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흐르는 숲
낯선 땅에 발을 들이미는 것은 언제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하물며 그것이 인간들이 빚어낸 땅이 아니라, 괴물들의 영역이라면 더욱 그렇다.
살인 전문가인 용병, 요정 검사, 드워프 전사들조차 벌벌 떨 정도니, 굳이 긴 말은 필요치 않으리라. 하지만, 그 모든 사실도 지금 숲길을 걷고 있는 벨로크 일행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괴물의 아가리든, 보금자리든 알 게 뭔가. 그들은 이런 일로 겁을 집어먹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경험을 했다.
“들어가는 족족 죽어 나간다라. 확실히 그럴만하네. 이 숲. 되게 기묘해. 태양빛 조차 닿지 않는 공간이라니.”
카라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안으로 들어오니 또 달랐다.
기괴하게 뒤틀린 나뭇가지들이 마치 애벌레처럼 숲 전체를 꽁꽁 싸매고 있었다.
덕분에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서 그녀가 맡아야 할 역할이 더욱 커졌다.
카라가 입술을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손에 들린 지팡이의 빛이 화악 커졌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광명에 일행은 걸어가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카르벤의 성문을 넘어 이 숲에 들어온 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요상한 분위기의 숲은 벌써부터 침입자들을 반기지 않는 것 같았다.
누군가 조각이라도 한 듯 웃고, 울고 짜증 내는듯한 표정을 지은 나무들이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한 것이 사람으로 따지면 해골처럼 보였다.
분위기 한번 끝내주는 군. 유령의 집 저리가라인데? 벨로크는 언제든지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며, 카라를 보호하듯 옆에 섰다.
저 어둠 속에서 뭐가 튀어나오던 쏘아져 나오든 불빛을 제일 먼저 노릴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델은 이번에 합류한 요정을 감시하기 위해 그녀의 뒤편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자연히 일행은 카라를 중심으로 한 세 사람, 제일 선두에서 걸어가는 이자벨로 이루어졌다. 후드를 벗고 몸매를 드러내는 가죽 갑옷을 입은 채, 걸어가던 이자벨이 돌연 뚝 멈췄다. 등에 멘 활과 허리춤의 검이 짤랑 흔들렸다.
아델이 경계심을 끌어올릴 때. 이자벨이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하얗던 요정의 얼굴에 마법의 불빛까지 쏘아지자.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초록색깔의 두 눈과 입만 보였다. 요정의 입이 열렸다.
“어느 유적지부터 가실 건가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 태연한 어조에 일행은 생각했다. 적어도 가문의 보물을 찾아서 가출한 아가씨치고는 꽤나 수라장을 거친 것 같다고. 숨겨진 비전을 몇 개쯤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진짜 악마의 하수인이거나. 벨로크가 말했다.
“어제 네 입으로 말했지. 금붙이를 노려서 이곳까지 왔다고. 보물을 조금 챙길 수만 있다면 우리가 가는 대로 따라오겠다는 뜻으로 봐도 되는 거겠지?”
“물론이죠. 이런 위험한 공간에서는 지휘권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요.”
뭔가 군인정신 같은 대답인데.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온 이자벨이 품 안에서 지도를 꺼냈다. 숲의 광대한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유적지들이 표기되어있었다.
모험가들이 봤다면 하나같이 군침을 흘렸을 정보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망설임 없이 숲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폭포를 가리켰다. 이자벨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이곳은··· 별것 없어 보이는데요? 옛 건물터를 위주로 돌아보는 것이 뭔가 얻을 게 있지 않을까요?”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이곳으로 간다.”
애초에 그들이 이 숲에 들어온 이유는 카라가 들고 있는 마법서의 봉인을 풀고, 대악마를 잡는 데 도움이 되는 유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려면 폭포 뒤에 숨겨져 있는 유적지로 가야 했다. 벨로크는 품속을 뒤져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혹여 보물을 못 건져도 너한테는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 걱정 말도록. 이건 신용의 증표다.”
그간 여정에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금화와 보석들이 수중에 반짝거렸다. 벨로크가 보석 하나를 집어서 이자벨에게 건네주었다. 사파이어가 시린 빛을 뿜어냈다. 이자벨은 알 수 없는 얼굴을 한 채, 보석을 받아들였다.
“···알겠어요.”
벨로크는 그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금붙이를 노리고 이곳에 왔다기에는 보석을 건네받을 때. 그녀의 얼굴에 탐욕이나 물욕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나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 숲에 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좀 더 추궁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관두기로 했다. 그녀의 태도가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장소로 안내할게요. 혹시 의심이 드신다면 저랑 같이 지도를 살펴보셔도 좋아요.”
요정다운 총총거리는 움직임으로, 이자벨이 지도를 보며 다시 앞장섰고, 일행은 그 뒤를 따라서 숲을 나아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썩어빠진 낙엽들이 바스락거렸다. 그 아래의 흙마저 질척거렸으며, 나무들의 색도 구정물을 뒤집어 씌워놓은 것처럼 꺼멓기만 했다. 이곳은 이제 이름만 숲이지, 깊숙한 터널이나 동굴을 연상케 할 뿐이었다.
폐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주저앉고 말았으리라. 일행의 숨소리나 갑옷이 철컥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고요한 이동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난데없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악!”
그리 먼 곳에서 들려온 게 아니었다. 벨로크의 뛰어난 오감은 비명에 이어서 무언가를 씹어 먹는 소음과 함께 수풀을 가르는 소리까지 포착해냈다.
걸음을 멈춘 벨로크가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대검이 철컹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내자, 아델 또한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고, 카라 역시 지팡이를 빙빙 돌렸다.
이자벨도 귀를 쫑긋거리며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잠시 후. 수풀을 가르고 나타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 누군가 나 좀 살려···”
두툼한 천 갑옷에 허리춤의 검이 사내의 정체를 짐작게 했다. 모험가였다. 하지만 뜯어 먹히기라도 한 건지. 한쪽 팔의 살점이 덜렁거리고, 눈알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면 사내를 더 이상 인간의 범주로 봐야 할 지 의심스러웠다.
사내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벨로크 일행을 향해 걸어왔다. 삶을 향한 맹렬한 집착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그에게 손을 건네지 않았다.
아니, 딱 한 사람. 요정이 나서려고 하자. 벨로크가 만류했다. 기사의 눈에는 사내의 뒤편에서 히죽 웃으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 괴물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놈은 미끼다.”
“제법 머리를 쓰는데? 영리한 놈들이야.”
카라가 주문을 외웠다. 마법에 대한 견해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룬어라고 부르는 신비의 언어였다. 하지만, 벨로크가 듣기에는 알 수 없는 음성의 나열일 뿐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사내가 방금 쓰러졌다. 카라도 더 이상 거슬릴 게 없었다.
그녀의 안광이 빛났고 지팡이 끝에서 벼락이 번뜩였다.
파지지직
어둠에 잠겨있던 숲이 한순간에 밝아지며, 그 속에 숨어있던 악귀들이 정체를 드러냈다.
“들개인가? 아니, 좀비?”
감전당해서 몸을 떨어대고 있는 썩은 짐승들을 본 카라가 소리쳤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금방 냉정을 회복한 그녀는 다시금 주문을 외워서 빛의 광구 하나를 만들어내 놈들의 틈바구니로 던졌다.
그러자,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쓰러진 악귀들의 시신을 짓밟고 다가오는 또 다른 무리들이 보였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주위의 온도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카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실종된 친구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었네.”
놈들의 공허한 눈동자가 산 자들을 주시했다. 완전히 썩어서 뼈만 덜그럭거리며, 눈깔도 안 보이는 놈.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보랏빛 살점이 남아있는 놈 등.
거뭇거뭇한 음영 사이로 몸뚱이의 주인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시체들의 상태만큼이나 그 종류도 다양했다.
“인간, 짐승··· 요정까지 있습니다.”
까악 까악
날아드는 시체 까마귀를 검으로 베어낸 아델이 중얼거렸다. 흩날리는 깃털과 함께 그녀의 옆에서 활을 들고 있던 이자벨의 눈동자도 거세게 흔들렸다. 벨로크가 보기에 그 감정들은 당혹과 안타까움, 마지막으로는 분노였다.
“로엔···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네가 어째서 여기에 나자빠져 있는 거야···”
이자벨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이를 들은 벨로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임무? 역시나 금붙이를 노리고 온 것은 아니었군. 악마의 하수인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놈들을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지, 이를 으득 물은 이자벨이 화살을 쐈다.
쐐애액
파공성이 일만큼 강렬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화살은 요정 좀비의 갈비뼈에 틀어박혀서 몸을 흔들어 재낄 뿐. 놈을 멈추지는 못했다.
“키에에엑!”
오히려 몸에 깃털이 박혀, 화가 난 요정 좀비가 입을 쩌억 벌리며 으르렁거렸다. 상성이 안 좋네. 피식 웃은 벨로크가 앞으로 나섰다.
망자들의 군대를 향해 검은 머리칼의 기사가 용맹하게 돌진했다. 이자벨이 보기에 그것은 너무나도 무모한 짓거리로 보였다.
저 대검이 아무리 강력하면 뭐 하는가? 주위에 산재한 굵은 나무들 때문에 휘두를 공간이 안 나올 텐데. 저러다가 둘러싸여서 잡아먹히면 끝이었다. 그녀가 다급히 만류했다.
“잠깐만요! 장소가 너무 안 좋아요! 일단 후퇴해서 진영을 재정비해야···”
벨로크는 이자벨의 말을 무시한 채, 검을 휘둘렀다. 결과는 놀라웠다. 풍압과 함께 통나무 같던 나무들이 우지끈 부러졌다. 그 사이로 덤벼들던 좀비들도 일제히 토막 났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장작들 사이로 썩은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이자벨이 입을 헤 벌렸다
“이게 무슨···”
“흑요정 궁수를 어떻게 잡았는지 알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카라가 주문을 외웠다. 이윽고 그녀의 지팡이에서 빛이 반짝이자. 덤벼들던 들개 좀비가 망치라도 맞은 듯 튕겨 나갔다. 사제들의 치료를 받아서 그런가. 카라의 몸에서는 힘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가 아델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절해서 쓰도록 해. 큰불이 나버리면 마법으로도 끌 수가 없으니까.”
“날 머저리로 아는 거냐? 물론이다.”
화재의 위험 때문에 아델 또한 성력의 출력을 최소화하며 이리저리 검을 휘둘렀다. 그렇다고 해도 상성의 기운 덕분인지 놈들은 맥을 못 췄다. 이자벨은 눈을 끔뻑거렸다. 이 사람들 무언가 이상했다. 이러한 상황이 되게 익숙해 보였다. 기분 탓인가?
요정 왕국의 전령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벨로크는 거침없이 망자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캬아아악!”
괴성과 함께 죽은 모험가가 검을 휘둘러왔다. 이가 나가 있고, 녹이 잔뜩 슬어있는 것이 베이기라도 하면 지독한 파상풍에 걸릴 것 같았다.
벨로크는 검을 방패처럼 받쳤다. 한순간에 거대한 성벽이 완성되었다. 낡아빠진 검은 뚝 부러졌다. 성벽이 전진해왔다.
이미 죽어버린 좀비는 압박감을 느낄 새도 없이 조각났다.
그 순간. 다른 놈이 꼬챙이 같은 레이피어를 찔러왔다. 아까 전의 요정 좀비였다. 벨로크는 손을 뻗어서 그것을 턱 잡았다. 그러고는 이쑤시개마냥 툭 부러트리고는 놈의 미간에 그대로 꼽아주었다.
망자들과의 산책은 멈추지 않았다.
벨로크는 쉴 틈 없이 검을 휘둘렀다. 기어 오는 놈은 부츠 채로 냅다 후려 차버렸다. 대굴대굴 굴러가는 머리, 쓰러지는 나무, 휘둘러지는 대검.
고요하던 숲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무리 지치지 않는 망자의 군대라고 할지라도 그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목표로 삼은 인간이 지치지 않는다면 오히려 사냥당하는 것은 그들이었다. 놈들 전부가 기사의 칼날에 쓰러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뚝뚝
어느새 일행과는 멀리 떨어져 버린 벨로크가 칼날의 피를 후둑 털어냈다. 그 순간.
수풀이 흔들리며 또 다른 인영이 튀어나왔다. 중무장을 한 것인지. 이리저리 쇳소리가 울렸으며, 묵직한 발걸음 소리 또한 울려 퍼졌다.
벨로크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 멀리서 지켜보니 소감이 어떠신가.”
“단신으로 망자의 군단을 박살내다니··· 솔직히 감탄했네. 그 무식한 날붙이는 둘째 치고, 그것을 휘두르는 자네의 솜씨는 내 눈이 정녕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군.”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비춰오는 카라의 광구 사이로 빚이 바 랜 판금 갑옷과 도끼를 손에 쥔 기사가 보였다.
“나는 목이 잘렸는데도 말을 할 수 있는 네놈의 성대구조가 더 놀랍군.”
벨로크의 중얼거림에 목 없는 기사가 유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