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추격자
카단.
태양의 여신 헬레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수도 대교회의 성기사가 된 사내.
그를 위시로 한 교단의 징벌자들은 인근 오커영지에서 일어난 괴사태의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
요 몇 달 사이 지하의 악이 날뛰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제들과의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목적지까지 가는 도중, 웬 국왕의 개들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들은 무사히 오커영지에 도착했다.
이제 이 땅을 조사하고 악마가 실재한다면 놈을 처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커의 교회는 불타있었고, 들려온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대검을 가진 기사님과 난폭한 여기사께서 이 영지를 구해주셨습니다요.”
“뭐라고?”
교단은 당황했다. 악마를 단둘이서 잡았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지만, 그들의 특색 있는 복장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검, 난폭한 여기사··· 이곳에 도착하기 전 마주쳤던 그 두 사람임이 틀림이 없다.
이건···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교단은 정체불명의 기사들의 행적을 쫓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하멜른에서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을 마주했다.
“놈들은 무자비한 약탈자들입니다! 감히 영주님과 주교님을 죽이고 마녀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아니, 내가 봤을 때는 그 주교가 이상한 괴물로 변신을···”
“개소리 집어쳐! 그건 틀림없이 사악한 마녀의 속임수였을 테니까!”
병사와 시민들의 증언을 뒤로한 채, 교단은 고민에 휩싸였다. 대체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오커 영지를 구한 영웅적인 행보는 분명 찬사 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하멜른에서의 행동은 그와 반대되는 끔찍한 만행이었다.
심지어 주민들조차 그들을 수배범으로 몰고 있었으니··· 상황을 살피던 중. 젊은 사제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조금 그렇지만··· 혹여 루즈백 주교님이 악마였으며, 하멜른의 영주는 이에 홀렸던 게 아닌지···”
품계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었기에 나올 수 있는 자유로운 발상이었다. 교단 일행의 마음속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그래,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된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었기에 이 가정을 제쳐두었던 건지도 몰랐다.
이윽고 동요가 퍼지려는 찰나. 신실한 성기사 카단이 소리를 꽥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형제여. 그대의 말 대로라면, 지금 주교님이 악마에게 타락했으며, 그로 인해 도시가 이 꼴이 되었다는 얘기요? 바로 우리 교회의 일원이었던 사람의 손에 의해서 말이오!?”
카단이 타박하자. 자신이 뱉었던 말의 무게를 깨달은 걸까. 여사제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여사제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단을 위시로 한 몇몇 광신적인 사제와 성기사들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루나 자매. 방금 자매님의 발언은 지독한 신성모독이요! 아시겠소? 이단 심문에 회부될 수도 있다는 말이요!”
“네, 네. 죄송합니다. 카단 경.”
루나가 계속해서 사과하자. 카단의 분노도 조금 가라앉은 것인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사실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그의 마음속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저 이 사태를 수습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벌써 짜두었다. 카단이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루나에게 하는 것이 아닌, 일행 전체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좋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요. 루즈백 주교님이 타락해서 지금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그걸 인정해버리는 순간. 우리 교단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오!”
이 땅에는 수많은 신이 있는 만큼, 자연히 그들을 모시는 많은 교회가 있었다. 잘못하면 이번 일을 빌미로 다른 교단에게 물어뜯길 수가 있었다. 동료 성기사 중 하나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찌 하는 게 좋겠나.”
카단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신께서 말씀하시길. 이 모든 사태의 시발점은 왕국의 개들. 두 명의 기사들이오. 놈들을 잡는다면 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이오. 왜냐면 놈들은 사악한 악마의 하수인들이니 말이오.”
설령 그들이 진짜로 무고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교단으로서는 단지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카단은 속으로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운이 따라준 걸까.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 두 기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세 좋게 여관의 문을 열어젖힌 카단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왜 말이 없나? 설마하니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히 이 땅을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나?”
“누구지?”
입구에 선 카단을 보고 벨로크가 어리둥절해 하자. 어느새 허리춤의 검을 뽑은 아델이 말했다.
“하멜른에 가는 도중 마주쳤던 성기사 놈입니다. 그··· 병신들 있지 않습니까?”
아델의 속삭임에 벨로크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성기사? 아. 그놈들. 벨로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뚱맞게 다른 곳으로 갔던 멍청이들 말이군. 우리를 쫓아온 건가? 왜지? 설마하니 복수?
“잠깐, 오해야. 우리가 주교를 죽이긴 했지만··· 그자는 악마였어!”
그때. 카단의 소속을 알아보고 상황을 파악한 카라가 말했다. 하지만 카단은 이빨을 드러내며 검을 뽑았다.
“더러운 세 치 혀를 놀리는구나. 루즈백 님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그분의 숭고함마저 모욕하다니.”
쇳소리와 함께 햇빛을 받은 칼날이 흉측하게 번들거렸다. 하지만 카라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믿어줘. 증거가 있어! 우리 일행에는 헬레나의 가호를 받은 성기사가 있으며, 로벤 교회의 추천서 또 한 가지고 있다고.”
카라가 벨로크와 아델에게 슬쩍 눈짓했다. 아델보고는 성력의 힘을 좀 끌어내서 저들에게 보여주라는 거였고, 벨로크에게는 추천서를 꺼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추천서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아델 또한 전투를 준비했다. 카라가 의아해하자. 벨로크가 앞을 가리켰다.
“저 녀석 얼굴을 봐라.”
마녀가 고개를 돌렸다. 비뚤어진 미소를 지은 카단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기사의 비웃음 소리가 여관에 울려 퍼졌다.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를 늘어놓는구나. 내 어릴 때부터 여신께 귀의했지만, 신앙이나 교리, 믿음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귀족 놈들이 여신의 가호를 받는다? 신성모독도 정도껏 해야지. 그리고 로벤 교회의 추천서? 그깟 종이 쪼가리 우리가 알게 뭐냐? 어쩌면 네놈들이 황금을 주고 면죄부를 사듯 신용을 샀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마지막으로 음습한 주문쟁이가 결백을 증명한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군.”
카단은 졸지에 자신의 신을 모독한 성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카단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임에도 현실감이 없는 소리처럼 들려왔으니까.
특히나 사악한 주문쟁이의 결백이라는 점이 제일 와 닿았다. 벨로크가 카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한마디 해주는 게 어떤가? 주문쟁이.”
“후우.”
대답 대신 한숨을 푸욱 내쉰 카라가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다시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눈에서는 안광이 번뜩였다. 손에 들린 지팡이도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맹목적인 추종의 결과물들이 바로 여기에 있었군. 그게 네놈들의 목숨 줄을 앗아갈 거야.”
“흥.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카단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뒤편에 있던 사제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성기사들도 각자 무기를 꼬나쥔 채, 건물 내의 창문이나, 뒷문을 통해서 돌격할 준비를 했다.
그래. 대화는 필요 없다는 거지. 겁에 질린 여관주인을 툭툭 쳐서 2층으로 대피시킨 벨로크가 검을 들어 올렸다.
“형제들이여. 함께 이 악마들을 무···”
“꺄아아악!”
카단이 우렁차게 소리치려는 와중. 바깥에서 그의 목소리보다 더 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기점으로 마을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비명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 뭐냐.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냐.”
“무슨 수를 쓴 거냐?”
갑작스레 일어난 소란에 벨로크 일행을 포위하고 있던 교단원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그 연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들 타이밍 한 번 예술이군. 벨로크가 혀를 찼다.
“네놈들 때문에 꾸물거렸더니, 손님들이 찾아와 버렸잖나? 쯧. 애꿎은 마을 사람들만 죽게 생겼군.”
이를 알아들은 카라와 아델의 얼굴이 확 굳었다. 두 사람이 각각 주문과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뭐라···? 그게 무슨 개소리···”
영문을 모르는 카단이 중얼거리는 찰나. 피투성이가 된 마을 여인이 여관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급했는지, 신발도 한 짝 벗겨져 있었다. 여인은 엉망이 된 머리로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다급히 소리쳤다.
“도··· 도와주세요! 괴, 괴물들이··· 괴물들이 습격. 사··· 사람을 먹고 있어요!”
“괴물이라고?! 이보시오. 일단 진정하고 차분하게 말을···”
뒤편에 있던 사제 한 명이 여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아우성이 끊이지를 않았다.
교단원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주교를 살해한 범인을 잡는 것도 중요했지만, 눈앞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단 경! 어떻게 합니까?”
한 사제가 묻자. 카단이 이빨을 으득 물었다. 목표가 코앞이었다. 이놈들만 처리하면 교단의 위신을 다시 세울 수가 있거늘. 하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카단은 어쩔 수 없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가 벨로크 일행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동료 성기사 몇을 손짓했다.
“나와 로튼 경, 카밀라 경이 이놈들을 감시하고 있겠소! 그 사이에 형제님들이 습격한 괴물들을···”
카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뒤편에 있던 사제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모, 모두들 저곳을 보십시오!”
마을의 입구 쪽이었다. 교단과 벨로크 일행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아비규환이 된 마을 안에서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사람들이 여관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견 보이는 외모들은 평범했다.
얼굴에 여드름이 난 청년, 수염을 기른 노인, 머리가 벗겨진 중년부터 시작해서 8살난 꼬마나 색기 넘쳐 보이는 처녀, 통통해 보이는 중년 여인까지 다양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들의 손에 마을주민들의 머리통이 들려있으면 얘기는 달라졌다.
놈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히죽히죽 웃으면서 여관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거 빨리 찾았군. 설마하니 팔자 좋게 마을에서 쉬고 있을 줄이야.”
여드름이 난 청년이 말했다.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구쟁이 같은 음성이었다.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오던 처녀 또한 씨익 웃었다.
“여신의 종 새끼들도 있어. 놈들의 모가지도 같이 잘라가자. 아스타로트님이 좋아하실 거야.”
“방심은 하지 말도록. 어찌 됐든 천상의 빛은 우리에게 상극이니까.”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걸어가던 그가 손에 들린 머리통을 휙 던졌다.
데구르르
토마스라고 불린, 꼬마 소년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다가 발치에 툭 부딪혔다. 카단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죽은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작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카단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주위에 있던 사제들과 동료 성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놈들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채,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놈들은 별로 없었으니까.
“이 끔찍한 지하의 악귀들 같으니! 헬레나시여! 나에게 힘을!”
여신의 이름을 부르짖은 카단이 벼락처럼 달려 나갔다. 입고 있는 갑옷이 요란하게 들썩거리며 몸에서 주황빛의 성력이 치솟았다.
악마들과 성기사의 거리가 순식간에 짧아졌다.
카단이 검을 내려찍었다. 그에 맞서서 나선, 여드름이 난 청년이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벌레라도 쫓는 듯한 몸짓이었다. 카단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여신의 검이며, 그분의 신실한 종이다. 저 빛나는 태양이 나의 앞길을 비추는 한··· 끄어억.”
카단은 말을 잇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악마의 팔과 부딪친 칼이 땡강 부러진 것은 물론이요. 번쩍거리는 갑옷 또한 잔뜩 우그러져 버렸다.
“몇 백 년 사이. 여신의 칼날도 잔뜩 녹슬었구나. 이거 재미없는 사냥이 되겠는데.”
팔을 툭툭 털면서 쓰러진 카단을 뻥 차버린 청년이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그에 동조하듯 다른 악마들 또한 키득키득 웃었다. 놈들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몸에서도 우드득 뼛소리가 울렸다.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고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교단 일행은 기겁했다. 카단은 젊었지만, 그래도 성기사로서의 기본기는 대단히 충실한 사내였다. 그런 사내가 한 번에 나가떨어진다고?!
“카··· 카단 경이!”
“헬레나여!”
교단 일행이 주춤 물러설 때. 여관 입구에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변신을 하고 있는 악마들의 시선이 대번에 집중되었다. 붉은 머리 마법사 년에 여기사 하나, 마지막으로 거대한 대검을 매고 있는 사내였다. 대단히 개성 있는 복장들. 자신의 동족들을 넷이나 쳐죽인 그놈들이었다.
대검을 든 기사가 자신들을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청년의 가죽을 던지고, 이제는 사자의 머리에 근육질의 몸통으로 변한 악마도 기세 좋게 달려 나갔다.
맹수의 발도 흙먼지를 뿌려댔고, 강철 부츠도 흙을 뿌려댔다. 떨어지는 태양 아래. 괴물과 기사가 맞부딪쳤다.
“동족의 원수! 드디어 나타나셨군. 크흐흐흐. 좋다! 너의 검과 나의 손톱. 얼마나 강한지 겨뤄보자!”
사자 악마가 크게 포효하며 자신의 날붙이를 휘둘렀다. 벨로크도 자신의 날붙이를 마주 휘둘렀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악마는 반 토막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