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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43화 (43/222)

43

흐르는 숲

도돈의 음성은 낮고 거칠었으며, 그 내용은 꽤나 섬뜩했다. 하지만 주위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와하하하

얼굴이 시뻘게진 모험가들이 요란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댔다. 상인들도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술과 음식을 주문했다.

바쁜 아비 대신 하나뿐인 종업원인 리안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주문을 받고, 술을 나르고 몸을 더듬거리려는 모험가의 손길을 쳐내는 등, 끔찍한 괴물들의 소굴이 바로 옆에 있다고 보기에는 무척이나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턱을 괸 카라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상황이 썩 괜찮아 보이는데?”

도돈이 잠깐 시선을 돌려서 그 모습을 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황금에 눈이 먼 자들에게는 진실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제가 여관을 운영하는 요 몇 주간, 저런 자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지 아십니까?”

일행은 말없이 도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도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숫자로 따지자면 백은 넘겠군요. 결계가 풀렸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서 벌떼처럼 몰려들었지요. 신비로운 마법은 무섭지만, 괴물들은 무섭지 않았나 봅니다. 창칼이 통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겠죠.”

“조금 전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잘 알겠군.”

벨로크의 말에 도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지금도 저희 집 창고에는 주인 잃은 짐들이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을 유혹하는 신비로운 숲이, 한순간에 괴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아니, 차라리 마법이 풀려서 좋아해야 하는 건가? 어찌 됐든 보기와는 달리 꽤나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겠다. 벨로크가 물었다.

“영주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지?”

도돈은 피식 웃었다.

“오히려 결계가 깨졌다는 소문을 더 넓게 퍼트려서 찾아오는 모험가들을 숲에 밀어 넣고 있습니다. 혹여 숲의 괴현상을 조사해오는 자에게는 큰 포상을 내리겠다는 말과 함께요.”

다 마신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카라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 너무 단기적인 이득만 보는 것 같아. 성벽을 믿고 있는 건가?”

“저 같은 장사치가 높으신 분들의 생각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튼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조금은 도움이 되셨을까요?”

도돈은 괜히 숲에 들어가지 말라느니, 위험하다느니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도 한 편으로는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저 기사님이 숲의 괴현상을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도돈 덕분에 벨로크는 돌아가는 상황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작스레 생겨난 숲의 괴물과 그 속에서 보물을 노리는 모험가들. 마지막으로 방관하는 영주까지.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많은 도움이 되었네.”

벨로크가 품을 뒤져서 금화를 꺼내자, 자리에서 일어난 도돈이 손사래를 쳤다.

“도움이 되셨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술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도망치듯 도돈이 떠나고, 잔이 다시금 채워졌다. 붉은빛이 감돌던 하늘에도 녹진한 어둠이 차올랐다. 세 사람은 다시 대화를 나눴다. 역시나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카라였다.

“괴물, 망자. 왠지 익숙한 전개 같은데? 냄새가 나.”

“더러운 악마 새끼들 같으니. 어떻게 하실 겁니까?”

벨로크는 의자에 턱 기댄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냥 생각하는 척을 했을 뿐이다.

소설이나 만화에서 보면 이러한 상황에 주인공들이 나서서 기가 막힌 대책을 내놓고는 하던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냥 놈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얼마나 죽여야 그곳까지 갈 수 있을지 정도만, 떠오를 뿐이다. 이제는 뇌까지 기사가 되어버린 걸까? 벨로크는 상념을 멈췄다.

도저히 모르겠다. 건틀릿 낀 손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린 그가 말했다.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치운다. 그리고 숲을 이 잡듯이 뒤진다.”

“기가 막힌 계획이십니다.”

“이런 무식한···”

아델이 손뼉을 딱 쳤고, 카라는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유적지 안에 숨겨진 보물들이다. 당연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욕심을 내는 이들도 한둘이 아닐 터. 괜히 말썽에 휘말리기보다는 차라리 자신들끼리 움직이는 게 낫다.

물론 그 바탕에는 벨로크의 무력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었지만,

“하긴 네가 썰어버린 악마만 해도 벌써···”

“본의 아니게 당신들의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만,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될까요?”

카라가 입을 여는 순간. 다가온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들려오는 미성에 일행의 시선이 돌아갔다. 구석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채, 분위기를 잡고 있던 사람이었다.

“네놈은 대체 누군데···”

아델이 나서기 전, 초월적인 오감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던 벨로크가 먼저 말했다.

“본의 아니게는 빼지. 우리가 들어온 처음부터 엿듣고 있었잖나?”

놀란 듯, 후드 속에서 비치는 초록색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윽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그녀가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악의는 없었어요. 믿어주세요.”

아델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대화나 엿듣는 녀석의 말을 믿으라고? 죽고 싶나?”

아델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카라 또한 경계하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일행의 날 선 모습에도 여인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주위를 한 번 살피고는 작게 속삭였다.

“내가 당신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흐르는 숲의 지도라던가?”

후드 안의 눈빛이 은근하게 빛났다. 카라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 여자는 귀쟁이. 아니, 요정이다.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흥미로운 얘기를 던지는군. 앉아라.”

‘어떻게 안 거지?’

태연하던 여인의 눈동자가 또다시 떨렸다. 하지만, 벨로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의자를 가지고 와서는 냉큼 자리에 앉았다.

후드를 쓴 채로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자벨. 저 사내의 말대로 요정이에요. 함부로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점은 양해해주세요. 괜한 관심을 끌 게 되거든요. 다들 만나서 반가워요.”

“벨로크, 이쪽은 아델, 카라.”

아델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이었고 요정이라는 말에 카라의 기색은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의 눈동자에 옅은 호기심이 차올랐다.

“머나먼 동쪽 땅의 끝에서 요정을 본 것도 놀랍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어째서 우리에게 접근한 거지? 너도 흐르는 숲의 유적에 들어가려고?”

이자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었다.

“그래요. 나는 흐르는 숲에 볼일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서 나오는 금붙이에 더 관심이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카라가 머리카락을 베베 꼬았다.

“뭐, 이런 건가? 한몫 잡기 위해 집안에서 전해져오는 보물 지도를 가지고 도망친 요정 아가씨?”

카라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정답이었던 듯 이자벨이 입을 헤 벌렸다.

“마법사라 그런가? 역시 똑똑하네요. 맞아요. 그럴 생각으로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숲이 저 꼴이 되어있었죠. 덕분에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렇다고··· 저런 어중이떠중이들하고 갔다가는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 같아서요.”

이자벨이 고주망태가 돼서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모험가들을 가리켰다.

음. 확실히 별로 믿음이 가는 모습이 아니기는 하지. 일행의 생각을 뒤로한 채,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용맹한 기사와 마법사가 끼인 일행이라면 숲에서의 보물을 찾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겠죠. 제 배당은 조금 줄어들지 몰라도요. 아. 전 많은 거 안 바래요. 한 일할 쯤...?”

“그냥 찍어본 거였는데. 어떻게 할 거야. 벨로크?”

카라가 고개를 돌려서 일행의 리더를 바라봤다. 검은 머리칼을 멋들어지게 올린 기사는 여전히 침착하고 묵묵해 보였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만큼. 벨로크가 말했다.

“지도를 보여줄 수 있나?”

이자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지금 여기서는 조금 그렇고, 방으로 올라가면 보여드릴게요. 지금 당장 가실래요?”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따라오세요.”

요정의 치렁거리는 로브 자락을 따라, 벨로크 일행은 그녀가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계단의 삐걱거렸고, 중간중간 지나치는 방 안에서는 용병들의 거친 괴성과 창녀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아델은 얼굴을 붉혔고, 카라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러다가 죽는 거 아닌가? 속마음을 숨긴 벨로크도 묵묵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방문이 닫히자. 이자벨이 후드를 젖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금발 그리고 초록 눈. 전형적인 요정 여인의 모습이었다.

회색빛 피부보다는 훨씬 볼만하군.

한쪽에 세워져 있는 활을 뒤로한 채, 서 있던 이자벨이 품속을 뒤져 낡아 보이는 지도를 건넸다.

일행은 지도를 돌려가며 꼼꼼히 확인했다. 특히나 유적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폭포가 표기되어있는 곳을 주목해서 보았다.

벨로크와 아델이야 기사 교육을 받았던 만큼, 전략지도를 보는 것에 능통해 있었고, 카라 또한 지식과 교양을 제법 쌓은 마법사였다. 세 사람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도가 진짜 저 숲의 지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조잡하게 만들어진 가짜는 아니었다. 이자벨이 기대하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때요? 나를 일행으로 받아줄래요?”

벨로크가 지도를 곱게 접어서 돌려주었다.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출발이다. 푹 쉬어두도록.”

“잘 부탁드려요!”

이자벨이 고개를 꾸벅 숙였고, 일행은 방 안에서 나왔다. 카라가 벨로크와 아델의 팔뚝을 툭툭 쳤다. 그녀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기색에 세 사람은 여관 밖으로 나와 대로변을 걷기 시작했다.

기름과 장작을 아끼기 위해서인지 영주성과 그들이 나온 여관을 제외하면, 도시는 어두웠으며 조용했다. 초가을의 시원한 공기를 벗 삼아 일행은 대로를 걸었다. 아델이 물었다.

“얘기해라. 마녀.”

카라가 여관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요정의 귀도 우리들의 대화를 듣지 못하겠지.”

카라가 뱉은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벨로크가 물었다.

“이상하다고?”

“당연한 거 아니야?”

카라가 피식 웃었다. 이윽고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도를 훔쳐서 달아난 철없는 여인이라는 변명은 그렇다 쳐, 일단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접근해왔단 것부터가 이상해. 세상에 어떤 도굴꾼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패를 먼저 꺼낼까? 그것도 인간병기인 기사들과 마법사가 있는데? 힘으로 빼앗긴다는 생각을 못 하는 건가? 넘치는 자신감? 애초에 의도부터가 이상했다고. 나 같았으면 아무리 숲이 위험하다고 해도 용병들을 고용해서 갔을 거야. 비밀유지를 위해서든 뭐든.”

“꿍꿍이가 있어 보이기는 했지.”

“악마의 하수인 일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들을 유인하는 걸지도. 아델. 혹시 저 여자에게서 뭔가 느껴진 건 없었어? 무언가 사악한 기운이라던가.”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냥 죽여 버리고 지도를 빼앗으면 되지 않나?”

“흐음. 그것도 한 방법이지.”

잘못하다가는 여관에서 시체 하나를 치우게 생겼다. 두 여인이 무서운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벨로크가 만류했다.

“일단은 내일 상황을 봐서 행동하도록 한다. 나는 별다른 것은 못 느꼈거든.”

그간 악마들을 봐왔을 때 느꼈던 육감이라든지, 투지가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카라와 아델은 냉큼 수긍했다.

“뭐, 대장이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이만 들어가도록 하지. 내일은 강행군이 될 테니까.”

요상한 꿍꿍이를 숨긴 요정이든, 악마가 기거하는 숲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가진 힘을 다해서 돌파해낼 뿐이었다. 세 사람은 곧 여관으로 돌아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날이 밝았을 때.

수상한 요정과 마녀, 헬레나의 성기사, 무식한 대검을 가진 기사는 괴물들이 가득한 숲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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