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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숲
부자연스러운 고요였다. 마을 어귀에서는 아직까지 비명소리와 흐느낌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하지만, 격전이 일어났던 여관 주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랬기에 벨로크의 나지막한 음성은 훨씬 더 또렷하게 주위에 울려 퍼졌다.
사제 한 명이 침을 삼켰다. 때가 타고 피가 튄 법복 위로 여리한 목울대가 꿀렁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전투 직후, 날카롭게 벼려진 벨로크의 오감은 저런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포착했다.
긴장되나 보군. 피식 웃은 벨로크가 꼽아놓은 대검에 다시금 어깨를 기댔다.
강철기둥은 굳건하게 그를 지탱해주는 동시에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왜 말이 없나? 아까전의 그 기세는 어디로 간 거지?”
새파랗게 젊은 기사가 반말을 찍 내뱉었다.
“저··· 그것이.”
“으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 일행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며 우물쭈물 거렸다.
저자의 전율할 정도의 무력도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사실은 더 이상 그들에게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단은 떨어진 위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의심이 들던 기사 일행을 악마로 규정했다. 마침 하멜른의 주교와 영주 살해범이라는 좋은 죄목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그 순간. 진짜 악마가 자신들을 습격해왔으며, 적으로 규정한 기사들에게 도리어 목숨을 구함 받았다.
이것만 해도 이미 교단 일행이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사내의 옆에 떡하니 서 있는 여기사의 존재였다.
급박한 전투 와중, 그녀의 몸 주위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봤을 때. 교단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여기사는 그분에게 직접 성력을 받은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여신의 불꽃을 사용했었으니까.
그 말은 곧 하멜른의 주교는 정말로 타락했으며, 영주는 그에게 홀린 미친놈이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살아남은 교단원들은 서로 고개를 맞대고 의견을 나눴다.
“많은 형제들이 죽었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 것이 문제지.”
“우리는 지금 여신님의 검을 모욕한 셈이니까요.”
한 사제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나머지 교단원들의 얼굴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여신의 대행자로서 악마들을 무찌른 신실한 기사에게 감사와 존경을 보내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겁박하고 죽이려 했다? 그것도 여신님에게 직접 세례를 받은 성기사를?
백번 사죄해도 모자랄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교단이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고개를 숙이고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다.
“일단 진심 어린 사죄를···”
“맞습니다. 저희는 지금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를 듣고 있던 여사제 루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주교가 악마였다니깐.’
동시에 그녀는 자신에게 모욕을 준 카단을 고소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악마에게 당했던 상처는 사제들의 치료를 받았기에 거의 다 나아있었지만, 그의 자존심은 금이 쩍 간 것이 한눈에 보였다.
떨리는 어깨와 충혈될 듯 시뻘건 눈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평소에도 교단의 기대주니 뭐니, 꼴값 떠는 모습이 가관이었지. 이제 이걸로 저놈도 콧대가 좀 꺾였겠지.’
애초에 이번 원정도 카단의 주장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 이 사태가 끝나면 그는 나름대로의 책임을 져야 하리라. 그렇게 되면 교단 내에서의 입지도 약해지겠지.
그 사실이 카단을 조급하게 한 걸까? 그는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고 말았다.
“듣자듣자 하니까.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이런, 미친.”
“카단 경?!”
루나가 머리를 짚었고, 주위에 있던 성기사들이 기겁했다. 하지만 카단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벨로크 일행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애초에 당신들이 오해를 받을 만한 짓을 벌인 것이 문제 아닌가?! 루즈백 주교님··· 아니, 그자가 정녕 악마였다면 근처의 교회에 지원 요청을 했었더라면 이런 일은 안 생겼을···”
기가 찰 정도의 억지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대뜸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카단의 말을 끊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그들을 기다렸다가 시민들의 피해가 더 커지면?”
“그건···”
카단이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그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뱉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에 차오르는 울분과 초조함이 맞물려 나온 충동적인 외침이었다. 벨로크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너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우리의 행동이 오해의 여지를 준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상은 조금 달랐지만, 어디서나 포장은 중요한 법. 옆에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고 있던 카라가 잘됐다는 듯 쐐기를 박았다.
“마법사로서의 견해를 조금 보태자면, 놈은 시민들의 고통과 절망을 제물 삼아서 도시 내에 구울화의 저주를 퍼트리고 있었어. 시간이 갈수록 저주의 의식은 광범위해졌을 테고 종래에는 도시 하나를 죽은 자들의 땅으로 만들었겠지.”
그녀의 말도 이제는 음습한 주문쟁이의 협잡이 아니었다. 마을과 영지를 악마로부터 구해낸 영웅적인 마법사의 의견이었다.
이쯤 되자 카단은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그것에는 주위에 있던 교단원들의 강렬한 시선이 그를 관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단 경!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경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지금 이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정녕 모르시는 겁니까?”
소리친 성기사는 어릴 때부터 카단과 같이 수련하며, 술을 마시거나 주사위 도박을 즐기는 등. 친우라 부를만한 자였다.
“카밀라 경? 경이 어떻게 나한테···”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힐 때 더 고통스러운 법이었다. 카단의 얼굴이 볼썽사납게 일그러졌다.
그 순간. 벨로크의 뒤편에 서 있던 아델이 주인의 귓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 벨로크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윽고 두 사람을 슬쩍 쳐다보다가 피식 웃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입가만 슬쩍 당겨서 스산한 미소를 지은 아델이 카단을 향해 다가갔다.
튼실하면서도 유려하게 생긴 강철 부츠가 흙바닥을 거칠게 밟았다. 그녀가 다가오자 카단의 주위에 있던 교단원들은 절로 자리를 피했다. 카단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지만, 검은 이미 부러진 후였다.
“뭐··· 뭐요? 지금··· 억!”
짜악 소리와 함께 카단의 고개가 휙 꺾였다. 여성이라고는 하나, 아델의 근력 또한 다른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따귀 한 방에 입안이 째진 카단이 피를 주륵 흘렸다.
“으으, 이··· 이런 짓을 하고도.”
“이 개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으르렁거린 아델이 자신의 손을 한 번 슥 털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흠칫 놀란 교단 일행이 두 사람에게서 눈을 돌렸다.
뜻은 명확했다. 앞으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모른 척하겠다는 뜻이었다.
아델은 씨익 웃었고, 카단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 잠시 후, 깡통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성기사의 비명이 미친 듯이 울렸다.
“정말 이것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소. 처음부터 오해 때문에 비롯된 일 아니오?”
벨로크는 하늘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꿉꿉한 것이 비가 올 것 같은데. 떠나기 좋은 날씨는 아니군.
“이토록 신실하며 명예로우신 분이라니. 과연 안톤 사제님의 보증을 받을 만한 분들입니다. 어젯밤의 일은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카단을 대신해서 새롭게 교단원들을 이끌게 된 성기사가 성호를 그었다. 벨로크는 속으로 웃었다.
언제는 그깟 종이 쪼가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싹 바뀐 그들의 태도가 기가 찼던 것이다. 하지만 원래 세상살이란 것이 이런 법이었다. 그렇기에 힘과 명분 체면이 필요한 것이다.
속마음을 숨긴 벨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전투마 세 필에 약간의 여비, 더불어서 우리 일행의 치료까지 해주었지 않소? 이 정도면 그간의 불신은 싹 털어버리기에 충분하오. 역시 여신의 교단다운 배포요.”
벨로크가 교단 일행의 체면을 살려주자. 성기사 또한 크게 웃었다.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말이 잘 통했던 것이다. 그는 말 위에 올라탄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신의 검. 아델 경을 보면서 깊은 성호를 그었다.
“부디 고귀한 여행길에 헬레나 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아델은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고, 벨로크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도 몸조심하시오.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말이오.”
교단원들과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의 인사를 뒤로한 채, 세 사람은 여정길에 올랐다. 일행은 탈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진 채,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세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특히나 힘이 좋았다.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벨로크를 태운 채, 걸었다. 사제들의 치료를 받아 몸을 회복한 카라가 한결 밝아진 기색으로 말했다.
“벨로크. 네가 타고 있는 그 말 있잖아.”
벨로크는 여관에서 싸준 딸기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답했다.
“이놈이 왜?”
“그 성기사꺼래.”
“그 성기사?”
카라가 투구를 벗은 채, 머리카락을 휙휙 털고 있는 아델을 보며 웃었다.
“아델한테 맞아서 반병신이 된 놈 말이야. 세상에··· 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지 뭐야? 무슨 돼지 멱을 따는 것도 아니고.”
“흥. 그딴 놈이 타기보다는 벨로크님이 타는 것이 말 에게도 더 좋은 일이다.”
아델이 코웃음을 치자, 카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벨로크도 한 마디 거드려는 순간.
히히히힝
그의 무게를 견디고 있던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덕분에 벨로크는 마시던 술을 푸욱 뿜었다. 위엄 넘치던 기사의 모습이 한순간에 흐트러졌다.
이를 본 마녀가 배를 부여잡았고, 여기사 또한 입가를 가리며 슬쩍 웃었다. 입가에 술이 묻은 벨로크도 피식 웃었다.
때마침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갑옷에 튕겨 나가며 땡땡거렸고, 로브에는 이슬처럼 맺혔다. 벨로크는 빗물과 섞인 술을 꿀꺽거렸고, 아델은 투구를 다시 썼다. 카라도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제 그들이 남긴 흔적이라고는 말방굽의 고랑 사이에 고인 빗물뿐이었다.
추격자들을 무찔러서 그런가, 요 며칠간 평화로운 여정길이 계속되었다.
세 사람은 마침내, 목표로 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카라가 넓게 펼쳐져 있는 초목들의 집합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곳이 바로 흐르는 숲. 다른 말로는 미궁의 숲, 길 잃은 모험가들의 무덤이자 옛 요정들의 땅.”
카라가 잔뜩 분위기를 잡자. 옆에 있던 아델도 입을 열었다.
“제 눈에는 그냥 평범한 숲처럼 보입니다. 더럽게 넓어 보인단 것만 빼면요.”
“흐음. 저곳에 이 책의 봉인을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단 말이지. 거기다가 신비로운 유물까지. 하지만 바로 가기에는···”
카라가 하늘을 바라봤다. 정오를 훌쩍 넘겼던 태양이 이제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벨로크 역시 고개를 저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그가 숲을 경계 삼아서 떡하니 지어진 성벽을 가리켰다.
“일단 오늘 하루는 푹 쉰다. 하루아침에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닐 테니까. 우선 숙소부터 잡고,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지.”
“영주성으로 가실 겁니까?”
“아니, 이번에는 여관이다. 아무래도 여러 소문을 듣기에는 그곳이 더 적합할 듯싶군.”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기사와 성기사 마녀는 카르벤의 성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