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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34화 (3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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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흉

아델이 빛의 구를 받아들였을 때. 그녀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것에는 몸속을 뒤흔드는 성력에 의한 것도 있었지만, 어떠한 초월적인 존재의 부름 때문이기도 했다.

촌부의 딸로 태어나 비참한 노예로 팔려 갔으며, 이윽고 영광스러운 기사의 종자가 된 여인. 아델은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타오르는 듯한 주황색의 눈이었다. 악마의 끈적한 시선과는 다른, 맑고 신비로운 눈동자였다.

눈동자의 주인이 아델을 내려다보았다.

평범한 인간을 난쟁이로 만들어버릴 만큼. 거대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얇은 베일이 처진 침대에 누운 채, 시종일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씩 입가를 가리며 슬쩍 웃기도 했다.

“···”

아델은 입을 열려고 했다.

대체 여기는 어디냐?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거냐? 하지만 아델의 음성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공허하게 맴돌았다.

이유는 몰랐다. 어쩌면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이 기묘한 압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신비로움을 넘어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여인의 기세 때문일지도 몰랐다.

옴짝달싹 못 하며 말도 못 하는 상황에서 아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머리를 굴리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이 요상한 장소로 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하멜른을 물들이던 악마의 퇴치, 정화된 교회와 여신상, 쏘아진 빛의 구.

간단하게 퍼즐이 맞춰졌다. 여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아델이 눈을 크게 떴다.

‘여신 헬···’

아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이 싱긋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눈앞의 광경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세상이 반전되었다.

아델은 자신의 감각이나 인지 범위를 넘어선 공간의 뒤틀림을 경험했다. 속이 미친 듯이 더부룩했으며. 눈앞에서는 오만가지의 색과 함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쿠웅

아델은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거대한 태양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컸으며 뜨거웠다.

아델은 울고 싶었다. 욕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울면서 욕했다.

“시발. 이게 대체 무슨 상황···”

아델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태양에 집어 삼켜졌다. 영혼까지 타버리는 듯한 열기와 함께 여기사는 또 한 번 정신을 잃었다.

성력을 받아들이고, 각성하기까지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벨로크와 카라의 입장에서는 빛이 몇 번 반짝이자 아델이 깨어난 것이다.

아델은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다. 고양이 같은 눈매가 쭉 치켜떠지며 주위를 살폈다.

“아델. 괜찮나?”

“괜찮아?! 혹시. 신을 만나고 온 거야?”

검은 눈동자가 걱정을 가득 담은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녀의 갈색 눈도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나오는 빛이 주위를 밝히고 있는 것은 덤이었다.

아델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슬쩍 감았다가 뜨거나,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아직까지 멍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자신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손이 느껴졌다. 바위같이 딱딱했으며, 퍽 익숙한 감각이었다.

“아···”

아델이 입을 헤 벌렸다가 황급히 벨로크의 품에서 벗어났다. 잠시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은 그녀가 다짜고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벨로크 님. 부디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쓰러졌던 부하가 눈을 뜨자마자 사과부터 한다.

“뭐가 말이냐?”

벨로크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고, 마법사가 얼추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설마··· 여신의 성력을 네가 대신 흡수해서 그런 거야?”

입술을 꾸욱 씹은 아델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몸 안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꿈속에서 여신을 만났을 때. 느꼈던 그 힘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이건 틀림없이 성력이다.

아델은 벨로크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흐음··· 확실히.”

카라도 침음성을 흘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벨로크가 가지고 있는 은총 덕분에 헬레나의 힘이 튕겨 나간 것이지만, 벨로크의 입장에서 보자면 힘을 뺏긴 것은 사실이니까.

하물며 둘의 관계도 동료가 아닌, 종자와 주인 사이. 거기다가 저 반응으로 봐서는 둘 사이에 엄격한 규율이···

카라의 걱정과는 달리 벨로크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대체 무슨 소리냐. 아델···”

“응?”

“그게··· 제가 벨로크 님에게 가야 했을 힘을 뺏은···”

벨로크는 우물거리는 아델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몸을 살폈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떨리는 눈을 마주하거나 팔다리를 확인하기도 했다. 음. 멀쩡해 보이는군. 벨로크가 말했다.

“애초에 나하고는 안 맞는 힘이었다. 튕겨 나왔지 않나? 그걸 네가 받아들였으면 잘 된 것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

벨로크의 한숨 소리가 더 깊어졌다.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종자도 좋았지만, 그녀의 딱딱한 행동은 한 번씩 거리감을 느끼게 할 때가 있었다.

요 몇 달 여행을 하면서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군. 이걸 좀 바꿀 수는 없나?

기사와 종자 사이를 그만둬야 하나? 생각을 마친 벨로크가 아델에게 말했다.

“아델.”

“네.”

“대체 너는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네? 그야. 이 시대의 진정한 기사이자 정녕 위대하신 나의 주인. 벨로크 하이네 님입니다.”

아까전과는 달리 우렁찬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벨로크는 오글거림을 참은 채,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의 생각에서 나는 그런 사람이지. 그러면 반대로 묻자. 네가 생각하는 위대한 기사인 내가 고작 신의 성력 따위를 동료에게 뺏겼다고 화를 낼 사람으로 보이나?”

“동료··· 아, 아닙니다!”

잠깐 벨로크의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린 아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아델. 애초에 나는 필요 없는 힘이었다. 나는 신의 성력 따위 없어도 이미 강하니까.”

“그렇··· 그렇군요! 정녕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고대신의 은총은 성력이 아닌 거야? 하며 뒤에서 중얼거리는 카라는 무시한 채, 벨로크는 열심히 아델을 달랬다.

애초에 주인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과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기에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아델은 곧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서는 마구간에 맡겨두었던 전투마들을 가져오겠다며 달려 나갔다.

폐허가 된 교회에는 이제 도적기사 한 명과 붉은 머리 마녀만이 남아있었다.

“어째 주인과 종자 사이가 아니라. 애 한 명을 돌보는 것 같은데?”

카라가 좋은 구경을 했다는 듯 비죽 웃었다. 마녀의 얼굴은 지팡이에서 나오는 하얀빛과 맞물려서 귀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벨로크는 코웃음을 쳤다.

“놀리는 건가?”

“아니, 전혀. 솔직히 감탄했어. 나는 처음에 네가 아델의 목을 칠거라고 생각했거든.”

“끔찍한 소리.”

상상조차 하기 싫었는지 벨로크가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마녀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들어봐. 친절한 기사님.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종자를 그렇게 아끼지 않아.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으로 생각할 뿐이지.”

카라는 쩔쩔매던 벨로크의 표정과 침울한 표정의 아델. 이윽고 점점 기세가 살아나서 환하게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몸담게 될 일행의 됨됨이를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으니까.

‘적어도 따라나섰다가 버림받을 염려는 없겠는데?’

안심한 마녀가 로브에 묻었던 재들을 톡톡 털고 있을 때였다. 여신상에서 또다시 빛이 반짝였다. 벨로크는 또 저거냐? 하는 표정을 지었고, 마녀는 다시금 눈을 빛냈다.

“가보자. 어쩌면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카라가 벨로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재촉했다. 벨로크는 이 마녀가 갑자기 왜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지 몰랐지만, 일단은 움직였다.

과연 카라의 말대로 무언가가 있었다.

빛으로 쓴 듯 반짝이는 글귀와 문양, 요상한 책 한 권이었다. 글귀는 휘날리는 재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벨로크는 책부터 주워들어서 살폈다.

태양신에 대한 교리와 찬양 일색의 말들이 가득했다. 기도문이었다.

새롭게 탄생한 성기사를 위해 준비해준 건가? 친절한데. 피식 웃은 벨로크의 시선이 다시 바닥으로 향할 때. 이미 손바닥으로 재를 털어서 글귀를 확인하고 있던 카라가 입을 열었다.

“이방인이여. 그곳에 길이 있으라.”

“···

벨로크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준 파급 때문이다.

보통은 타지나 다른 나라에서 온 외지인을 이방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단어를 꺼낸 존재는 신이었다.

이곳 아드리아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신.

그런 신이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답은 나왔다. 헬레나라는 여신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리고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벨로크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전투를 앞둔 흥분과는 궤를 달리하는 심정이었다.

고향 땅에 대한 강렬한 향수가 그를 자극했다. 벨로크가 고민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카라의 말은 계속되었다.

“일종의 계시 같아··· 그리고 옆에 있는 이 문양. 어디서 많이 봤는데.”

마법사의 호기심을 자극한 걸까. 카라는 급기야 매고 온 가방까지 뒤적거리더니, 오래된 고문서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페이지의 일부분을 짚어낸 카라가 벨로크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봐. 벨로크.”

모처럼 찾아낸 집으로 돌아갈 단서였다. 벨로크 또한 눈을 크게 뜨며 페이지를 살폈다. 지팡이에서 뻗어 나오는 하얀 빛 사이로 고서에 그려져 있는 흉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괴하게 부풀린 살덩이에 여러 개의 뿔이 달린 괴물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악마라지만, 이건 좀 심하게 생겼는데··· 벨로크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하자 카라가 황급히 다른 부분을 집었다.

“삽화는 신경 쓰지 마. 만담꾼들의 상상력이 모여서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니까. 주목해야 할 건 문양과 놈의 이름이야.”

카라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교회의 바닥에 그려져 있는 문양과 똑같은 문양이 책에 적혀있었다. 벨로크가 글귀를 읽어 내리기도 전에 성질 급한 카라가 말을 꺼냈다.

“아스타로트. 대악마야.”

아스타로트? 그러고 보니 뱀머리 악마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벨로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악마?”

“그래. 혹시 교회에서 금한 칠대 죄악은 알고 있어?”

“분노, 나태, 교만 이런 것 말인가?”

벨로크가 띄엄띄엄 단어를 말했음에도 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확히는 그런 감정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들로 인해 일어나는 죄를 따지는···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아무튼 대악마들에게는 각각의 원죄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녀.”

“그렇다면 이놈도...”

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녀의 낯빛이 조금 더 창백해져 있었다.

“맞아. 아스타로트는 타락을 상징하는 대악마야. 이 책 내용에 따르면 제아무리 신실한 기사나 사제라고 해도 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고 해.”

카라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더럽게 위험한 일에 휘말린 것 같은데··· 머리카락을 헝크린 카라가 벨로크에게 말했다.

“아까 계시를 봤을 때. 너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봤어. 이방인이니, 길이 있다느니 하는 말들. 거기다가 여신은 대악마의 문양을 떡하니 띄워놨지···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까?”

카라는 벨로크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다. 다만,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행보로 볼 때. 앞으로 어떤 적들을 상대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다.

카라의 우려에 벨로크는 피식 웃었다.

“그렇군. 그랬던 거였나.”

이게 전부 다 내 잘못이라고? 업보라 이건가? 따지고 보면 나도 피해자인데. 너무 한 거 아냐?

슬쩍 웃던 벨로크가 표정을 굳히며 여신상을 노려봤다. 여신은 이제 빛을 뿜어내지 않았다. 그저 감정이 없는 돌덩이답게 차갑게 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벨로크는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지만, 그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겪었다. 그래서 희미하게도 느껴지는 기억이었다.

그가 이 땅에 떨어지기 전. 모니터 너머에서 행했던 짓거리들. 평범했던 게임의 난이도를 높이고, 불지옥 모드를 선택해서 새로운 종족들을 추가한 것.

“다섯 대악마와 그 추종자들. 그리고 정의를 바로 세워라···”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낮은 목소리라 듣지 못한 카라가 되물었다.

“뭐라고 했어?”

“자잘한 놈들이 아니라 우두머리를 죽여야 하는 거였군.”

벨로크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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