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준비
웬만한 인간은 범접할 수 없는 또렷한 이목구비는 분명 요정의 것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녀석의 피부가 마치 시체처럼 회색빛이었다.
내가 보던 것하고는 좀 다르게 생겼는데. 벨로크가 의문을 느낄 때. 녀석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너. 진짜 인간 맞나? 내 화살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는데.”
높은 나무 위에서 말해서 그런가. 작은 목소리임에도 크게 울려 퍼졌다.
“나도 네 푸르죽죽한 피부 색깔의 이유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이런 질문을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벨로크는 습격자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물론, 두 눈은 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였다. 녀석의 무시무시한 솜씨를 잘 알고 있으니까.
저 년 참. 높게도 올라갔네. 저걸 어떻게 잡는다··· 벨로크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습격자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슬쩍 쓸었다. 은빛 실타래가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흑요정.”
“음?”
“타락 요정, 지하의 악귀들에게 들러붙은 배반자, 눈부신 햇살 대신 진득한 어둠을 벗 삼아 살아가는 자. 이 중에서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악마 새끼라는 말을 왜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거지?”
벨로크의 날카로운 말을 흑요정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뭐, 너희가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일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실로 대단한 솜씨야. 완벽한 암습이라 생각했는데. 앞의 세 놈이 당할만하군.”
세 놈? 벨로크의 눈에 이체가 떠올랐다.
“로벤에서부터 추격해왔다. 이건가?”
“그래, 바호메트의 영혼 파편이 나에게 와서 알려주더군. 웬 괴물 같은 인간이 있다면서 말이야. 확실히 너의 무력은 놀라워. 미처 내가 합류하기도 전에 카락서스까지 무찌를 줄은 몰랐거든. 하지만···”
흑요정이 씨익 웃었다. 입가가 쭈욱 찢어지며, 아름답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내가 재밌는 사실을 한 가지 알려줄까? 나는 정찰병일 뿐이야. 지금 너희의 뒤에는 수많은 지옥불의 군세들이 뒤따르고 있지. 죽음마저 너희들을 구원하지 못해. 영혼마저 사로잡힌 채, 끝없이 고통 받을 테니까.”
훌륭한 정보들을 알아서 불어주시는군. 악마 요정의 서슬 퍼런 협박을 벨로크는 피식 웃어넘겼다.
“유언은 그걸로 끝인가?”
벨로크는 검을 들어 올렸다. 기사가 전투태세를 취했음에도 요정은 태연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 크기의 수십 배는 되는 나무에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화살이 너에게 닿지 못하는 만큼, 너의 검 또한 나에게 닿지 못한다는 걸 모르는 거니?”
비록 나락으로 떨어져 어둠 속에서 살아가기는 했지만, 요정은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숲속에 위치한 거대한 나무 위. 마법사도 다른 곳에 있으니. 놈에게 날개가 달린 게 아닌 이상 자신을 해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시간을 좀 끌면서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놈들을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늑대 무리를 규합해서 한 며칠 정도면 되겠지. 그게 아니라면 내 손에 끝장나든가···
흑요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짧게 심호흡을 한 벨로크가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바닥이 지르르 울리고 굉음이 울렸다. 하지만 요정은 콧방귀를 꼈다.
저 대검의 파괴력은 익히 알고 있다. 그렇지만 수천 년 묵은 이 고목은 저 검보다 몇 배는 더 컸으며 강인했다.
거인족이 전력으로 휘두르는 도끼 정도면 흠이라도 날까?
타락 요정 엘렌이 무식한 기사를 비웃었다.
“헛수고를··· 응?”
엘렌은 당황했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쏟아지며,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몸도 기우뚱거렸다. 지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상황을 알아차린 엘렌이 입을 떡 벌렸다. 수천 년 묵은 고목이 칼질 한 번에 쓰러지고 있었다.
엘렌은 방금 전까지의 여유도 잊어버린 채, 재빨리 점프했다. 그녀의 얄상한 몸이 하늘을 날았고, 다행히도 늦기 전에 옆의 나무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그 순간. 고목이 완전히 쓰러졌다.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풀썩 치솟았다.
엘렌은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그녀가 허리춤의 활을 꺼내 들고는 재빨리 발사했다.
쐐애액
어둠을 가르고 날아간 쇳덩이가 먼지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엘렌이 기대했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타고 있던 나무가 또다시 기우뚱 넘어가기 시작했다.
“시발!”
욕설과 함께 다시금 점프한 엘렌이 다른 나무로 옮겨탔다. 그녀는 이제 역습을 가하는 것도 잊은 채, 재빨리 다리를 놀렸다.
달밤의 요정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원숭이처럼 날아다녔다.
아름다운 얼굴이 잔가지와 수풀에 긁혀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엘렌은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사냥이 아닌,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허억, 허억. 미친 기사놈. 이쯤이면 되었겠지?"
엘렌이 숨을 돌리며 아래를 슬쩍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의 두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미친 나무꾼이 도끼 대신 대검을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콰아앙
놈의 칼질 한 번이면 어김없이 나무가 박살났다. 엘렌은 다시금 발을 놀렸지만, 결국 덫에 걸린 사냥감의 말로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꺄아아악!”
단련된 요정 궁수는 그 와중에도 낙법을 펼쳐 충격을 최소화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서슬 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기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 하. 안녕?”
머리가 까치집이 된 엘렌이 입가를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 들려는 찰나. 벨로크가 그녀를 걷어찼다.
“꺽.”
강철 그리브가 복부를 강타하자. 숨이 턱 막힌 엘렌이 힘없이 바닥을 구르며, 움찔거렸다.
멀리있던 누군가가 이 상황을 본다면 가련한 요정 여인을 괴롭히는 도적기사 그 자체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손에 들린 대검을 들어 올려서 누워있던 요정을 검면으로 후려쳤다.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엘렌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벨로크가 그녀를 바로 끝장내지 않은 것은 별것 없었다.
대악마 놈들의 추적자들이 자신들을 뒤쫓는다니까. 이년으로부터 정보를 좀 캐볼 생각이었다. 어둠에 잠긴 숲속에서 도적기사의 음성이 차갑게 울려 퍼졌다.
“시작하지. 내가 너의 팔다리를 잘라야 입을 열 텐가? 아니면 순순히 불 텐가?”
뼈가 부러졌기에 흐물거리면서 움직인 흑요정이 시선을 돌려 벨로크를 바라봤다.
그녀의 붉은 눈은 아까와는 달리 더 이상 일렁거림이 보이지 않았다.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위의 어둠과 동화될 만큼 착 가라앉아있을 뿐이었다.
벨로크는 이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눈이었다. 묻는다고 해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세게 때렸나?
“흐··· 흐흐. 궁금해? 그러면···”
콰앙
그래서 벨로크는 요정의 말을 끊은 채, 검을 휘둘렀다. 그나마 봐줄만하던 요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피떡이 되었다. 검은 피가 촤악 치솟았으며 그는 레벨업을 했다.
“음.”
벨로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레벨업의 간격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하멜른에서의 병사들과 구울 떼, 카락서스라는 악마와 흑요정까지 죽여야 올랐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 년은 왜 머릿속으로 말을 안 걸고, 육성으로 내뱉었을까. 악마마다 종류가 다른 건가? 아스타로트라는 놈의 추격자들은 얼마나 가까이 왔을까? 놈들의 규모는? 의문이 차올랐지만, 그에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털어낸 벨로크가 내면세계로 들어갔다.
스킬 포인트는 일단 모아둔 채, 스탯만 찍을 생각이었다. 수없이 많은 능력치 중에서 무엇을 찍어야 할지 벨로크는 잠깐 고민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힘을 찍었다.
어중간하게 이것저것 건드리다가는 잡탕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건 고향 땅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벨로크가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는 괴물의 경지를 넘보는 자신의 근력이 생존의 확실성을 더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요정의 찢어진 옷가지를 이용해서 검에 묻은 피를 대충 닦은 벨로크가 발걸음을 옮겼다. 캠프로 돌아가자 과연 개판이었다.
수십 마리의 늑대 시체들 때문에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몇몇 녀석은 불에 타기라도 한 듯 온몸이 시꺼멨다. 멀쩡한 곳은 카라가 펼쳤던 보호막이 있는 곳뿐이었다.
죽이기는 다 죽인 모양이군. 벨로크는 물컹하게 밟히는 살덩이의 감촉을 느끼며 일행에게 다가갔다.
“다들 괜찮나?”
“괜찮으십니까?!”
“해결한 모양이네?”
질문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피곤한 듯, 늑대들의 시체 위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아델과 그녀보다는 조금 나아 보이는 상태의 카라가 고개를 돌렸다. 벨로크가 모닥불의 주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럭저럭. 활잡이는 죽였다. 흑요정이더군.”
카라가 눈을 크게 떴다.
“타락한 요정... 역시나, 아스타로트의 추격자가 맞았어. 하지만 너무나 빠른데?”
“로벤에서부터 나를 쫓아왔다더군. 녀석의 말에 의하면 아스타로트의 군대가 우리를 뒤따르고 있다던데.”
벨로크가 귀찮게 됐다는 듯 말했다.
“군대···”
아델이 얼굴을 굳혔고, 카라는 흠. 하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창하게 군대라고 표현했겠지만, 놈들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몰라.”
“왜 그렇게 생각하지?”
벨로크가 묻자.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긴 카라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들어봐. 물론 하멜른에서는 교회가 통째로 악마에게 점령당해있었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니야. 계속 당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악마들이 이렇게 날뛰고 있다면 분명 행동을 개시했을 거야.”
벨로크는 하멜른에 도착하기 전 마주쳤던 교단의 군대를 떠올렸다. 음. 확실히 뭔가를 하려고 하기는 했었지. 엉뚱한 곳으로 가서 문제였지만.
카라가 계속해서 말했다.
“녀석들이 이 땅에 다시 나타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하지만 그동안 놈들이 끼친 피해를 환산하면, 떠돌던 뜬소문이 확신을 얻고, 왕국이 지하의 악귀들을 적으로 규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벨로크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에게 맞을 만큼 맞았으니, 교회와 왕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얘기인가?”
“그래, 그러니까 놈들도 몸을 사릴 거야. 아무리 대악마라고 해도 함부로 대로변에서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을 거란 말이지.”
아델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소수정예로 습격을 해올 가능성이 높군요.”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지만··· 우리가 그것조차 감당할 수 있을까?”
카라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당장에 일행은 하멜른의 영체형 악마와 흑요정 궁수에게도 쩔쩔맸었다.
만약 두 녀석이 동시에 덤벼들었다면? 틀림없이 일행은 몰살당했을 것이다. 아니, 벨로크는 무사했을지 몰라도 자신과 아델은 틀림없이 죽었을 거다. 시작부터 일이 이렇게 꼬이다니. 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아델은 입이 근질거렸다.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조차도 상황의 심각함을 알기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악마라는 존재들은 이리도 강대하단 말인가?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아델은 고개를 흔들며 치솟는 불안을 잠재웠다. 겁을 집어먹은 것은 오커 영지때 만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더 강해지면 된다.
이제는 방법도 있으니까. 품속에 있는 여신의 기도문을 떠올린 아델이 물었다.
“벨로크 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절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벨로크의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스킬 덕분이든, 악마들을 때려잡으며 강해진 정신력 덕분이든, 일행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의연함이든 뭐든 좋았다.
대악마의 하수인.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몰라도 자신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습격해온다면 오는 족족 죽여서 경험치로 만들어 줄 뿐이다.
벨로크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에 변경은 없다. 우리는 흐르는 숲으로 간다. 하지만 속도를 조금 높일 필요는 있겠지. 말들을 혹사시켜서라도···”
잠깐, 그러고 보니··· 전투마들이 안 보이는데? 말을 멈춘 벨로크가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늑대들의 시체들 사이로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이동수단들이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미처 말들까지는 신경을···”
아델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미안, 나도 정신이 없어서...”
카라 또한 고개를 흔들었다.
“망할...”
벨로크가 머리를 짚었다. 인생사 쉬운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