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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32화 (32/222)

32

원흉

날아오는 검에도 루즈백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얼핏 본다면 겁에 질려 몸이 굳은 노인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음흉한 노인네의 눈빛에서 한 가지 기색을 읽었다.

여유였다.

루즈백이 씨익 웃음과 동시에 입술을 웅얼거렸다. 그 잠깐 사이 반투명한 역장이 생기며 벨로크의 검을 막아냈다.

아니, 막아낸 것처럼 보였다. 검과 부딪친 역장이 파지지직 소리를 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으니까.

루즈백이 당황했다.

“이게 무슨···”

벨로크는 씨익 웃으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도살자가 부들부들 떨릴수록 검은색의 역장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가 네놈의 동족들을 어떻게 죽였을 것 같나?”

“뭐라? 그렇다면 네놈이 설마···”

루즈백의 양 눈이 부릅떠지던 순간.

콰장창

역장이 깨지며 벨로크의 대검이 루즈백의 몸을 갈랐다. 흰색 법복이 피로 물들었고, 쓰고 있던 모자가 하늘을 날았다.

하멜른을 공포로 물들이던 마녀사냥의 주역치고는 초라한 죽음이었다.

“흐아아악!”

“영주님에 이어서 사제님까지! 대체 어디까지 죄를 지을 참이오!”

병사들이 기겁하든 말든, 벨로크는 검에 묻은 피를 슥 털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뒤에서도 말소리가 들려왔다.

“보호막 주문을 칼 하나로 깨버린다고? 그것도 유물이나 성물도 아닌, 쇳덩이로?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데.”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한 걸까. 혀를 내두른 카라가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델은 달랐다. 벨로크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살핀 그녀는 오커영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벨로크 님. 설마···”

아델이 말끝을 흐리자. 벨로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쇠를 긁는듯한 기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군. 바호메트랑 보티스 놈도 이렇게 죽였나?]

“시··· 시발. 저게 뭐야. 루즈백 님?”

병사들의 낯빛은 이제 창백을 넘어 허옇게 뜬 수준이었다. 몸이 반으로 갈라진 루즈백이 토막 난 혀와 이빨을 움직여서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잘린 성대는 둘째 치고 죽은 자가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병사들은 몰랐다. 악마들은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즉. 놈은 지금 장난을 치고 있는 거였다. 이를 알고 있던 벨로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들린 검을 휘둘러서 반토막난 루즈백의 시신을 잘게 다졌다. 죽었나?

하지만 목소리는 킬킬 웃었다.

[고위 사제의 육체는 꽤나 쓸만한 그릇이었는데. 게다가 마녀도 탈출시켰다더니. 사실이었군. 모두 다 네놈이 벌인 짓이렷다. 이 비루한 기사놈아.]

조각난 루즈백의 시신에서 검은색의 연기가 빠져나오더니 뭉클거렸다. 이를 본 카라가 외쳤다.

“맙소사. 저게 놈의 본체였어! 영체 계열이야! 벨로크. 일단 물러나!”

신비와 미신에 관해서라면 마법사의 견해를 따라올 수가 없다.

카라의 조언을 들은 벨로크는 대번에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꾸물거리던 연기가 점점 형체를 갖추더니, 이윽고 거대한 악귀의 형상을 갖추었다.

램프의 요정이 뼈만 남아서 이를 드러내면 저렇게 생겼을까? 뻥 뚫린 눈에서 시뻘건 안광을 뿜어내는 해골을 본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귀신?”

자리에 주저앉아있던 병사들은 말하는 시체와 더불어 허공에 떠 있는 악마를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결국 도시 외곽에 자리한 교회 앞에서는 괴력의 기사 하나와 충성스러운 종자 하나, 요상한 주문쟁이 한 명에 형체도 없는 악마 가 기묘한 대치를 이루었다.

[고지가 코앞이었는데. 이딴 방해 짓이라니.]

짜증난다는 듯 해골 악마가 벨로크 일행을 노려보았다. 말을 할 때마다 검은색의 연기가 놈의 입에서 뿜어 나왔다. 꼬랑지만 남아있는 하반신을 살랑살랑 흔들기도 했다. 악마가 말을 걸든 말든 벨로크는 카라에게 물었다.

“놈이 영체라고 했지. 저걸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카라는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까 전 수십의 구울을 상대했을 때보다 얼굴이 더 안 좋았다.

“보통 기생형 악마는 녀석이 숙주로 삼은 그릇을 깨트린다면 끝이야. 하지만 영체형은 남달라. 더 까다롭다고 보면 돼.”

“짧게.”

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성유물이나 빛의 힘을 다룰 줄 아는 성기사가 있어야 놈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야. 내 마법으로도 가능은 하겠지만···”

“하겠지만?”

“녀석은 물리적인 공격에 면역이야. 아마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나를 집중적으로 노릴 가능성이 커.”

카라의 말은 현재 저 악마를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 벨로크와 아델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해골 악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욕심 많던 주교를 시작으로 이 도시의 성직자라는 족속들은 모조리 타락시켰다. 달랑 칼잡이 둘과 주문쟁이 하나로 뭘 할 수 있을까 모르겠군.]

해골 악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이윽고 놈이 양팔을 흔들며 괴성을 질렀다.

[준비는 덜 되었다만··· 축제의 시작이다!]

해골 악마의 눈에서 요사스러운 붉은 빛이 쏟아졌다. 옆에서 타오르고 있는 교회의 불길에 견줄 정도였다. 이윽고 악마는 흐릿한 입을 나불거리며 뭐라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대단히 빨라서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음산하며 기이한 기운을 풍겨댔다. 귓가가 웅웅 울리며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카라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저주의 주문이야! 모두들 내 옆으로!”

벨로크와 아델이 옆으로 붙자. 카라가 지팡이를 바닥에 꽂고는 악마의 주문에 대항하듯 입술을 중얼거렸다. 곧이어 그녀의 눈에서도 광채가 반짝이며, 일행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역장이 생겨났다.

파지지직

스파크를 뿜은 역장이 불길한 주문을 튕겨냈다. 그제야 세 사람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델이 아직도 귓가가 울리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하아, 하아. 이건···”

“영체형의 악마답게 빙의하기 전까지 놈에게 육체적인 능력은 없어. 하지만 주문은 사용할 수 있지. 아마도 저주나 현혹이 주특기 같아.”

“그러고 보니 이 도시에는 병자가 많았지.”

벨로크의 말뜻을 알아들은 카라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그래, 구울화의 저주에 걸린 시민들이 넘쳐났지. 아마도 저 주문은 기폭제야. 사람들을 불태웠던 건 저주의 효력을 강하게 하기위한 제물이었겠지.”

“그 말뜻은···”

아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카라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목숨을 구함 받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벌집을 건드린 기분이었다. 악마는 내버려 둔 채, 그냥 도망치자고 할 걸 그랬나.

“우리는 이제 사악한 주문을 부리는 악마랑 구울이 된 하멜른의 시민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거지.”

카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도시 곳곳에서 비명과 괴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괴물이 되어버린 시민들이 도처에서 날뛰고 있는 것이다. 하늘 위에 붕붕 뜬 채, 이 사태를 여유롭게 관망하던 해골 악마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썩어빠진 자들아. 이리로 오너라. 와서 네 주인을 도와라!]

악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면이 두두두두 울렸다. 헐떡거리는 듯한 괴성 소리도 점점 가까워져 갔다. 이윽고 카라와 아델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교회의 창살 너머로 백 단위는 넘어 보이는 구울들이 아귀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해골 악마가 광소를 터트렸다.

[클클클. 시간과 제물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일거에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텐데. 뭐, 일단 네놈들을 처리하고 차근차근 짓밟아 주면 되겠지.]

벨로크가 마녀를 불렀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카라.”

“응? 지금이라도 도망치자고? 하지만··· 저놈이 우리를 놓아줄까?”

카라는 자신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놈들이 보내줄 생각도 안 하겠지만, 이쪽도 도망칠 생각은 없다.

경험치 덩어리들이 알아서 오고 있는데. 어디를 간단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저 녀석이지. 설마하니 날붙이가 안 통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벨로크가 해골 악마를 턱짓했다.

“저 연기 같은 놈. 맡을 수 있나?”

“설마··· 싸울 셈이야?”

“맡을 수 있냐고 물었다.”

“···어떻게든 붙잡아 둘 수는 있어. 악마라고는 해도 놈도 주문술사고, 나도 마법사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안 될 텐데.”

당장에 눈앞에서 달려드는 구울떼부터가 문제였다. 악마하고의 주문 대결은 고사하고, 놈들의 손발톱에 갈기갈기 찢겨나갈 판국이었으니까.

“그렇군. 그러면 일단 저것들부터 정리하고 돌아오지.”

고개를 끄덕인 벨로크는 검을 뽑아 들었다. 피에 물든 대검이 이제는 완연한 흑색으로 번들거렸다. 어째선지 기이한 기운도 뿜어내는 듯했다.

‘뭐지. 뭔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벨로크가 한 마디 덧붙였다.

“아델.”

“네.”

“카라를 지켜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마녀의 보모 노릇을 하게 된 아델이 검과 방패를 들었다. 불평할 수는 없었다.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으니까.

벨로크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폭발적인 각력에 힘입어 철창을 넘어 구울들이 몰려오는 대로변으로 쭉 뻗어 나갔다.

[미친건가? 아니면 기사로서의 오만함인가?]

해골 악마가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한쪽 손을 뻗었다. 주문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그 순간.

파지지직

[끄아아악! 이 빌어먹을 년이!]

카라의 벼락이 작렬했다. 충격을 받은 악마의 몸체가 구름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뭉쳤다.

몸을 부르르 턴 악마가 두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마녀 또한 갈색 눈을 번뜩거리면서 악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 상대는 나야.”

카라가 지팡이를 휘릭 돌렸다. 이윽고 재빨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악마도 양팔을 크게 벌리며 주문을 외웠다.

둘에게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기운이 서로 맞부딪쳤다. 마법이란 본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힘.

그리고 마법사란 공간과 법칙을 비틀어 자신의 의지를 현실에 발현시키는 사람들이었다.

카라와 악마는 자신들만의 내면세계로 들어가서 서로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악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부으며 카라를 공격했고, 카라 또한 가진 주문으로 대응했다.

마녀와 악마가 진땀을 흘리든 말든, 기사인 벨로크는 용감하게 달려 나갔다. 뒤편에서 불타고 있는 교회가 훌륭한 랜턴이 되어주었다.

“키에에엑!”

돌바닥을 바득바득 밟으며 다가온 구울 중 제일 선두의 녀석이 풀쩍 점프했다. 오기 전에 식사라도 한 것인지. 손과 이빨에는 이미 희생자의 살점과 피가 그득했다.

벨로크는 놈의 배를 채워줄 생각이 없었다. 손에 들린 검을 가뿐히 휘둘러서 놈을 반토막냈다.

촤아아악

끼얹어진 피가 일순 시야를 붉게 물들었다. 따갑고 간지러웠다. 하지만 벨로크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저 자세를 다잡으며 손에 들린 대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일제히 달려들던 구울 셋의 허리가 토막 났다.

벨로크는 쉬지 않았다. 그랬다간 몰아치는 구울들의 파도에 휩쓸릴 터였다. 그래서 끝없이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내려찍기. 횡베기. 사선베기, 대검이 번뜩 거릴 때마다 어김없이 세 녀석은 죽어나자빠졌다.

물론 놈들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틈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몇 놈은 이미 카라와 아델 쪽으로 가고 있었고, 또 다른 몇 놈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발목에 들러붙어서 갑옷을 갉아 먹고 있었다.

콰드득

추라도 달린 듯 다리가 무거웠으며, 이물질이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상관하지 않았다.

물리면 물리는 대로 놈들을 걷어차고 짓밟았다. 강철 그리브에 맞은 놈들은 어김없이 얼굴이 박살나며 뇌수를 흩뿌렸다.

팔을 망치처럼 휘두르기도 했다. 괴력의 팔이 쭉 뻗어 나가면 역시나 맞은 녀석은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몸을 뒤덮는 피와 썩어빠진 살점 등을 맞으면서 벨로크는 점점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말하자면 전투의 열기였으며, 기사로서의 투쟁심이었다. 심장이 두근 울렸다. 검을 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괴물들의 비명이나 악취, 모습, 몸에 와닿는 촉각 등.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구울들의 움직임은 느려졌으며 반대로 그의 검은 빨라졌다. 산양머리 악마와 싸울 때 하고 같은 느낌이었다.

구울들은 이제 벨로크의 몸에는 닿지도 못한 채, 분쇄되고 있었다.

“키아아악!”

바닥에 쌓인 시체가 산을 쌓을 무렵. 위기감이라도 느낀 것인지. 으르렁거린 구울들 수십 마리가 고갯짓했다. 이윽고 신호를 주고받은 녀석들이 일제히 점프했다.

허공에서 시체들의 파도가 벨로크를 덮쳐왔다. 금방이라도 그를 찍어서 곤죽으로 만들 기세였다.

벨로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심호흡을 하며 대검을 꾹 쥐었다.

그는 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어떻게 검을 휘두르면 저놈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 고민은 아주 잠깐이면 충분했다.

콰아앙

도살자가 굉음을 내뿜었고, 구울들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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