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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36화 (36/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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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벨로크는 원래부터 카라를 구한 후 흐르는 숲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곳에 있는 변질석과 여러 유물을 구해서 일행의 무력을 강화시킬 생각이었으니까.

그건 대악마라는 목표가 생겼다고 해도 똑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그곳으로 가야 했다.

어떻게 보면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일행 중 누구도 벨로크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 아델이야 그렇다 치고, 카라 또한 목숨 빚을 졌기 때문이다.

카라는 손에 들린 책과 벨로크를 잠시 바라보더니 턱을 괴었다.

“흐르는 숲. 들어본 적 있어. 옛 요정들의 터전이자 이제는 주인 잃은 땅이며, 길잃은 모험가들의 무덤이라 불린다지.”

“그런 수식어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응? 전부 다 알고서 가는 것 아니었어? 그 신의 힘인가 뭔가로?”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눈으로 보던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다르더군.”

그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흐르는 숲이 미로처럼 복잡하다는 것과 보물이 숨겨진 유적의 위치뿐이다.

당연했다. 텍스트 몇 자와 폴리곤 덩어리 조금으로 표현하기에는 이 세계는 너무나 광활했으며, 생동감이 넘쳤으니까.

“흐음··· 아무리 괴물 같은 기사라고 해도 완벽하지는 않다 이건가?”

벨로크의 자신 없다는 말투에 카라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굴 백 마리와 영체형 악마까지 때려잡은 사내도 별수 없는 일이 있는 모양이지. 하긴 그러니까 인간이지.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겠군.

차오르는 자존감에 카라가 기분 좋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그에 맞춰 불똥도 타닥 튀었다. 벨로크는 마녀의 실없는 웃음을 무표정하게 넘겼다. 그리고 기대어두었던 대검을 무릎에 받친 채, 손질을 시작했다.

묻어있던 핏덩이를 닦아내고, 기름을 바르는 동시에 검날을 살폈다. 그렇게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기운도 넘실거렸다. 아니, 더 강해져 있었다. 분명 해골 형상을 한 악마를 죽이고 나서부터인 거 같다.

벨로크는 어째선지 찝찝해졌다.

‘무슨 마검 같은 건가? 악마의 피와 살로 담금질해서 점점 강해진다는 그런 거냐?’

벨로크가 검을 살피자 이를 본 아델 또한 읽고 있던 기도문을 탁 접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곡도와 방패, 안장에 매어두었던 도끼까지 가져와 손질하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공터에는 두 기사가 쇳덩이를 다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 고요를 깬 것은 역시나 카라였다.

“어쨌거나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흐르는 숲이로군. 왕국과 동부 아리안 사이의 경계령. 미궁의 숲.”

벨로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델은 무기를 내려놓고는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저희가 있는 곳이 왕국의 수도 부근이니, 그냥 동쪽으로 꺾으면 되겠군요. 거리상으로 보면 말을 타고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 예상이 됩니다만···”

아델이 말끝을 흐리며, 벨로크를 쳐다봤다. 육중한 무게의 대검이 있는 한 주인은 제대로 승마를 못 한다.

그 말은 곧 목적지까지의 시간이 더 걸린다는 얘기였다. 카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급할 것 있어? 우리가 아스타로트의 수하를 죽였다고 한들, 놈이 바로 추격자를 보내올 것 같지는 않은데. 조금만 천천히···”

“말이 씨가 된 것 같군.”

카라의 말을 끊은 벨로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어리둥절해 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벨로크는 검을 들어 올렸다. 기사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어둠 속을 주시했다. 흐릿한 암영 너머로 붉은색의 일렁거림이 보였다. 이윽고 녀석이 옆으로 쭈욱 찢어졌다. 그 순간. 벨로크가 일행의 앞을 막으며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팅팅

벼락처럼 쏘아진 화살 몇 발이 그의 검에 의해 튕겨 나갔다. 어둠 속에 있던 눈동자가 땡그랗게 커졌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본 마녀와 아델도 재빨리 자리를 박찼다.

“습격!”

“이렇게 빠르다고?”

아델이 방패와 검을 들어 올렸다. 카라 또한 입술을 중얼거렸다. 곧 일행의 주위로 반투명한 역장이 생겨났다. 다시 쏘아진 화살들이 이번에는 역장에 맞고 튕겨 나갔다.

벨로크는 검을 들어 올린 채, 화살이 쏘아진 방향을 주시했다. 대로와는 정반대 방향인 숲의 깊은 곳 이었다. 곧이어 그의 귓가로 쳇. 하며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우

쩌렁쩌렁한 울음소리가 숲속을 가득 채웠다. 풀벌레들의 소음이 대번에 가라앉으며, 새들도 푸드득 날아가 버릴 정도로 흉포한 괴음이었다.

곧이어 땅바닥을 짓밟는 소리와 함께 수풀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전후좌우에서 다 들렸기에 일행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한 채, 사방을 경계했다.

으르르 컹컹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습격자들이 이를 드러냈다. 코끝에 스며드는 짐승 냄새와 수십 쌍의 샛노란 눈이 일행을 포위했다.

아델이 방패를 촘촘히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늑대 새끼들이...”

“아까 전 화살을 쏘던 놈의 짓이 틀림없어. 설마··· 아스타로트의 하수인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가. 보통 덩치가 아니야. 저 정도면 몬스터라고 봐야 해.”

카라 또한 지팡이를 빙빙 돌리며 늑대들을 노려봤다. 놈들의 비수 같은 손톱과 톱니 같은 이빨이 달빛에 번뜩거렸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사람 정도는 가뿐히 씹어먹을 괴물들이었다.

늑대들은 아직까지 덤벼들지 않고 있었지만, 마치 먹잇감을 노리듯 자세를 바짝 낮춘 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꽤나 섬뜩한 대치전이었다. 아주 약간의 계기나 놈들을 부리는 술자의 명령 하나면 수십 마리의 괴물들이 일제히 달려들 것이다.

어쩌면 저 늑대들을 부리는 술자 놈이 원하는 것도 그것일지 모른다. 이대로 지루한 대치전을 이어나가며, 일행을 차츰차츰 궁지에 몰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정신력과 체력을 뺀 후, 화살로 마무리. 완벽하군.

벨로크는 스스로 짚어 본 적의 계획이 꽤나 그럴 듯하다고 느꼈다. 이것은 전사로서의 감인가? 현대인으로서의 지식인가?

하긴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놈의 의도대로 해줄 생각은 없었다. 벨로크가 한 걸음 크게 내디디며, 보호막의 바깥으로 나갔다.

쐐애액

경고하듯 숲속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쇠뇌의 그것보다 훨씬 빠르며 강력했다. 판금 갑옷도 뚫을 기세였다. 하지만 벨로크의 검이 더 빨랐다.

화살들은 이번에도 맥없이 튕겨 나갔다. 보호막 안에서 이를 보고 있던 카라가 물었다.

“어쩔 셈이야?”

멀리서는 화살이 날아오고 늑대가 사방을 포위한 상태였다. 마법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호막 주문을 풀었다간 당장에 놈들의 뱃속으로 직행할 테니까. 이를 알고 있던 벨로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머리에 구멍 뚫리기 싫다면 주문이나 잘 외우고 있도록.”

벨로크가 재빨리 달려 나갔다. 그러자 늑대들이 미친 듯이 짖으며 덤벼들었다. 귀가 웅웅 울려대는 것을 참은 벨로크가 대검을 휘둘렀다.

쩌어억

순식간에 네 마리가 토막 났다. 그럼에도 놈들은 동족들의 시체와 내장을 밟으며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 좌우에서 이빨과 손톱이 닥쳐들었다. 짐승의 치악력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벨로크는 대검을 방패처럼 받치며 놈들을 후려쳤다. 그 틈을 노리고 또다시 화살들이 쏘아져 왔다. 이놈이?

쐐애액

마치 노린 것처럼 날아드는 부분이 절묘했다. 이건 아무리 벨로크라도 피하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다. 급소는 아니었으니, 몇 발 맞아줄 생각이었다.

“벨로크 님!”

그 순간. 옆으로 다가온 아델이 앞을 가로막으며 재빨리 방패를 내밀었다. 화살들은 이번에도 튕겨 나갔다. 벨로크는 아델을 향해서 곧바로 외쳤다.

“숙여!”

아델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고, 벨로크는 손에 들린 대검을 풍차처럼 돌렸다. 힘줄이 비죽 솟으며 무자비한 칼날이 적들에게 쇄도했다.

화살이 날아온 틈을 타서, 내려찍으려던 놈, 점프하던 놈, 돌격하던 놈. 모두 다 한 줌 핏덩이가 되었다. 그러자 포위망에 일순 구멍이 뚫렸다.

벨로크는 찾아낸 틈으로 용맹하게 돌격했다. 늑대들도 성가시지만, 진짜 문제는 활잡이였다. 언제 뒤통수가 뚫릴지 모르는 것이다. 우선 어둠 속에 숨어있는 녀석부터 잡아야 했다.

“아델. 뒤를 부탁한다.”

“물론입니다.”

크르르릉

벨로크의 뒤를 노린 늑대들이 덤벼들려고 했지만, 아델이 재빨리 막아섰다. 곡도가 쉴 틈 없이 휘둘러졌다. 하얗던 털이 새빨갛게 물들며 살을 갈라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방패가 거대한 장벽처럼 뻗어 나갔다.

콰아앙

“깨개갱.”

팔이 뚝 부러진 짐승이 구슬픈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버둥거리는 놈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아델이 숨을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공터는 이미 늑대들에게서 나온 피로 인해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죽은 놈들의 모피를 벗겨다가 무두장이에게 맡긴다면 기절할 정도의 양이었다.

그럼에도 늑대들은 수는 여전히 많았다. 동족들의 피를 봐서 그런가. 기세는 더욱더 사나워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카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기다려! 보호막을 풀고, 주문을 써볼게.”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녀가 손에 들린 검과 방패를 꾸욱 움켜쥐었다. 이 정도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여정에서 그녀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은 이제 여신의 성력도 받았지 않았는가? 아델은 방금 전에 읽었던 기도문의 구절을 외웠다.

“나. 지금 여기서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니. 부디 은총을 내려주소서. 내 앞을 가로막는 저 악귀들을 단죄할 힘을 내려 주소서.”

이상했다. 단순한 말의 집합일 뿐이건만, 기도문을 외울수록 용기가 샘 솟으며, 몸 안의 성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전신이 타오를 것처럼 뜨거웠다. 종자의 두 눈은 어느새 선명한 주홍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델은 자신도 모르게 여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헬레나.”

화르륵

그러자 그녀의 몸 주위에서 선명한 불꽃이 타올랐다.

벨로크는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쫓아서 쉴 틈 없이 달렸다. 하지만 상대도 바보가 아니었다. 무쇠 갑옷을 입은 채,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기사하고 정면 대결을 하고 싶지는 않은지. 습격자 또한 요리조리 도망치면서 화살을 날려댔다.

인사하듯 시야를 가리는 잔가지와 한 번씩 꺼지는 흙바닥들, 어쩌다 걸리는 거미줄까지 야밤의 숲에서 벌이는 추격전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이거... 방금 먹었던 스튜가 다 소화될 지경이군. 벨로크는 오커 영지에서의 악몽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개고생을 해가면서 적에게 접근해야 했다. 오직 칼침 한 번을 먹이기 위해서.

‘역시 기사 말고 마법사나 궁수를 해야 했는데.’

속으로 불평을 하자 또다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쐐애액

모닥불의 빛마저 멀어져 있는 지금, 어둠 속에서 쏘아지는 저 빛은 훨씬 더 위협적이며 빠르게 느껴졌다. 벨로크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자 강력해지는 오감과 함께 일순 주위의 광경이 느려졌다.

화살의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으며, 몸에 와닿는 풀의 촉감과 미세한 벌레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한 공간 속에서 벨로크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불꽃과 함께 화살이 튕겨 나갔다. 벨로크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다시금 세상이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벨로크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숲 속에서 저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기술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강력한 능력인 만큼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극심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자신이 지치기 전에 먼저 술래를 잡는 것이었다. 이윽고 위와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마침내 벨로크는 습격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떨어지는 달빛을 뒤로한 채, 거대한 나무 위에 올라탄 녀석이 벨로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화살과 매끈한 가죽 갑옷, 그리고 유난히 길따란 귀가 쫑긋거렸다. 놈의 붉은 안광과 마주한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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