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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42화 (4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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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숲

영주께 기별을 넣는다는 병사를 만류한 후, 세 사람은 여관을 찾기 위해 카르벤 시내를 돌아다녔다. 타고 있는 안장이 씰룩거릴수록 전투마의 길쭉한 다리가 성큼성큼 대로를 가로질렀다.

한층 높아진 시야로 아래를 내려다보자, 마치 거인이 된 기분이었다.

히히히힝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하자, 지나가는 행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행인들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석양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판금 갑옷이 두 벌, 기이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로브가 한 벌이었다. 말 위에 타고 있는 이들의 신분이 한눈에 보였다.

“무장한 자들이 많이 보이는군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델의 말에 카라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카르벤은 원래 흐르는 숲의 완충 지대로서 만들어진 군사용 도시였다고 들었어. 이런 곳이 대부분 그래. 책보다는 날붙이가 더 가깝다는 거지.”

“행색을 보아하니, 정규군은 아닌 모양인데.”

벨로크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칼만 찼지, 자유분방한 복장을 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이즈가 안 맞는 갑옷과 투구는 기본에, 멋을 중시한 듯 살갗을 그대로 드러낸 보호구는 저게 정녕 방호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카라가 옅게 웃었다.

“용병 혹은 모험가들이야. 몰락했다고는 해도 저곳은 과거 요정들의 땅이니까. 어디 황금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을까 해서 온 거겠지. 그리고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이 도시가 먹고 사는 거야.”

벨로크는 잠깐 머리를 굴렸다. 카라의 말대로라면 카르벤은 과거 인접한 요정들을 막기 위해 세워진 군사도시다. 하지만 현재 요정들은 다른 땅으로 이주했으니, 그 의미는 퇴색되었다. 그렇다면···

“요정들이 사라지자, 군사도시에서 관광도시가 되었다 이 말인가?”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용병 하나가 히이익 소리를 내며, 재빨리 도망쳤다. 사악한 주문 쟁이가 다시 한 번 웃었다.

“카르벤의 영주가 머리를 잘 쓴 거야. 보물과 전설이 가득한 땅 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이야? 뜬소문만 조금 퍼트려줘도 별의별 얼치기들이 돈주머니를 들고 찾아오는 거지.”

벨로크가 눈가를 문질렀다.

“우리도 그 얼치기 중 하나라는 게 문제로군.”

“우리는 틀리지. 적어도 유적의 위치는 알고 있다면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뒤편, 갈라진 틈사이의 홈에 열쇠를 끼워라.”

“응?”

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벨로크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유적의 위치다.”

카라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범위가 너무 광범위했던 탓이다.

그렇다면 저 넓은 숲을 일일이 다 뒤져야 한다는 건가? 모험가들의 미궁이라고 불리는 장소를? 그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정보를 수집하자고 했구나? 이거··· 대작업이 되겠는데.”

“마우스만 딸칵거리면 되는 게 아니란 거지.”

“무슨 소리야?”

카라의 의문에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현실은 역시나 시궁창이란 뜻이다.”

저물녘의 태양 빛이 기사의 얼굴 반쪽을 붉게 물들임과 동시에 다른 한쪽을 검게 칠했다. 씁쓸한 그의 음성을 대변해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이야기를 끝으로 세 사람은 몰던 말을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도시라서 땅값이 비싼 걸까. 육안으로 보이는 건물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우물과 마구간, 창문으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 등은 여관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찢어 죽일 뱀? 이름 한 번 독특하네. 여관주인이 뱀한테 데인 기억이라도 있는 걸까?”

여관의 간판을 확인한 카라가 중얼거리고, 마구간지기에게 말들을 맡긴 세 사람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대신 경계 어린 눈빛과 속삭임이 일행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사가 대체 왜 이런 곳에···”

“마법사도 있어. 설마하니 저들도 숲의 보물을 노리고 온 건가?”

“저 대검. 정말 휘두를 수는 있는 거야?”

자칭 모험가라 칭하는 미래의 도굴꾼들과 그들을 노리고 온 상인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벨로크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오래돼서 삐거덕거리는 바닥과 불똥을 튀며 지글거리는 벽난로, 풍기는 음식 냄새까지 전형적인 여관이었다.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구석에서 분위기를 잡고 있는 한 사람만 제외한다면, 특별해 보이는 건 없었다.

요리를 하느라 바쁜 모양인지. 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써는 소리와 휘젓는 소리만이 부엌 안에서 들려왔다.

그래서 점원이 대신해서 일행을 맞이했다. 다른 테이블에 맥주잔을 올려놓던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화들짝 놀랐다.

“어서 오세요. 손··· 세상에 기사님!”

하이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용병들도 흠칫 놀랐고, 벨로크 일행도 놀랐다. 카라가 물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벨로크와 아델이 서로를 쳐다봤다. 아델이 고개를 저었고, 벨로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입을 열려는 찰나. 여인이 부엌을 향해서 크게 외쳤다.

“아버지! 어서 나와 보세요! 지금 누가 오셨는지 보세요!”

“리안. 대체 무슨 일이 길래 이렇게 호들갑이냐? 무슨 귀족이라도··· 아니?! 나리들이 아니십니까!”

여인의 부름에 앞치마를 메고 있던 중년인이 부엌에서 나왔다. 이윽고 그도 벨로크 일행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호들갑을 떠는 부녀의 모습에 아델은 그녀답지 않게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너희들은 누군데 우리를 안다는 것이냐?”

여관주인이 손에 묻은 물을 앞치마에 닦았다. 이윽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도돈 입니다. 나리들. 오커 영지에서 저와 리안을 구해주셨지 않습니까요?”

“오커 영지?”

뱀 괴물이 다스리던 땅이었다. 그곳에서 구한 생존자 중 한 명인가?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만나는 거지?

벨로크가 턱을 쓰다듬자. 여관 주인이 씨익 웃었다.

“그곳에서도 여관을 경영했었죠. 그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이곳으로 왔지만 말입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부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여관에서 영주의 부하들에게 희롱 당하던 그들 부녀를 구해준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챙기고 도망을 치더니, 어떻게든 죽지 않고 자리를 잡은 모양이군.

리안이 싱글싱글 웃으며 벨로크 일행을 이끌었고, 그녀를 따라 빈 테이블로 가서 앉은 벨로크가 도돈을 보며 말했다.

“용케도 재건했군.”

“원래는 사촌이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제가 사들여서 간판만 바꾼 겁니다. 나리들께서 구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벌어먹고 있습죠.”

시키지도 않았건만, 도돈이 거대한 맥주잔 세 개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흐음. 아주 깡패처럼 살지는 않았나 봐?”

전의 마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일까. 의외라는 표정을 지은 카라가 세 사람을 바라봤다. 아델은 말없이 맥주를 들이켰고, 벨로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돈이 황송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귀하신 분들이 어째서 이런 곳에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요기 거리를 좀 내오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물론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기사님.”

도돈과 리안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떠나자. 카라가 탁자를 두드렸다.

“마침 잘 됐어. 여관주인이라면 웬만한 시정잡배보다는 아는 게 많을 거야.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는데?”

현재 도시의 상황이나 흐르는 숲에 대한 정보 등 알아야 할 건 많았다. 하지만 벨로크가 의문을 나타냈다.

“저들도 이 도시에 정착한 지는 얼마 안 되었을 텐데. 아는 것이 있겠나?”

도돈 부녀가 떠난 후 바로 다음 날. 자신들이 출발했다. 중간에 여러 사태에 휘말려서 계획이 꼬였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몇 주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면 시골 영지의 여관주인이 도시의 여관주인이 되기에 충분하지. 사촌의 도움도 있었을 테니 말이야.”

지인 찬스라 이건가? 이런 건 어디를 가나 똑같군.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벨로크가 술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물을 적게 탔는지 맛이 제법 괜찮았다. 밍밍한 오줌 맛이 아닌, 제대로 된 보리 맛이 강하게 난 것이다. 아마 도돈이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그의 술 빚는 솜씨도 일조했을 것이다. 사람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하군.

벨로크가 슬쩍 웃으면서 맥주를 홀짝거렸다.

돈과 폭력, 권위를 사용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잔에 맺혀있는 물방울이 나무 탁자를 무심하게 적셨다.

혹여 기사 일행이 행패를 부릴까. 예의 주시하던 용병들은 그들이 조용히 있자. 이윽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유리잔을 쾅 내려놓는 소리, 어느 마을의 아낙을 자빠뜨렸다는 음담패설, 왕년의 싸움 실력 자랑 등. 여관 안은 금세 수다스러워졌다.

“이런 품위 없는 새끼들이···”

인상을 찌푸린 아델이 검집을 잡으며 일어나려는 순간, 다가온 도돈이 커다란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싱싱한 놈으로 구웠습니다. 드셔보시죠.”

통째로 구운 칠면조가 자글자글 윤기를 흘려댔다. 아델은 냉큼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다리 부분을 뜯어서 벨로크와 자신의 접시에 올렸다. 카라의 접시에는 가슴살 부위를 올려주었다. 나이프를 든 채, 입맛을 다시고 있던 카라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하필 많고 많은 부위 중에서 왜 가슴살일까? 난 퍽퍽한 음식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데.”

“편식은 안 좋은 거다.”

“그건 그렇지만, 하다못해 날개라도···”

카라가 울상을 지을 때. 고기를 썰어서 입으로 가져가던 벨로크가 도돈을 향해 말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딸이 생각나는지, 두 여인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도돈이 말했다.

“물어보시죠.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이 도시의 상황과 흐르는 숲에 대한 정보를 좀 듣고 싶은데.”

도돈은 알겠다는 듯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들도 요정들의 보물을 찾아서 오신 거군요?”

“그런 셈이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지만··· 뭐, 상관없겠죠. 앉아도 되겠습니까?”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온 도돈이 합석했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요정족들이 나스 밀림으로 이주 한지가 수백 년이 넘었군요. 그들이 떠나기 전 보금자리로 사용했던 이 숲은···”

도돈의 말은 대강 이랬다. 대체 무슨 연유 때문에 요정족들이 떠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남겨둔 유산과 유적지들이 이따금 발견되는 이 숲에는 신비로운 마법이 걸려있다. 바로 사람들의 오감을 흐리게 하고, 현혹시킨다는 것이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가 갑자기 펼쳐진다거나, 나무나 수풀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등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도돈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미궁의 숲이니, 무덤이니 하고 불리는 건가? 벨로크가 속으로 생각할 때. 칠면조를 먹던 카라가 입가를 슥 닦고는 말했다.

“저렇게 넓은 공간에다가 그런 주문을 반 영구적으로 걸 수 있다고? 대마법사 몇이 달라붙어도 그건···”

불가능해. 라고 답하려던 카라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침묵을 택했다.

마법이란 세상의 법칙을 비틀어서 술자 내면의 힘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행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마법이었다. 그렇기에 그 무엇도 확정지을 수 없었다.

카라가 입을 닫자. 물을 한 모금 마신 벨로크가 물었다.

“마법이 걸린 위험한 숲이라는거군. 그게 끝인가?”

도돈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라면 그렇죠. 하지만 상황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다듬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릴 얘기는 현재 도시의 상황과도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숲에 걸려있던 마법이 풀렸습니다.”

일행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해놓고는 한다는 말이 마법이 풀렸다고?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은 벨로크가 물었다.

“그러면 잘된 일 아닌가?”

쓰게 웃은 도돈이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 걸려있던 시절에는 열이 들어가면 셋이 살아 돌아왔었죠. 피죽도 못 먹어서 쫄쫄 굶은 상태라고 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침을 꿀꺽 삼킨 도돈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열이 들어가서 열이 죽습니다. 숲은 지금 되살아난 망자와 뒤틀린 괴물들로 가득 차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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