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준비
아주 오래전, 드높은 천상의 신들과 뿔 달린 괴물들 간에 전쟁이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영역 다툼이었다.
두 집단은 제각각의 추종자들을 이끈 채, 격렬히 싸웠다. 대지가 흔들리고 하늘이 내려앉을 정도의 규모였다. 무수히 많은 양의 피가 흐른 것은 당연했다.
결국, 전쟁은 신들이 승리했고, 괴물들과 놈들의 추종자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유폐 당했다.
신들의 편에 섰었던 인간들은 환호했다. 요정들도 미소를 지었다. 난쟁이들도 춤을 췄다. 마침내, 대륙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흘렀다. 뿔 달린 괴물들은 악마라고 불리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잊혀지기 시작했다.
그저 오래된 고서로만, 혹은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그런데 요 몇 달 사이. 이변이 일어났다. 막아두었던 지하의 문이 예고도 없이 열린 것이다.
악마들은 환호했다.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백 년 동안이나 나락에 처박혀있었다. 자연히 지상의 생물체들에게 어마어마한 적개심이 생길 수밖에. 그건 그들을 이끄는 다섯 우두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대악마라고 불리며, 가공할 권능을 휘두르는 괴물들. 이제는 벨로크가 상대해야 할 악귀들이기도 했다.
벨로크와 카라는 그들 나름의 상념에 빠져들었다. 마녀는 이 여정의 스케일이 점점 커져만 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고, 기사는 새롭게 생겨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궁리를 짜내는 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푸르르릉
이윽고 그 고민은 아델이 전투마들을 끌고 오자 끝났다. 두 마리가 아닌, 세 마리였다. 카라의 것까지 준비한 것이다.
안장도 두툼한 것이 여행에 필요한 야영 장비와 생필품까지 다 챙겨온 것 같았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이 고민을 벗어던지고 싶어서일까? 카라가 아델을 바라보며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종자 아가씨도 섬세한데?! 역시나 주인을 닮은 걸까?”
“도시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을 텐데··· 재주도 좋구나.”
카라와 같은 마음이었던 벨로크 또한 흐뭇하게 웃었다. 아델은 벨로크와 나란히 서 있는 카라를 슬쩍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정말 별것 아니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 사태로 인해 정신이 없었으니까. 하물며, 혼란을 수습해야 할 영주는 죽었으며, 병사와 기사들도 태반이 죽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인 잃은 말 한 마리를 더 챙기고, 잡화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쓸어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약탈이었다. 하지만 아델은 거리낄 게 없었다. 만약 주인과 카라가 없었다면 이 도시는 끝장났을 것이다.
악마에게 속은 영주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불태웠을 테고, 악마는 그것을 제물 삼아 저주를 더욱 강하게 내렸겠지.
그것을 방지했으니, 도시를 구한 영웅으로서 보상을 챙기는 건 당연했다.
“아무튼 수고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하루 이곳에서 쉬었다 가고 싶지만···”
아델을 치하한 벨로크가 카라를 바라보며 말을 흐렸다.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엉망일 것이다.
모진 고문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악마와 싸우고 주문 대결을 펼쳤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쉬기에 괜찮은 장소가 아니었다.
카라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웃으며 손사래 쳤다. 그 미소는 퍽 힘겨워 보였다.
“난 괜찮아. 연구실에서 나오기 전. 물약을 한 병 마셔서 그런가. 참을만한 정도야. 달빛을 벗 삼아. 모닥불에 구운 육포를 먹는 것도 나름대로 기대가 되는 걸?”
벨로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일단은 도시를 벗어나 야영을 하도록 하지. 자다가 칼을 맞는 것은 사양하고 싶으니까.”
세 사람은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대검의 육중한 무게에 벨로크를 태운 말이 비명을 질렀지만, 벨로크는 녀석을 어르고 달래며 달리게 했다. 말의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일행은 분명 악마를 죽이고 이 도시를 구했다. 동시에 이 땅의 영주와 주교를 살해하기도 했다. 놈의 정체가 실은 악마이며 영주는 놈에게 속은 지배자였다고 한들. 어쨌든 그들을 죽인 건 사실이다.
물론 주교와 같이 있던 병사들을 포함해서 악마와의 싸움을 목격한 몇몇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고를 증명해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미약한 양심에 기대어서 목숨을 맡길 수는 없었다.
‘어쩌면 친인척을 잃은 분노를 우리에게 풀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때때로 비이성적이다. 그렇기에 사람인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곱씹은 벨로크는 계속해서 달렸다.
히히히힝
쏟아지는 달빛 사이.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을 할수록 벨로크 일행은 도시 내부를 벗어나고 있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 죽은 구울을 끌어안은 채, 울고 있는 사람들.
양초가 놓인 창문 사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 등.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일행을 지나쳐 갔다.
일행의 모습은 도시를 구한 영웅의 행차가 아니라. 비겁자들의 일탈처럼 보였다.
로벤이나 오커 마을에서처럼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떠날 때와는 달랐다. 그런 상황이 마음에 안 든 걸까. 말 위에 있던 아델이 인상을 팍 썼다.
“지금 누구 때문에 목숨을 건진 건지 모르는 건가?”
카라는 아델의 마음을 이해했다. 동시에 가족과 터전을 잃은 시민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몸담았던, 이제는 망가져 버린 도시를 바라봤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을 많이 겪을 거야. 선행은 꼭 선행으로 보답받지 않아. 하물며··· 우리가 했던 방법이 최선이라고는 볼 수 없었을 테니까···”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닐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저주에 걸린 사람들도 치료를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마녀는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이를 들은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의 궁상이라. 퍽 낭만적이군. 이런 감정들도 그들이 살아남았기에 할 수 있는 사치였다.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혀를 씹지 않았다.
“결국은 모두 선택의 결과였을 뿐이다. 눈치 빠른 영주가 우리에게 창을 겨눈 것도, 그런 눈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악마에게 속아 넘어간 것도, 화형식이 일어나는 도시를 벗어날 용기가 없어 이곳에 머물던 저들도.”
내가 이 세계에 빠진 것 또한 선택의 결과일 뿐이지.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킨 벨로크가 입을 다물었다. 더는 떠들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이번에야말로 혀를 씹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설득성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결국은 그들이 선택한 삶이지. 만약 누군가가 일으키는 폭풍에 휘말려서 죽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역량이 거기까지였던 거야.”
아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 주인의 말은 항상 옳았으니까.
그저 뒤를 한 번 슥 돌아봤을 뿐이었다. 멀어지는 성문 안에는 시체들이 가득할 것이다.
‘쥐새끼들이 포식하겠군.’
벨로크의 인도하에 일행은 달밤 속에서 계속해서 달렸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카라의 도움이 컸다.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이 달빛과 어우러져 길을 밝혀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은 곧 중지되었다. 잔뜩 지친 벨로크의 말이 게거품을 물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결국 말에서 내려 야영 준비를 했다. 대로변 근처에 있는 넓은 공터였다.
벨로크와 아델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마른 장작들을 모아왔다. 아델이 부싯돌을 들고 불을 붙이려 하자 카라가 그것을 제지했다.
“잠깐, 너. 나를 뭐로 생각하는 거야?”
아델은 자신의 행동을 방해한 카라에게 미간을 찌푸렸다.
“가슴 큰 마녀?”
“흐음? 확실히 내가 너보다 좀 크긴 하지. 아니, 조금이 아닌가?”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얼굴을 와락 찌푸린 아델이 카라를 노려봤다. 그럼에도 마녀는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일행에 마법사가 생겼잖아? 나를 좀 이용해먹으란 얘기였어.”
카라가 손에 들린 지팡이를 장작더미에 내민 채, 짧게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불꽃이 치솟으며 모닥불이 생겨났다.
허옇게만 보이던 세 사람의 얼굴에 울긋불긋한 음영이 더해졌다.
“마법이란 참 편리하군.”
인간 버너 탄생인가? 이제 불 피울 고생은 안 해도 되겠는데. 배낭을 뒤적거려서 냄비와 식료품을 꺼내던 벨로크가 감탄했다. 마녀는 슬쩍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꼭 전투만이 마법의 전부는 아니야. 일상생활에서도 폭넓게 사용이 가능해.”
주인이 마녀에게 관심을 보이자. 아델의 얼굴은 더더욱 안 좋아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아델은 모닥불에 끊인 스튜를 마녀에게 아주 조금만 덜어주었다. 건더기는 없고, 허여멀건 한 국물만 가득하게.
“이것밖에 안 준다고? 저기··· 난 환자인데?”
그릇을 쥐고 있는 카라가 울상을 짓자. 아델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먼저 나를 모욕했지 않나.”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
“말로써 사람을 죽인다는 얘기 못 들어봤나?”
“가슴 좀 작다고 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니?”
“이··· 마녀가!”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꼴을 보는 건 꽤나 재밌었다. 하지만, 카라의 말대로 그녀는 환자였다. 충분한 영양 섭취가 필요한 것이다. 벨로크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아델. 먹는 거로 그러는 것은 조금 아니지 않나?”
“죄송합니다.”
벨로크의 말에 아델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그릇이 넘쳐날 만큼 스튜를 담아서 카라에게 주었다.
“교회에서부터 짐작은 갔는데. 진짜··· 정성이네.”
카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스튜를 떠먹었다.
밤이 깊어지는 만큼, 모닥불도 타닥거렸다. 불빛에 이끌린 벌레들이 그 속으로 돌진하기도 했다. 부엉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풀벌레, 바람에 휘날리는 수풀 등 다양한 소리들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은 일행은 쉴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물론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카라였다. 꽤나 새침하게 생긴 얼굴과는 반대로 그녀는 말이 많았다. 머리칼만큼이나 새빨간 입술이 연신 오물거렸다.
마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어떤 마을의 호박파이가 정말 맛있다든지, 왕국의 남쪽 끝자락에 존재한다는 요정들의 도시가 굉장히 아름답다든지 하는 말이었다.
마법사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건가? 라고 벨로크와 아델이 생각할 즈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대악마를 잡으러 가는 거지?”
카라의 목소리 톤이 조금 낮아졌다. 벨로크는 이 이야기가 그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본론이었음을 깨달았다.
말을 하면서 긴장을 푸는 스타일인가? 벨로크가 아델을 바라봤다. 둘이 비슷한 점이 있었다. 다시 시선을 돌린 벨로크가 말했다.
“그래, 아스타로트. 놈을 잡으러 갈 생각이다. 왜? 두렵나?”
카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일렁이는 불빛 때문인지. 얼굴은 퍽 심란해 보였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괴물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놈의 수하라는 악마도 실존했으니 녀석도 실존하는 괴물일 것이다. 카라가 머리카락을 베베 꼬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델이 물었다. 말들을 데려온다고 여신의 계시를 못 보았기 때문이다.
“저희는 지금 대악마를 잡으러 가는 거였습니까?”
벨로크는 종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두려우냐?”
아델은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괴물들의 피딱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어디를 가시든 따라갈 뿐입니다. 그리고 더는··· 겁먹지 않을 겁니다.”
주먹을 꾹 움켜쥔 아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어쩐지 안광에서 붉은빛의 기운이 타오르는 듯했다. 여신의 성력일지도 몰랐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아델은 이제 성기사였다.
'앞으로 악마를 상대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
벨로크는 품속에 넣어놨던 여신의 선물을 원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여신이 남긴 물건이다.”
아델이 책을 펼쳤다. 이윽고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여신을 찬양하는 말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기사의 교양서적보다 더 보기가 힘들었다.
“꼭 읽어야 합니까?”
설마하니 여신이 쓸모없는 걸 던져줬을까? 벨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외움으로써 너는 더 강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벨로크님에게도 더 도움이 되겠군요?”
“그렇지.”
“맡겨주십시오.”
아델은 곧바로 책을 펼쳐 들고는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혹여 놓치는 부분은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여신을 위해서가 아닌, 주인을 위해서 신앙심과 교리를 채우는 것이다.
정말이지. 충성스러운 종자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카라가 벨로크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한 게 있어.”
카라가 배낭을 뒤적거리려 하자. 벨로크는 알겠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갈드라보크 말인가?”
두터운 책 한 권을 꺼내든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대단한 마법책이라고 말한 이거. 지금이라면 얘기를 듣기에 딱 좋을 때야. 어떻게 봉인을 푸는지 알 수 있을까? 대악마를 죽이러 가는 여정이라면 무슨 힘이든 필요할 테니까.”
벨로크는 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기 위함이다. 모니터 너머에서 관조하던 텍스트로 이루어진 공략집들. 자신의 달라진 행보와 악마들로 인해 이미 미래는 바뀌었지만, 장소마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가 좀 까다롭긴 했지.'
생각을 마친 벨로크가 툭 내뱉었다.
“흐르는 숲.”
“응?”
“우리는 흐르는 숲으로 간다. 그곳에 간다면 그 책의 봉인을 풀 수 있다. 덤으로 대악마를 잡는데 필요한 유물들도 얻을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