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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33화 (33/222)

33

원흉

아델은 바닥에 쓰러진 채,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구울을 방패로 밀어내고 있었다.

회색빛 쇳덩이 너머로 악귀의 끔찍한 모습이 여과 없이 보였다. 초점도 없이 먼지만 쌓인 하얀 동공이라던가. 녹아내리고 있는 피부 등이었다.

“캬아아악!”

딱딱

방패를 든 손아귀의 힘이 빠져나갈수록 구울의 이빨이 점점 가까워졌다. 찢어져라 벌려져 있는 놈의 입에서 더운 숨결과 함께 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우욱. 속이 올라올 뻔한 걸 겨우 참아낸 아델이 오른손에 들린 곡도를 찔러 넣었다.

“끄르르륵.”

배를 찔린 구울이 썩은 피를 푸학 토했다.

“시발.”

핏물을 얼굴에 그대로 맞은 아델이 욕설을 내뱉으며 구울을 퍽 걷어찼다. 이윽고 재빨리 일어나 벌레처럼 버둥대는 구울의 목을 베었다.

입을 오물거려 침을 퉤 뱉은 아델이 시선을 돌렸다. 철창 밖에서는 주인이 백 단위가 넘어가는 구울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종자로서 당장에 나가서 한 팔 거들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카라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아델은 바보가 아니었다. 카라가 당하는 순간. 자신들은 끝이었다. 같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 주문을 막아낼 수는 없었으니까.

아델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마녀와 악마는 여전히 입술을 중얼거리며 자기들끼리 싸워대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카라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으며, 눈의 광채도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반면에 악마의 눈동자는 시간이 갈수록 진해지고 있었다. 태도도 여유로워 보였다.

‘안 좋은데···’

생각은 이어질 수가 없었다.

“끼이이익.”

철창을 넘어 구울 한 놈이 또다시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아델은 떨리는 팔에 힘을 바짝 주고는 구울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아악

날카로운 곡도가 휘둘러졌다. 상반신을 길게 잘린 구울이 흙으로 돌아갔다.

“하아, 하아.”

아델이 무릎을 굽히며 숨을 몰아쉬던 순간.

후우웅

어마어마한 바람이 불었다. 벨로크 쪽이었다. 아델의 고개가 다시 철창 너머로 돌아갔다. 그녀의 입이 헤 벌려졌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쉭쉭 번뜩이더니 허공에 피분수가 솟구쳤다. 시체가 후두둑 떨어졌다.

아델이 눈을 비볐다. 그 많던 구울이 전멸해있었다. 괴성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마을을 뒤덮었던 지하의 괴물들이 전사의 칼끝에 다 쓰러진 것이다. 이를 해낸 검은 머리의 기사. 벨로크가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갑옷도 검도 온통 피에 물들어 검은색이었다.

“합.”

경박하게 벌린 입을 꾹 다문 아델이 몸가짐을 바로 하며 달려 나갔다.

주인은 점점 더 인간의 탈을 벗어나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정녕 신의 은총이란 말인가? 자신도 그 힘을 받으면 주인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아델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상념을 담아서 물었다.

“벨로크 님. 방금 그건 대체···”

“일종의 각성상태였던 것 같다.”

벨로크는 약간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각성상태요?”

“내 칼은 빨라지는데. 적들은 느려지더군.”

“저도 배울 수 있을··· 참, 마법사가 위험합니다!”

아델이 눈을 빛내다 말고 다급히 소리쳤다. 벨로크의 시선이 카라를 향했다.

카라는 이제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발악하듯 소리 지르고 있었다. 악마는 입가의 미소가 더 짙어져 있었다.

주문 대결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지. 저주 구울들이 다 죽었으며 벨로크가 온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시간이 없군.’

이대로 가다가는 겨우 구해낸 마법사가 다시 죽을 판이다. 벨로크는 검을 들었다.

“일단 저놈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군.”

“하지만, 마녀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놈은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존재라고···”

아델의 우려에 벨로크는 연기처럼 흐릿한 해골 악마를 바라보았다.

교회의 불도 거의 다 꺼져가고 있었기에. 놈의 모습은 이제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붉은 눈동자로만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독 구린 상황에서만 놈들과 싸우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짧은 상념을 끊은 벨로크가 말했다.

“휘둘러보기 전에는 모르지.”

“그런···”

“아델. 그런 말이 있다.”

“네?”

“누구나 다 그럴듯한 계획이 있지. 맞기 전까지는.”

벨로크는 아까 전부터 이상한 기운을 뿜어내는 자신의 검을 슬쩍 보았다. 그리고 트롤과 뱀 악마를 벴을 때의 강격과 방금 전 구울들을 상대할 때 느꼈던 감각을 떠올렸다.

이 세 가지를 합친다면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을까? 저놈도 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이는 감일 뿐이었다. 하지만 끔찍한 악마를 둘이나 퇴치한 영웅적인 기사의 감이기도 했다.

꾸우욱

벨로크는 쥐고 있는 대검에 모든 힘을 집중했다. 어마어마한 괴력에 그의 신체가 크게 부풀어 올랐고, 손목을 타고 흐른 힘에 거대한 칼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윽고 깊게 심호흡을 한 벨로크가 땅을 박찼다.

거센 흙먼지가 일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교회의 철창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해골 악마는 허공에 있었다. 벨로크는 철창을 발판삼아 뛴 후, 놈을 베어낼 생각이었다. 강철 그리브가 철창을 걷어찼다. 굉음과 함께 철창이 무너지고 벨로크는 하늘로 치솟았다.

주인의 기행을 본 아델이 눈을 크게 떴고, 악마의 주문을 버티다 못한 카라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귀찮은 년. 이제 끝을··· 응?]

요란한 퍼포먼스 덕분일까. 해골 악마의 시선이 허공에 떠오른 벨로크에게로 향했다.

[뭐냐? 네놈이 대체 왜 여기에? 구울들은?]

해골 악마는 대로를 바라봤다. 시체의 산이 보였다. 단신으로 저걸 다 죽였다고? 아니, 일단은 놈이 왜 떠오른 거지?

해골 악마의 눈이 벨로크의 손에 들린 검으로 향했다. 놈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내려찍기였다. 악마는 일순 당황했다.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쇠붙이로 나를 베려고? 신성하나 느껴지지 않는 저 검으로? 이윽고 생각을 마친 악마의 몸체가 흔들렸다. 녀석이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경련했다.

[푸하하하. 굴 좀 잡았다고, 뇌가 비어버린 거냐? 성기사도 아닌 놈이 그냥 쇳덩이를 들고 나를 베겠다고? 이 미혹과 타락의 손아귀. 카락서스를?]

악마의 비웃음에도 벨로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을 부릅뜨며 아까 전의 감각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느려지던 때의 그 감각. 그러자. 그의 의지대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악마에게 쏘아지던 자신의 육체도 양팔을 벌린 채, 웃고 있던 악마의 모습도 느려졌다. 놈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내 검이 닿을 곳까지 왔다.

지근거리에서 악마를 마주하자. 검이 부들거림이 심해졌다. 그건 괴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곧 있으면 맛보게 될 악마의 피를 기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순간. 벨로크는 알 수 있었다. 레벨업의 시간이었다.

검을 들어 올린 벨로크가 짧게 읊조렸다.

“잘 가라.”

벨로크는 검을 휘둘렀고,

[그래. 어디 재롱을···꺽]

악마는 폭발했다.

콰아앙

녀석이 죽자 굉음과 함께 일대에 충격파가 퍼졌다. 허공에 있던 벨로크는 검을 쥔 상태 그대로 다 타버린 교회에 처박혔다.

시꺼먼 재가 풀썩 솟았고, 잔뜩 달아오른 벽돌이나 타다만 목재들이 벨로크의 몸을 휘감았다. 판금 갑옷의 철판이 달아오르며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이런.”

짧은 욕설과 함께 몸을 일으킨 벨로크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새하얀 빛이 반짝였다. 벨로크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쪽 팔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이내 팔을 슬쩍 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상했다. 틀림없이 안구를 강타하는 빛이건만 어째선지 눈이 부시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쬐자. 몸 안의 피로가 풀리며 상처들이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열기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리둥절해진 벨로크가 주위를 살폈다. 빛은 뒤편에 있던 여신상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법이 작렬하고 교회 전체가 불타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돌로 된 여신상은 멀쩡했다. 오히려 악마가 없어지자. 때라도 벗겨낸 듯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진짜 기적을 마주해서 그런가? 벨로크는 한동안 가만히 서서 여신상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하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에 뒤에서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로크 님! 괜찮으십니까?”

“벨로크! 괜찮아?!”

벨로크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정신을 차린 카라와 아델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도 빛을 뿜어내고 있는 여신상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또 무슨···”

카라는 여신상의 생김새를 보고는 알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태양의 여신. 헬레나의 신상이야. 그리고 이 빛은··· 성력임이 틀림없어.”

“여신?!”

신기해하는 아델과는 달리 마법사인 카라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빛의 범위에서 슬쩍 물러났다. 카라가 무언가를 아는 것 같자. 벨로크가 그녀에게 물었다.

“보통 여신상이 이렇게 빛을 뿜어내나?”

여신상의 빛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폐허가 된 교회를 넘어서서 이 도시 전체를 밝힐 기세였다. 카라는 음 하며 머리칼을 헤집다가 이내 입술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이 도시의 악마를 몰아내고 교회를 정화한 기사에게 기적을 내리려는 것 같아.”

화아아악

카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신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점점 응축되며 한 덩어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빛으로 된 공을 보는 것 같았다. 이윽고 허공에 떠 있던 빛의 구가 벨로크에게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전 회차나 전전 회차에서도 교회랑 친했던 적이 없었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 늘상 전쟁을 일으키던 전쟁기사였으니까. 그에게 교회란 사람 좀 죽이고 높아진 카르마 수치를 줄이기 위해 한 번씩 헌금을 내러 가는 곳일 뿐이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벨로크의 걱정스런 물음에 카라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는 태양을 주관하는 정의의 여신이야. 내 생각에 저 구를 흡수하기만 하면 너는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성기사가 될 거야.”

교리나 신앙심이라고는 1도 모르는 사람이 여신으로부터 직접 축복을 받아 기적을 다루는 성기사가 된다? 교회의 인원들이 알았다면 피를 토할 만큼 놀라운 광경이었다.

카라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저 사내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성력도 없으면서 쇳덩이 하나로 영체 타입의 악마를 때려잡지 않았는가?

악마가 죽는 광경을 눈앞에서 봤을 때. 카라는 자신이 알던 상식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과연 저 괴물 같은 사내가 성력을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

‘책에 저술될 만큼의 역사적인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군.’

카라의 갈색 눈이 반짝거렸다. 이윽고 두 눈은 보기 좋게 구겨졌다. 빛의 구가 벨로크의 몸에 닿기 무섭게 튕겨 나간 것이다. 어째선지 여신상도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몸을 통통치는 반동에 벨로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빛의 구를 가리켰다.

“이거 왜 이래?”

카라도 당황스럽다는 듯이 말을 하다가 손바닥을 탁 쳤다.

“이상한데? 벨로크 너 혹시 신성을··· 아! 너. 분명 은총을 받았다고 했잖아! 고대신으로부터!”

“그건 그냥 해본···”

벨로크의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수십 번이나 그의 몸으로 파고들려다 튕겨나간 빛의 구가 돌연 옆에 있던 아델에게로 향했기 때문이다.

아델이 검은 눈동자를 크게 치켜떴다. 이윽고 빛의 구가 그녀의 가슴으로 쏙 파고들었다. 몸속을 뒤흔드는 성력에 아델이 여성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꺅.”

“아델!”

황급히 달려온 벨로크가 아델을 떠받쳤다. 카라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벨로크의 품에 안긴 아델이 눈가를 찌푸리면서 힘겹게 중얼거렸다.

“벨로크 님··· 뜨겁습니다.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은···”

이윽고 아델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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