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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38화 (38/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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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뒤편에서 대악마의 군세가 쫓아오고 있다고 해도, 세 사람의 행동은 바뀐 것이 없었다. 그냥 한숨 자고, 대로변을 통해서 다시 걸었다.

비록 말이 싣고 있던 짐까지 그들이 둘러매야 했기에 덩치가 두 배쯤 커졌으며, 기사와 마법사로서의 품위가 사라진 게 흠이었다.

“벨로크 님. 지금이라도 짐을 저한테 주시고 체력을 보존하시는 게···”

아델의 걱정스러운 어투에 벨로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짐과 무구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 뒤뚱거리고 있는 종자가 보였다.

작은 머리통을 넘어서는 크기였다. 그런 모습으로 말하면 설득성이 너무 떨어지는데···

“괜찮다.”

벨로크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벨로크 또한 아델과 같은 꼴이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카라의 것까지 그가 대신 들었으니까. 옆에서 걷던 카라가 미안하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들 수 있다니까···”

“너도 네 몸 상태나 신경 쓰도록. 쓰러지면 업고가야 할 테니까.”

“정말이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섬세하다니깐.”

슬쩍 웃으며 고개를 저은 카라가 입고 있던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얼굴에 음영이 드리우며, 쏟아지는 태양 볕을 일부 가려주었다.

로브 속에서 마녀의 갈색 눈이 흐릿하게 빛났다. 사실 그의 말마따나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몸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강행군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없지.’

지금도 추격자들의 발걸음은 일행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더위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로브 안으로 식은땀이 비죽 흘렀다. 하지만 카라는 이를 악물며 발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생사를 건 모험을 하는 와중에도 세상은 평화로웠다.

여행자들의 금품과 목숨을 갈취하는 도적들은 눈에 뜨이지도 않았다.

상행을 다니는 상인들이나, 일감을 찾아 각지를 떠도는 용병들마저 안 보였다.

오직 세 사람만이 이 고요한 땅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흩날리는 먼지 너머로 벨로크가 혀를 찼다. 원래라면 길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 중. 말을 타고 있는 자들이 보이면 그들로부터 탈것을 얻어낼 생각이었다.

돈이든 무력이든 뭐든 써서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니. 뭐지? 오늘이 무슨 날인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카라가 입을 열었다.

“저기···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우리 이렇게 가도 되는 거야?”

우려 섞인 물음에 느릿하게 걸어가던 벨로크가 되물었다.

“뭐가 말인가?”

카라가 안절부절 해하며 말했다.

“아니, 적들이 추격해오고 있잖아.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이거나 더 빨리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아. 그런 얘기였군. 이 마녀가 왜 이래? 더위를 먹었나?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네 입으로 말했지 않나?”

“응?”

“왕국과 교회의 눈이 있는 한 놈들이 대놓고 움직이지는 못할 거라고.”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면 인기척이 드문 깊은 산중으로 가는 것보다 눈에 뜨이는 대로로 움직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그렇네.”

곰곰이 생각하던 카라가 이마를 탁 쳤다. 이런 멍청이. 마법사라는 년이 겁에 질려서 상황을 살필 줄도 모르다니.

“거기다가 여기서 속도를 더 높인다고?”

벨로크가 하늘을 바라봤다. 더럽게 쨍쨍했다. 그의 등도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벨로크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하나도 모른다. 어쩌면 어젯밤의 요정처럼 추적술에 조예가 있는 놈이 또 있을지도 모르지. 이러한 상황에서 무리를 했다가는 막상 놈들이 습격해왔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거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거리가 멀다. 식량이든 장비든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괜히 겁에 질려서 도망치기보다는 체력을 안배하며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뒤뚱거리면서 걷던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도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하지만 아델은 기어이 카라를 보며 한마디 했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좀 찡찡대도록. 마녀.”

쏘아붙이든 나온 그 말에 카라는 눈을 크게 떴다.

“뭐··· 뭐라고?”

이내 카라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몸과 정신이 피곤한 상태라서 그런가. 평소라면 그냥 넘겼을 말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아가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왜 이렇게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카라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나는 그저 만약의 사태에 대해서 얘기한 것뿐이야!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해야지!”

“우리는 그저 벨로크 님의 말씀만 따르면 된다.”

아델이 콧방귀를 뀌자. 카라가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너! 그거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야. 알아? 맹목적인 추종은 파멸만을 불러올 뿐이야. 인간이라면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함께 언제나 의심과 경계를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이익, 시끄럽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걸 본 벨로크는 머리를 흔들었다. 단순히 머릿수가 하나 늘었을 뿐이건만, 졸지에 고요하던 여정이 시장통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말 많은 마녀에 의해서 아델의 고지식함이 벗겨질지도 모를 일이니까.

귓가로 들려오는 여인들의 음성을 뒤로한 채,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는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맑은 파스텔 톤의 풍경화가 그를 반겼다. 미세먼지나 매연 따위가 없기에 탄생한 자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쓰게 웃었다. 지금의 상황이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일행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요 며칠간 평안한 여행은 계속되었다.

흐르는 숲 근처에 있는 도시. 카르벤에 도착하기까지, 반 정도의 거리밖에 안 남은 것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아직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반이나 남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일행은 우선 눈앞에 보이는 작은 마을에 들러서 재정비를 하기로 결정했다.

“오늘 하루는 여기서 묵고 가는 거야? 그렇다면 씻을 수 있겠네? 따뜻한 식사랑 잠자리도 즐길 수 있겠구나!”

카라가 때가 탄 로브를 확 젖힌 채, 반색하며 외쳤다. 어느새 긴장이 다 풀어져 버린 그녀의 모습에 벨로크가 찬물을 끼얹었다.

“아니, 식량만 보충하는 즉시 떠난다. 혹시 말을 구할 수 있다면 몇 필 구하는 것도 좋겠군.”

“잠깐, 너무 빡빡한 것 아니야? 하다못해 식사라도···”

카라가 벨로크에게 따지자. 벨로크는 말없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눈짓했다. 카라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

높아졌던 카라의 목소리 톤이 다시금 낮아졌다. 입가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지금 쫓기고 있었지. 맞아. 괜한 사람들을 말려들게 할 수는 없지. 하멜른에서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카라가 젖혔던 후드를 다시 썼다. 마녀의 시야가 다시 좁아졌다. 세 사람은 얼기설기 쌓아놓은 목책을 피해, 마을의 입구로 향했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보통 이런 곳에 사는 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외지인에 대한 배척이 심했다.

일종의 방어기제인 셈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중이떠중이 용병이나 배 나온 상인들에게나 통하는 허세였다. 때가 탔다지만 기사 둘이 입고 있는 갑옷과 마법사의 로브는 진짜였다.

거기다가 서슬 퍼렇게 빛나는 저 눈빛들을 보라. 수틀리면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입구를 지키던 자경단원들은 들고 있던 창을 재빨리 치운 후,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귀, 귀하신 나리들! 산딸기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요!”

투박한 인사를 뒤로한 채, 벨로크가 물었다.

“이 마을에 여관이 있나?”

“있습니다요! 이곳에서 촌장님네 집 다음으로 큰 집이 여관입죠!”

“그렇군. 수고하게.”

“감사합니다요!”

산딸기 마을. 인근 숲에서 나오는 딸기의 질이 매우 우수하며, 그것으로 빚은 술이 마을의 특산물인 땅. 하지만 곧 마을을 떠날 세 사람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였다.

일행은 바로 여관을 향해서 걸었다. 길도 채 다듬어지지 않은, 코딱지만 한 마을이었다. 잡화점이니 식료품 가게니 하는 도시의 문명이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다.

“토마스! 너 이 녀석!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아버지. 딱 한 시간! 한 시간만요! 조금만 놀다가 올게요!”

집안의 일손을 거들기 싫어서 도망치는 아이, 마당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은 채, 바느질을 하고있는 노파, 곧 있으면 다가올 추수를 위해서 쟁기를 손질하는 농부 등.

많은 사람들이 일행을 지나쳐갔다. 물론 그들 역시 벨로크 일행과 마주하면 얼굴이 굳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카라가 고개를 저었다.

“왠지 악당이 된 기분인걸.”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선량한 마을을 습격한 탐욕스러운 기사들과 매부리코 마녀인가?”

아델이 푸훗 웃었고, 카라가 머리를 긁적였다.

“매부리코라니··· 너무 고전적이잖아.”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자. 어느새 여관의 앞이었다. 기름칠이 안 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자는 주인이 보였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영업을 안 하는 모양이다. 카라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주문을 써볼게. 약간의 충격 마법을···”

“그런 번거로운 짓을 왜 하는 거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아델이 여관주인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자고 있는 주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고, 입가에 침이 묻은 주인이 화들짝 깼다.

“뭐···뭐요? 아직 영업시간이 아니오만. 허억··· 기, 기사들이 여긴 왜.”

잠시 정신을 못 차리던 그는 곧 눈앞에 있는 여기사와 눈을 마주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델은 주인의 반응은 신경도 안 쓴 채, 거만하게 말했다.

“너. 지금 당장 가게 안에 있는 음식들을 가져와라. 가급적이면 보존식 위주로.”

“네··· 네?”

“내 말 안 들리나? 여행용 식량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인이 되묻자. 아델이 허리춤의 검을 만지작거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기겁하며, 재빨리 자리를 박찼다. 가게 안이 부스럭거리고,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을 보던 아델은 고개를 돌리고는 뿌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봐라. 마법사. 이렇게 하는 거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카라가 두 사람을 바라봤다.

“너희들··· 지금까지 이렇게 여행을 해온 거야?”

두 기사는 태연하게 답했다.

“편하지 않나?”

“돈을 떼먹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거 순 깡패 새끼들···”

말끝을 흐린 카라가 이마를 짚을 때. 여관주인이 숨을 몰아쉬며, 보따리 여러 개를 들고 왔다.

“허억, 허억. 나리들 여기 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 치는 될 겁니다.”

“수고했다.”

꾸러미를 배낭에 넣은 아델이 금화를 툭 던져주었다. 반짝이는 황금 동전에 여관주인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벨로크 일행에 대한 평가가 확 바뀌었다. 가게에 무단 침입한 무뢰배들이 아닌, 자비심 넘치는 신실한 기사님들로.

“가··· 감사합니다!”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세 사람을 배웅했다.

“참. 그러고 보니 여기서 말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벨로크가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여관의 문이 쾅 열렸다. 일행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떨어지는 태양 아래, 상대의 판금 갑옷이 매끈하게 빛났다. 자수가 놓인 십자가 문양과 허리춤의 검 또한 반짝거렸다. 중무장 기사가 벨로크 일행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드디어 찾았다. 이 악마의 하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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