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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40화 (40/222)

40

추격자

바닥이 쿠웅 울리고, 검붉은 피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일순 주위에는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주둥이가 상어처럼 튀어나오고 하반신이 촉수가 된 처녀, 두터운 엄니를 자랑하며 돼지머리가 된 중년 여인 등.

인간의 거죽을 벗어던지고, 흉물이 된 악마들조차 멍을 때릴 정도였다.

“라이가르?”

노인의 모습에서 거대한 딱정벌레의 형상이 된 악마가 입을 열었다. 곤충의 입이 자각자각 거리며 동료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피에 젖은 갈기와 쏟아진 내장 등이 사자 악마의 마지막을 말해줄 따름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다고? 곤충의 겹눈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흡사 죽은 동료에 대한 애도. 내지는 이 싸움이 단순한 여흥에서 목숨을 건 전투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놈과 마주하고 있는 벨로크가 보기에는 그냥 더러운 곤충 눈까리일 뿐이었다.

벨로크가 휘둘렀던 검을 다시 들어 올리자. 흠칫 놀란 딱정벌레 악마가 등에 달린 날개를 활짝 펼치며 외쳤다.

“이런 젠장! 모두들 한꺼번에 덮쳐!”

위이잉

녀석의 얇은 날개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가속했다. 그것을 발판삼은 놈이 자신의 뿔을 앞세운 채. 벨로크에게 날아갔다. 갑옷 채로 꿰뚫어버릴 셈이었다.

이를 보조하듯, 옆에서는 상어 악마의 촉수가 뻗어왔다.

벨로크는 쥐고 있던 검을 허리춤으로 가져가며 자세를 낮췄다. 날아오는 촉수를 먼저 베어내고 딱정벌레 악마를 막아낼 생각이었다. 그 순간.

“벼락이여!”

파지지직

카라의 외침과 함께 쏟아진 번개줄기가 촉수를 불태웠다. 상어 악마가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카라는 다시금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덕분에 벨로크는 자신의 검을 눈앞에 있는 딱정벌레 악마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놈은 충분히 빨랐으며, 저돌적이었다. 하지만 오는 속도에 맞춰서 베어내기에는 충분했다.

눈을 빛낸 벨로크가 검을 휘둘렀다.

강렬한 풍압과 함께 거대한 쇳덩이가 날아들었다. 이를 본 딱정벌레 악마는 저도 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뿔이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덤벼드는 날붙이를 보자,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도 라이가르처럼 반 토막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놈은 다급히 날개를 움직여서 방향을 틀었다.

“헬레나시여! 우리를 보살피소서!”

“카밀라 경! 멋대로 달려 나가시면 안 됩니다. 방어에 치중하십시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다른 동족들을 막아내고 있는 헬레나의 종년들을 먼저 처리할 셈이었다. 곤충의 날개짓 소리와 햇빛에 반사된 키틴질 갑각이 벨로크의 눈앞을 스쳤다. 그는 도망치는 놈을 굳이 잡지 않았다.

빠르기도 빨랐지만, 교단 일행의 안위야 자신이 알 바 아니었다. 일행을 돕는 것이 급선무였다. 혹여 교단이 악마들에게 당하고 그들을 노린다면 문제가 커졌지만···

‘숫자도 많으니 알아서 잘 버티겠지.’

그사이에 끝내버리면 된다. 이제 보니 놈들이 도움이 되었군. 생각을 마친 벨로크가 곧바로 움직였다.

“크아아악! 이 빌어먹을 빨강머리 창녀가!”

“다음에는 어디를 구워줄까? 네 살 냄새가 그럴듯하지 않니?”

카라는 손에서 불덩이나 얼음 창을 던져대며 상어 악마를 상대하고 있었다.

놈이 촉수를 휘두르면 다급히 보호막 주문을 외워서 막아냈다. 기습과 변칙적인 공격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놈인지, 다양한 주문을 사용하는 마법사와 상성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반투명한 역장 안에서 벨로크를 바라본 카라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고갯짓했다. 자신은 문제없으니 다른 쪽을 도우란 뜻이었다. 그래서 벨로크는 아델이 상대하고 있는 돼지머리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르르륵

아델은 여신의 성기사임을 뽐내기라도 하듯. 몸 주위에서 찬란한 불꽃을 내뿜으며 녀석을 상대하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사제나 성기사들의 것과는 그 모양과 빛깔 자체가 달랐다.

돼지 악마는 꾸에엑 짐승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발굽을 휘둘러댔지만, 아델은 침착하게 방패를 휘둘러서 이를 막아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입으로는 연신 기도문을 외워댔다. 그럴수록 그녀의 몸 주위에서 나타나는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덕택인지 돼지 악마는 별다른 힘을 못 쓰고 있었다. 두툼한 갑옷처럼 보이던 놈의 갈색 털은 고약한 연기를 피워내며 타오르고 있었고, 뿜어져 나오는 성력으로 인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그런 녀석의 뒤를 노리는 건, 식은 수프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벨로크가 악마의 뒤편에서 달려들자. 이를 본 아델이 곡도를 크게 휘둘렀다.

보이는 동작이 워낙 컸기에 돼지 악마는 손쉽게 피했다. 빈틈을 잡았다고 생각한 걸까? 돼지 악마가 흉악한 눈을 빛냈다.

“끄륵. 이 역겨운 헬레나의 종년아! 단숨에 짓뭉개주마!”

와락 침을 튀긴 돼지 악마가 육중한 양팔을 들어 올렸다. 콩알만 한 인간을 찌부러트릴 셈이었다. 그 순간. 벨로크가 돼지 악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머리 위를 스치는 풍압 덕분일까. 흠칫 놀란 돼지 악마가 다급히 몸을 돌렸다.

태양빛을 받아 반사된 대검이 자신에게 짓 쳐들고 있었다.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랐기에 돼지 악마는 주마등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냥 머리와 함께 상체가 갈라지며 죽었다.

촤아아악

끈적한 피와 살점이 두 사람에게 튀었다. 벨로크는 검과 갑옷에 그대로 맞았지만, 아델은 아니었다. 그녀의 주위에서 타오르는 불꽃 덕에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린 것이다. 저건 좀 부러운데. 벨로크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물었다.

“아델. 괜찮나?”

토막 난 악마의 사체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던 아델은 벨로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문제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움직인다.”

“네.”

슬쩍 고개를 끄덕인 벨로크가 악마와 싸우고 있는 카라를 눈짓했다. 악마가 무슨 수를 부린 건지. 그 잠깐 사이, 역장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놈에게 다가갔다. 애초에 여관을 중심으로 퍼져서 싸웠기에 그렇게 많은 걸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크루트까지··· 이놈들이!”

카라를 몰아붙이면서도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상어 악마가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하반신을 꿈틀거렸다. 살아있는 송곳들이 공기를 가르며 쏘아져 왔다.

몸에서 뻗어 나왔기 때문인지, 촉수들은 꼭 일직선상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공중으로 치솟았던 것이 직각으로 뚝 꺾여서 떨어지거나 바닥을 파고들어서 땅을 헤집으며 오기도 했다.

방패를 들어 올린 아델이 다급히 외쳤다.

“벨로크님! 제 옆으로 오십시오!”

아델의 검은색 눈동자는 이제 주황빛으로 반짝이며, 이글거릴 만큼 타올랐다. 몸 주위에서 뿜어지는 열기도 흙바닥을 그을릴 정도였다. 화염으로 된 보호막이었다.

저거 정말 안전한가? 타죽는 거 아니야? 벨로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그냥 앞으로 달렸다. 기사의 강철 면갑 사이로 악마의 살덩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에 맞춰, 바람과 흙을 가르는 소리 또한 선명해졌다.

놈의 촉수들은 이제 몇 발자국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 번에 다 베어내지 못할 만큼 그 수가 많았다. 하지만, 벨로크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짧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감각들을 한계까지 활성화 시킨 후,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후웅

흙먼지가 거칠게 치솟으며, 벨로크의 몸이 한 차례 가속했다. 일순 거대한 몸뚱이가 흐릿하며 움직였다. 상어 악마의 눈과 육체는 기사의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채찍처럼 쏘아지던 촉수들이 애꿎은 허공을 옭아맸다.

“뭣이?”

당황한 상어 악마는 뻗어냈던 자신의 육체를 다시금 불러들였지만, 그때는 이미 벨로크가 그녀의 몸뚱이 아래까지 다가간 후였다.

“장신이군.”

괴물이 된 여인을 올려다본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양 무릎을 굽인 후 재빨리 점프했다.

상어 악마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까 전 사람을 잡아먹을 때 지었던 여유만만한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눈꺼풀이 없는 동공도 거칠게 흔들렸다.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놈은 이제 깨달은 것이다. 포식자로서의 자신의 삶이 끝났다는 것을. 더불어 곧 죽은 동료들을 따라가게 될 거란 것을.

허공을 유영하던 기사의 대검이 벼락처럼 날아들었다. 상어 악마의 눈이 크게 치켜 떠졌다.

“안···”

녀석은 저 끔찍한 흉기를 막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벨로크의 날붙이는 그런 악마의 피륙을 무자비하게 갈라버렸다.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동시에 뱀처럼 구불거리던 촉수들이 추욱 늘어졌다.

강철 기사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지면이 쿠웅 울렸고, 그 위로 악마의 잔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벨로크는 덕지덕지 묻은 살점들을 툭툭 털어내며 주위를 살폈다. 한 방에 나가떨어졌던 카단의 예시 덕분일까. 교단 일행은 생각보다 잘 싸우고 있었다.

비록 스물이 넘던 인원이 열 단위로 줄어들었지만, 기어이 악마 한 마리를 잡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아까 전의 딱정벌레 악마와 인간의 형태를 한 채,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 남자뿐이었다.

조용했던 시골 마을은 한순간에 고귀한 성전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여신을 부르짖는 소리와 그들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한대 뒤엉켜서 울려 퍼졌다.

그는 쓰게 웃었다. 현실은 한 폭의 그림처럼 고귀하지 않았다.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뭐, 언제나 그렇지.

“저를 못 믿으셨던 겁니까?”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을 끊은 벨로크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입을 삐죽 내민 아델이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말하고 있었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벨로크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놈을 좀 더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이니. 내가 너를 못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누구를 믿는단 말이냐.”

아델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벨로크의 마지막 말에 히죽 웃었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아으. 정말이지! 아슬아슬했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 카라가 허리를 두드리며 나타났다. 그녀가 앓는 소리를 내며, 땀에 절은 머리카락을 스윽 넘겼다. 벨로크가 물었다.

“괜찮나?”

카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도 쉴 틈 없이 입을 움직였다.

“아니, 죽겠어. 몸 상태가 안 좋은데. 무리를 해서 그런가? 자칫하면 주문을 잃었을지도 몰라.”

“엄살은··· 잃지는 않았다는 말 아닌가.”

아델이 코웃음을 치자. 카라는 인상을 비죽 찌푸렸다.

“너는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흥. 그게 전부 다 체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다. 너는 일단 단련부터 해야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것 아닌가.”

아델의 말투에서 무언가를 알아차린 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설마··· 내가 벨로크에게 업혀서 왔다고 지금까지 이러는 건.”

“··· 이 마녀가!”

“그만.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아델이 발끈하려는 찰나. 두 사람의 대화를 끊은 벨로크가 앞을 가리켰다.

전투는 끝난 게 아니었다. 딱정벌레 악마의 뿔에 처박힌 성기사가 집을 부수며 날아가고 있었다. 카라와 아델은 동시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저 얄미운 새끼들을 꼭 도와줘야 해?”

“그냥 다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됩니까?”

이런 때에는 또 단결이 잘 되는군. 벨로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어깨에 대검을 툭 걸치며 까딱거렸다.

“그래도 저들이 시선을 끌어줘서 쉽게 끝났지 않았나? 기사의 자비심이란 것을 한 번 보여주자고.”

기사, 자비심. 그 말에 아델이 눈을 빛냈다.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지한 것들에게 깨달음과 함께 구원의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넌 성기사잖아? 따지고 보면 저들은 네 동료들···”

“그 입 닥쳐라 마녀! 나는 여신의 성기사가 아니라. 벨로크님의 기사니까!”

이것들이 또 싸우네. 벨로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훌쩍 움직여서, 전장에 난입한 기사가 대검을 휘둘렀다. 벌레는 토막이 났고, 도끼는 산산조각 났다.

벨로크는 피가 뚝뚝 흐르는 대검을 바닥에 쿵 찍었다. 육중한 무게와 크기 덕분에 마치 기둥을 세운 것만 같았다. 그는 검으로 된 기둥에 등을 슬쩍 기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태양빛은 전보다 훨씬 더 강렬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따가운 시선들이 주위에서 느껴졌다.

도망쳤던 마을 사람들, 살아남은 교단일행, 마지막으로... 신실했던 성기사 카단의 부릅떠진 눈.

벨로크는 그들의 눈을 굳이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목을 한 번 뚜둑 거렸을 뿐이다. 기사가 입을 열었다.

“우리 서로 할 얘기가 많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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