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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주인
“하하하하. 면전에서 이런 말을 들어보기는 또 처음이군. 역시 자네는 범상치 않아. 아니, 대단하며 용맹한 기사야. 감히 죽음의 구도자이자. 망령의 재림, 산 자들의 머리를 수집하는 나. 톨리오 베르투스에게 그딴 망언이라니.”
원래 있어야 할 자리 대신, 옆구리에 끼워져 있던 머리가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 그러면서도 시체의 창백한 눈까리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주위의 상황을 살피기 위함이다. 개판이었다. 놈이 썰어 죽인 망자만 수백에 뿌리 뽑힌 나무도 열 단위가 넘어갔다.
그렇다면 필히 지쳤을 터. 놈의 동료들이 오기 전에 충분히 처리가 가능하다. 톨리오의 핏기 없는 머리가 기분 좋게 웃었다.
“자. 명예로운 결투에 앞서서 나는 소개를 끝마쳤네. 이제 자네의 이름을 들을 차례군. 그래,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 기사여.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명예 타령을 하는 악귀라. 이건 또 신박하군.
“괴물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는데.”
짧게 대답한 벨로크가 검을 들어 올렸다.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꾸욱 움켜쥐고는 목 없는 기사를 주시했다.
녀석은 카라의 광구를 등에 업은 채, 슬금슬금 접근해오고 있었다. 벨로크가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역광이었다. 톨리오라고 자신을 밝힌 망자 기사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거 안타깝군. 뭐, 상관없네. 이제 자네의 목을 자른 후, 내 주인의 주문을 빌어서 동지로 만들어주지. 기사들끼리의 해후는 그때쯤 나누면 되겠군. 아. 혹시 목이 잘린 채로 포도주를 마셔보았나? 목구멍을 술술 넘어가는 느낌이 정말이지 끝내준다네. 하하하.”
한 걸음 그리고 한 걸음. 말을 하는 와중에도 톨리오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오른손에는 큼직한 전투 도끼, 왼손에는 자신의 머리통을 방패처럼 들고 있었다.
놈의 어깨와 다리의 움직임, 손목의 흔들림을 주시하던 벨로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히 놈의 오른손은 도끼를 휘두르려고 자세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왼쪽의 머리통을 꽈악 잡는 것이다.
벨로크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며 앞으로 놈이 행할 행동을 예측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그 순간.
톨리오가 자신의 왼손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망자의 머리통이 대포환처럼 쏘아져 왔다.
“하하하! 자네의 몸에 바람구멍을 뚫어주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톨리오가 괴성을 내질렀다. 눈앞의 적이 목 없는 기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대는 기이한 압박감을 받는다. 상식을 벗어난 괴물이니까. 하지만, 그 괴물이 머리통을 던진다면? 대부분은 반응도 못 한 채 죽음을···
“억.”
띵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간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흔들리는 시야 아래에서 먼지투성이가 된 톨리오가 눈을 굴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툭툭 털고 있는 기사가 보였다. 톨리오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보통은 아니라 이거지. 좋다. 죽여!”
쿠오오오
머리 없는 기사가 자신의 도끼를 내려찍었다. 죽음마저 거스른 망자의 의지가 산 자에게 쇄도해왔다.
벨로크는 이에 용감하게 맞서주기로 했다. 그도 마주 검을 휘둘렀다.
쾅 하면서 쇠와 쇠가 부딪쳤다기에는 믿기 힘든 소리가 울렸다. 기사의 몸체가 크게 흔들렸다. 물론 머리가 없는 쪽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네놈은 인간이면서 지치지도 않는단 말인가!”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배경 삼아 대검과 배틀 엑스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끼기기긱
불똥과 함께 거친 마찰음이 울렸다. 깊이 파이는 고랑 너머로 두 기사의 시선이 점점 가까워졌다.
듀라한은 강철 면갑을 낀 산자의 얼굴을, 벨로크는 목 대신 타오르는 푸른 귀화를 마주했다.
저 불에 데이면 뜨거울까? 차가울까?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한 벨로크는 검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꾸욱 주었다. 그러자, 도끼가 비명을 지르고 듀라한의 무릎이 팍 굽혀졌다. 발아래의 고랑이 더욱 깊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한 줌 흙으로 되돌아갈 판이다. 망자 기사는 힘 싸움에서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시인했다. 듀라한은 도낏자루를 쥐고 있는 힘을 슬쩍 풀었다. 그러자 벨로크의 대검이 갑옷을 찢으며, 거칠게 파고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작살난 어깨뼈에 이어서 심장까지 닿은 칼날에 의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죽음마저 초월한 기사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영악한 듀라한은 자신의 어깨를 포기했다. 대신에 왼손을 움직여, 몸을 파고든 대검 날을 콱 잡았다. 그러고는 남은 한쪽 손을 휙 들어 올렸다. 도끼가 들린 손이었다.
푸른 귀화가 살짝 흔들렸다. 비웃는 듯했다.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언데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식한 전술이었다.
이렇게 싸우는 놈은 또 처음이네. 벨로크가 손아래서 느껴지는 공허함에 묘한 표정을 지을 때. 듀라한은 검을 어깨에 박은 채로 무기를 휘둘렀다.
쿠우우우
검을 놓고 물러서기에는 이미 늦었다. 하물며, 양손마저 묶여버렸다. 흉악한 도끼날이 금방이라도 벨로크를 깨부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손에 들린 검에 힘을 더 실었다. 괴력이 빛을 발하고, 갈라져 있던 갑옷이 지르다 만 비명을 마저 질렀다.
찰나의 순간. 듀라한의 상체가 갈라지고, 목표를 잃은 도끼가 바닥을 굴렀다. 이를 장식하듯 썩은 나뭇잎이 화악 튀었다.
벨로크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잠시 멈춰서 있었다. 단순한 이유였다.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뭐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때에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미친.”
짧은 욕설이었다. 아까부터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렇군. 머리가 본체였나?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뒤편에서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수풀 속에 박혀있는 머리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벨로크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서 머리카락 채로 머리통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대롱거리는 톨리오의 입은 꾸욱 다물어져 있었다.
녀석이 눈동자를 굴리며, 벨로크의 눈치를 봤다. 겁에 질린 모양새에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한 번 죽음을 경험한 놈이 또다시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건가? 어쩌면 그렇기에 삶에 더 미련이 남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너는 기사보다는 광대를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군. 그 머리통으로 저글링이나 하는 건 어때?”
“사··· 살려주게. 자네들이 왜 이 숲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는 게 많네. 뭐든 물어보게!”
머리만 남아서 재잘거리고 있는 인간의 얼굴은 사뭇 기괴하며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을 바라봤다.
이윽고 바닥에 툭 떨군 다음 냅다 걷어찼다. 공처럼 대굴대굴 굴러서 풀숲에 처박힌 톨리오가 신음을 내뱉었다.
“억! 대··· 대체 왜.”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벨로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머리통을 주웠다. 쿨럭 거리면서 나뭇잎을 토한 톨리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십시오. 제가 아는 대로 답해드리겠습니다.”
“이제야 좀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군. 우선, 숲이 왜 이렇게 됐는지부터···”
벨로크가 입을 열려는 순간. 숲 저편에 있던 빛이 점점 가까워지며, 목소리가 들렸다.
“벨로크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일행이 다가오자, 벨로크는 몸을 돌렸다. 듀라한의 머리통도 덜렁거렸다. 아델을 제외한 두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카라가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시체 머리통을 왜 들고 있는 거야?!”
“안녕하십니까. 아가씨들. 우선 제 소개를 하자면··· 억.”
머리통이 입을 열자. 이번에는 세 여인이 기겁했다. 놈을 바닥에 한 번 더 처박은 벨로크가 방금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듀라한이라니··· 그래, 그렇다면 말이 되지. 하지만 이런 꼴이라니. 너는 정말···”
떨떠름한 얼굴을 한 카라가 벨로크와 말하는 머리통을 쳐다봤다. 죽음의 기사 다음으로 까다로운 언데드가 바로 목 없는 기사였다. 지치지도 않는 체력에 생전 몇 배의 힘을 발휘하는 이 괴물은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이니까. 하지만 이런 악귀조차도 이 사내에게는 몇 수 접어주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누가 괴물인지도 모르겠군.”
카라가 고개를 저을 때. 아델은 흥미로운 얼굴로 머리통을 바라봤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톨리오의 뺨을 쿡 찌르며 말했다.
“장난감으로 쓰시려고 살려두신 겁니까?”
벨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는 것이 많다더군. 정보를 제공해준다던데.”
“물론입니다. 방금 전에 숲이 왜 이렇게 됐는지 물으셨죠. 악마 때문입니다.”
톨리오가 조잘거리자, 요정을 제외한 세 사람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나 그놈들이 문제로군. 벨로크가 입을 열려는 순간.
“잠깐만요! 정말 죄송한데, 이놈에게 하나만 먼저 물어봐도 될까요?”
이자벨이 끼어들었다. 다급해 보이는 그 기색에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톨리오를 노려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너. 이 더러운 언데드놈 같으니. 이곳에 들어온 내 동족들은 어떻게 했지?”
동족의 원수이기 때문일까. 그녀답지 않은 표독스러운 어투였다. 톨리오가 피식 웃었다. 벨로크에게 굽신거리던 때와는 달리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아아. 그 귀쟁이 친구들 동료인가? 뭐, 이쯤 됐으면 자네도 눈치채지 않았나? 생전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채, 저 구석에서 썩어가고 있다네.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며 버둥대다가 하나씩 죽어가는 게 얼마나 눈물겹던··· 억!”
벨로크가 톨리오를 후려쳤다. 굳이 눈앞의 요정을 의식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유들유들하게 답하는 놈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시선을 돌려서 이자벨을 바라봤다. 입술을 짓씹으며, 무언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얼굴이었다. 아까 전 동족들의 얘기도 그렇고 악마의 하수인은 아닌 것 같군.
뭐, 대충 예측은 갔다. 무언가를 찾아서 이 숲에 들어왔는데. 숲의 괴물들에게 쫓겨, 홀로 살아남은 가련한 여인. 흔하디흔한 만담 소재였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고···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건 어떨까?”
카라의 제안에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박살 난 나무들과 조각난 시체, 그로 인해 퍼져나가는 피 냄새까지. 그걸 맡고 몰려올 다른 괴물들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일행은 곧바로 이동을 개시했다. 걸어가던 벨로크가 손에 들린 톨리오를 통통 던져대며 말했다.
“아까 전의 얘기를 계속해보도록. 숲이 어쩌다가 이 꼴이 됐다고?”
“억··· 그게.”
눈이 빙빙 돌아가면서도 톨리오는 용케 설명을 이어나갔다. 녀석의 말은 이랬다. 자신의 주인은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 주문을 쌓아가던 흑마법사였다. 그는 여느 때처럼 교회의 추적을 피해 지하의 한구석에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대변동이 일어났다. 그가 모시던 악마가 지상에 강림한 것이다.
“그야말로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톨리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엉망이 된 세상, 약해진 교회의 추적, 연결고리가 강해졌기에 악마로부터 받은 강대한 힘까지.
환호하고 있는 주인에게 악마가 명령을 내렸다. 흐르는 숲으로 가서 유적지 속에 숨겨진 요정들의 보물을 가져오란 것이었다. 벨로크가 말했다.
“네놈의 주인과 계약한 악마 놈의 이름이 뭐지? 아스타로트 그놈인가?”
“다섯 권좌의 마땅한 지배자 중 하나, 영혼마저 검게 물들이는 타락의··· 억!”
벨로크는 떠벌대는 톨리오를 다시 한 번 던졌다. 듀라한 머리에 부딪힌 나무가 우지끈 비명을 질렀다. 그야말로 강철 같은 경도였다.
“아까 전부터 느낀 건데. 너는 말이 참 많군.”
“끄으으. 네! 아스타로트가 맞습니다. 그 새낍니다!”
바닥을 구르는 톨리오를 다시 주워들어서 먼지를 툭툭 턴 벨로크가 물었다.
“숲에는 요정들의 결계가 쳐져 있지 않았나?”
“놈이 준 보옥 앞에서는 그 잘난 요정들의 주문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벨로크가 혀를 찼다. 이놈 이거 치트키 쓰네.
“그래, 네 그 잘난 주인은 지금 어디에 있나?”
톨리오의 눈동자가 비죽 돌아갔다. 그래, 주인을 팔기에는 조금 그런 모양이지? 머리를 굴리는 듯한 그 모습에 벨로크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머리통이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끄아아악! 모··· 목표로 했던 유적지의 문을 여는 데 성공하셔서 그곳을 탐험하고 계실 겁니다.”
“거기가 어딘데?”
“숲의 중앙, 폭포 뒤편에 있는 곳입니다.”
“이 새끼가?”
"하아?!"
벨로크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일행 또한 얼굴을 굳혔다.
듀라한의 말 대로라면, 지금 그들이 목표로 잡은 장소에 숲을 이 꼴로 만든 원흉이 있다는 것 아닌가.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애써 찾으러 온 보물을 남에게 빼앗기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