 주인을 팔아넘길 테냐?”
톨리오 냅다 고개를 덜렁거렸다.
“저를 비롯한 몇 명만이 알고 있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간다면 앞의 요정년이 안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네 말을 어떻게 믿을까?”
“요정년이 장님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의 분간은 할 수 있겠지요. 선택은 주인님의 몫입니다.”
이제는 자신보고 주인이란다. 벨로크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말했다.
“안내해라.”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해주십시오. 저를 살려주신다고.”
“이 모가지만 남은 놈이 감히···”
아델이 검을 뽑으려는 것을 제지한 벨로크가 시선을 내렸다. 어두운 숲속에서 목만 남은 언데드가 꼿꼿한 시선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과는 달리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얼굴이다. 그렇게 살고 싶나? 뭐, 까짓 거 해주지. 가짜의 명예도 쓸모가 있다면 말이지.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이번 일만 잘 끝난다면 너를 무사히 살려 보내주겠다.”
“···알겠습니다. 일단 앞에 보이는 바위에서 왼쪽으로···”
눈을 끔벅인 톨리오가 입을 여는 순간. 앞에서 걸어가는 이자벨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기다란 귀가 쫑긋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돌린 이자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말 저 더러운 놈의 말을 믿으시는 건가요? 혹여 놈이 파놓은 함정이라면요?”
이글거리는 녹색 눈, 만지작거리는 허리춤의 단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은 요정이 망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벨로크 일행만 없었다면 당장에 화살꽂이로 만들 기세였다. 벨로크는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허리춤의 머리통을 툭 치며, 고갯짓했다.
“계속 안내해.”
“잠깐만요! 아무리 생각해도 어둠의 존재를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이자벨이 다급히 만류하자, 벨로크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너도 우리를 속였지 않나? 금붙이를 목적으로 왔다기에는 그간 네가 보인 행동들이 이해가 안 되는데.”
말을 꺼내려던 이자벨이 입을 합 다물었다. 모종의 이유를 띄고 온 것은 사실이니까. 벨로크가 요정을 바라봤다. 이윽고 건틀릿 낀 손을 들어 올려서 면갑을 철컥 올렸다.
무감정한 검은색 눈이 요정의 초록색 눈을 길게 응시했다. 벨로크가 입을 열었다.
“네가 분노하는 것은 이해한다. 이 녀석의 네 동족의 원수니까. 하지만, 그건 너의 사정일 뿐이지. 우리는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유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
“함정은···”
“그때는 돌파하면 그만이다. 물론, 이 녀석의 머리통은 박살나겠지.”
벨로크가 톨리오를 감싸 쥐고는 힘을 꾹 주었다.
“끄아아악!”
손을 툭툭 턴 벨로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고 떠날 거면 떠나라. 대신 방해는 하지 말도록.”
이자벨은 고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듯했다. 어쩌면 그녀가 본래 맡았을 임무에 대해서 일수도 있고, 죽어버린 동료들에 대한 애도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신들의 옛 터전을 마구 활보하는 저 인간들의 뒤통수에 화살을 꽂아주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벨로크는 상관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델 역시 코웃음을 치며 주인을 뒤따랐다. 약간 안쓰럽다는 눈을 한 카라가 그녀를 뒤돌아보았지만, 이윽고 마법사의 로브 자락 역시 스르륵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이 점점 멀어지자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자벨은 그 캄캄한 명암 아래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이윽고 결심한 듯 이를 뿌득 물은 그녀가 멀어져가는 빛을 뒤쫓았다.
스스스슥
요정의 단검이 앞을 가로막는 가지들을 퍽 후려쳤다. 벨로크의 대검도 꾸물거리며 접근하는 망자들의 몸통을 쪼겠다.
끈적하게 쏟아지는 피와 살점에서 시궁창 같은 냄새가 풍겼다.
코를 막은 카라가 웅얼거리면서 주문을 외웠다. 빛으로 만들어진 광구가 앞으로 쭈욱 나아가며 그들이 가야 할 길을 밝혔다.
일행은 옛 요정들의 터전이자, 이제는 망자들의 보금자리가 되어버린 숲을 계속해서 헤쳐 나갔다. 강철 부츠가 보무도 당당하게 그들이 죽인 시체들을 짓밟았다.
풍화된 뼛조각이 뿌득 부러지고, 물러진 살점이 쩍 터져나갔다. 요정의 날렵한 가죽 부츠, 피가 튄 로브 자락도 그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아델이 침을 퉤 뱉었다. 카라도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매만졌다. 길 잃은 모험가들을 몇 명구하고, 목 매달린 시체가 열매처럼 맺혀있는 나무들을 몇 개나 지나쳤을까.
“도착했습니다.”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톨리오의 음성은 물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행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지팡이로 허리를 툭툭 치던 카라가 눈을 빛냈다.
“폭포 뒤 비밀의 방이라. 뭔가 낭만적이네. 선객만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벨로크도 눈을 가늘게 뜨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작은 유리 알갱이들이 톡톡 튀어대며 서로 간에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물안개가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초인적인 오감은 저 불규칙적인 공간 뒤편에 존재하고 있는 텅 빈 공간을 발견했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한 건 아니군.”
벨로크가 수고했다는 의미로 톨리오의 머리통을 툭툭 쳤다. 일행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저 유적을 점거한 악마의 하수인 놈이 언제 유적의 보물들을 다 털어갈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일렬로 선 네 사람은 길옆에 난 바위나 나무를 잡은 채, 구부러진 오솔길을 천천히 내려갔다.
돌 부스러기가 툭 떨어지고, 손에 잡힌 나뭇가지들이 기이익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내려오고 다시 걸어서 숨겨진 공간으로 들어설 때쯤엔 떨어지는 물줄기로 인해 온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잠깐, 서두르는 건 좋지만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거야. 놈이 정상적인 마법사라면 ‘눈’ 정도는 곳곳에 심어뒀을 테니까. 지금쯤 우리들을 맞이하기 위한 환영파티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카라가 로브 자락에 묻은 물을 꾸욱 짜며 말했다. 벨로크가 시선을 내리자, 톨리오가 입을 꾹 닫고는 눈깔을 돌리고 있었다.
한 대 후려치려던 벨로크가 손을 멈췄다. 어찌 됐든 놈은 자신이 뱉은 말을 지켰다. 소임을 다한 셈이다. 그래, 봐준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패를 앞세운 채 동굴의 깊은 곳을 노려보던 아델이 용맹하게 외쳤다. 이윽고 그녀는 나직하게 기도문을 외우며 여신의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카라의 지팡이에서 나오는 하얀 빛과 주황색의 불꽃이 맞물리자 꽤나 정신 사나운 연출을 해댔다. 그 여파로 인해 거대한 그림자가 생겨난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정면 돌파뿐이군. 요정. 넌 어떻게 할 거지?”
이자벨은 손에 들린 활에 시위를 메기고는 말했다.
“선조들의 유물을 악마의 하수인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인간들의 손에 쥐여주는 것이 더 맞겠죠. 더군다나 저 안에 있는 놈은 내 동족들의 원수. 따르겠어요.”
“결정됐군.”
벨로크를 앞세운 일행은 다시 걸었다. 원래라면 막혀있었을 동굴 끝이 누군가가 파헤치기라도 한 것처럼 큰 구멍이 뚫려있었다.
그 옆에는 무언가를 끼우는 듯한 작은 홈이 있었다.
눈에 이체를 떠올린 카라가 품속에 있는 마법서. 갈드라보크를 꺼내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말했던 열쇠란 게 이걸 말하는 거였어? 저 홈하고 딱 맞는 크기 같은데.”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곳에 그걸 끼우면 숨겨진 문이 열리게 되어있지. 그걸 이런 식으로 돌파할 줄은 몰랐지만”
카라가 이번에는 이자벨을 바라봤다. 요정들의 유적지니까 뭐 아는 게 없냐는 의도가 담긴 시선이었다. 이자벨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전령이자 병사로 훈련받았지, 고고학을 전공하지는 않았거든요. 미안해요.”
“저 안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녀석이라면 알지도 모르지. 놈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어깨에 매어둔 검을 뽑아 든 벨로크가 앞장섰다. 울퉁불퉁하며 거친 자연 석굴을 지나서 조금 걷자, 한 눈으로 보아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매끈한 석벽 공간이 일행을 반겼다.
카라가 지팡이의 빛을 가까이 대며 벽을 매만졌다. 그러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공간이 작게 요동치며, 카라의 허리춤에 달린 룬북도 빛이 났다. 슬쩍 물러난 카라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대단한 마법사였나 본데? 거기다가 방금 전의 반응··· 이 마법서랑 공명하고 있어. 이건 정말이지···”
그 순간. 처음 들어보는 여인의 목소리가 석벽 공간에서 울려 퍼졌다.
“귀여운 도둑고양이들이 여기까지 오셨군. 헬레나의 창녀랑 귀쟁이, 마법사까지 다채로운 조합이구나.”
일행은 벨로크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는 그곳에서 들려왔다. 톨리오가 눈을 까뒤집은 채,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고요한 공간 안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너희들은 너무 설쳤어. 내 피조물들을 해친 것으로도 모자라. 이곳까지 침범해오다니, 하고 있던 연구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끝장을 내주었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카라가 손가락을 튕겼다. 지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뒤집혀있던 톨리오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윽고 녀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벨로크 일행을 올려다봤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머리만 남은 망자 기사를 보면서 카라가 혀를 찼다.
“피조물들에게 눈을 부착하는 건 흔한 일이야. 뭐, 이로써 확실해졌네. 놈은 저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곧 죽을 놈이기도 하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고, 일행은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습격해오지 않았다.
중간중간 파괴된 석벽의 일부나 연구실로 보이는 방들만이 일행을 맞이했을 뿐이다. 고요한 복도나 방 내부에는 썩은 팔뚝이나 해골의 뼈다귀 정도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대충 어떻게 이 유적을 돌파했는지 알 것 같다. 대악마가 건네준 힘으로 벽을 뚫고, 시체들을 밀어붙여 함정을 해제한 것이다. 이거 참 무식한 새끼네. 마법사 맞아? 던전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벨로크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걷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굳게 닫힌 문 하나가 보였다. 망자들의 흔적도 그곳에서 끊겨있었다. 일행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안에 뭔가 있다.
카라가 뭐라 중얼거리면서 지팡이로 툭 두드리자 석실의 문이 쿠릉하며 열렸다.
그 순간. 지하 특유의 한기를 넘어 죽은 자들의 체취가 일행에게 쇄도해왔다.
목 없는 기사 셋에 죽음의 기사 한 구.
구울 몇 마리가 일행을 맞이하듯 기다리고 있었다. 괴물들의 틈바구니에는 칠흑 같은 로브를 쓴 여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인의 시뻘건 입술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