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마녀사냥
힘 스탯을 제법 찍어서 그런가. 예전만큼의 무게는 안 느껴졌지만, 여전히 묵직했다.
그건 저 앞에 서 있는 병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눈앞에 나타난 대검의 위용에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저런 걸 인간이 휘두른다고?”
“말이 돼?”
또 저 소리군.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인걸. 벨로크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멜른! 이 저주받을 새끼야!”
벨로크를 따라 나온 카라가 소리친 것이었다. 그녀는 엉망이 된 붉은 머리와 나체를 가릴 생각도 안 한 채, 영주를 손가락질했다.
“명예와 신의라고는 없는 비겁자 같으니! 네놈이 어떻게 나한테 그딴 짓을!”
영주 또한 지지 않았다. 아까 벨로크를 노려볼 때와는 다른 완곡한 적의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아가리 닥쳐라! 더러운 마녀야! 네년이 내 아들과 영지민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이니까!”
“그건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했잖아!”
“하! 내가 요상한 주문쟁이의 말을 믿을까? 신의 대행자의 말을 믿을까?”
“뭐? 교회가 뒤에 있다고?”
충격적인 사실에 카라가 멈칫한 순간. 벨로크가 몇 걸음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아델. 그녀를 지켜라.”
“알겠습니다.”
카라를 등 뒤로 보낸 아델이 방패와 곡도를 뽑아 들었다. 카라가 아델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였다.
“벨로크를 말려! 일단 초소를 중심으로 시간을 끌어보자. 내가 어떻게든 주문을 써볼게.”
아델은 순간 당황했다. 이년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졌다고 주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에 대해.
마지막으로 저 정도 병력에 겁을 집어먹은 마법사의 모습에.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데.’
아델이 약간의 사심을 담아 카라를 구석으로 밀쳤다. 혹시나 눈먼 화살이라도 맞으면 안 되니까.
짧은 비명과 함께 카라가 내팽개쳐졌다. 여기사의 매끈한 갑옷 너머로 수십 명의 무장병 사이로 달려드는 벨로크가 보였다.
“잘 봐라. 주문쟁이.”
“무슨···”
자신감 넘치는 아델의 말투에 카라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무리 대단한 완력을 가졌다고 해도 혼자서 수십 명의 전사를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더럽게 무모했다. 그런 생각을 한 건 하멜른 측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코웃음을 치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흥. 머리끝까지 피가 차올랐나? 용기와 만용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지! 쏴라!”
쐐애액
장전되어있던 쇠뇌들이 불을 뿜었다. 검은 선 수십 개가 벨로크에게 쇄도했다.
영주와 병사들은 자신했다. 이제 저놈은 끝났으니 뒤에 있는 마법사와 여기사만 처리하면 끝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벨로크는 대검을 마치 방패처럼 앞세웠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는 들어갈 만큼의 보호막이 만들어졌다. 쇠와 쇠가 부딪치자 화살들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뭣.”
병사들이 당황하든 말든 자세를 잡은 벨로크가 대검을 휘둘렀다. 병사들은 훈련받은 대로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방패 채로 우그러지며 상하체가 분리됐다.
“끄아아악.”
강렬한 검풍이 뒤편에 있던 병사들의 얼굴을 스쳤다. 이윽고 그들은 죽은 동료들의 내장과 피를 뒤집어썼다. 영주와 카라가 입을 헤 벌렸고, 피범벅이 된 병사들의 눈에 공포심이 깃들었다.
저 대검은 장식용이 아니었다. 진정 끔찍한 흉기였다. 병사들이 얼어붙으려던 바로 그때.
“겁먹지 마라! 놈의 무기는 분명 거대하지만, 그만큼 느릴 것이다! 그 틈을 노리는거다!”
하멜른 측 기사가 냉철하게 지시를 내렸다. 적절한 명령이었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의를 다잡았다.
검을 휘두른 벨로크의 사방에서 창칼이 날아들었다. 벨로크는 휘둘렀던 검을 재빨리 회수하는 걸로 응수했다. 대검에 부딪힌 창칼 또한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발. 안 느린뎁쇼?”
콰아앙
유언을 남긴 병사가 피떡이 됐다. 벨로크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방패를 들이밀면 온 힘을 담아 대검을 내려찍었다. 괴력과 검의 무게가 합쳐지면 병사들은 방패 째로 뭉개졌다.
앞에서는 창이 날아들었다. 고개를 슬쩍 틀어 창을 피한 벨로크가 병사를 어깨로 들이박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대검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일순 빛이 번뜩이며, 사방에서 피보라가 휘몰아쳤다.
뒤에서 검을 휘두르려던 병사, 옆에서 도끼를 찍으려던 병사 할 것 없이 토막 났다.
난전이 된 전장에서 삽시간에 십수 명이 죽어 나갔다.
여유롭던 영주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가 기겁하며 외쳤다.
“저··· 저게 뭐냐! 정녕 인간인가?! 뭣들 하냐. 화··· 화살을 쏴!”
하지만 궁수들은 망설였다.
“아군이 섞여 있어서 쏠 수가 없습니다!”
“이익. 기사··· 기사들은 뭣 하고 있나! 가라! 놈을 막아!”
영주의 명령에 뒤편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기사 다섯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달려가던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진정 괴력이다. 거기다가 빨라. 이렇게 된 이상. 협공을 해야 하오.”
“그건··· 명예롭지 못하지 않나?”
“개소리. 저자는 마녀와 내통한 악인. 명예를 지킬 필요가 없는 상대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 다들 물러나라!”
기사들이 소리치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이 황급히 물러섰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축축한 바지춤.
벌렁거리는 숨소리까지. 그 잠깐 사이 하멜른의 정병들은 패잔병이 되어있었다.
병사들이 물러서자. 벨로크를 중심으로 기다란 원이 만들어졌다. 그 안으로 기사 다섯이 난입했다.
번쩍거리는 판금 갑옷과 더불어 하나같이 충실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덩치가 유난히 컸다.
“로반의 케인.”
“아드벤의 그렌트.”
기사들이 앞다투어 자기소개를 했지만, 벨로크는 굳이 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틀어져 버린 관계. 곧 죽을 놈들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자세를 다잡으며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도록 도살자를 꾹 움켜쥐었다.
그 모습이 심기를 거스른 걸까. 기사들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그 중 유난히 덩치가 큰 사내. 그렌트가 앞으로 나섰다. 손에 들린 전투도끼가 흉악하게 빛났다.
“정녕 명예도 모르는 자로군. 결투를 앞둔 상대에게 적어도 가문의 이름 정도는 대야 하는 것 아닌가?”
묵직한 중저음의 음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꽤나 기사다운 말투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기가 찼다.
이게 무슨 궤변이야? 매일 검만 휘두르다 보니 뇌까지 근육으로 찬 건가? 그래서 한마디 해주었다.
“무슨 개소리인가. 수십 명대 하나의 싸움이 언제부터 신성한 결투가 된 거지?”
“···”
자신이 내뱉고도 아차 했는지. 그렌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전투도끼를 들어 올렸다. 주위에 있던 네 명의 기사들도 자세를 잡았다.
“으아아아!”
그렌트가 괴성을 지르며 전투도끼를 내려찍었다. 일격, 단 일격이라도 저 검을 받아낸다면 남은 동료들이 검을 찔러 넣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의 승리다. 그렌트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네놈 말대로 이건 정당한 결투가 아니다. 전쟁이지. 그러니까 비겁하다고 원망 마라.
그렌트가 속으로 중얼거렸을 때였다. 눈앞이 번쩍했다. 그렌트가 정신을 차린 순간. 그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이상했다. 몸이 너무나 가벼웠다. 눈동자를 비죽 굴려서 아래를 보자.
거대한 대검이 번뜩이며 동료들을 토막 내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동료들의 상체도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때서야 그렌트는 깨달았다.
자신이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죽었단 걸. 돌바닥에 처박히기 직전, 그렌트가 마지막 단말마를 내뱉었다.
“괴물···”
철푸덕
기사 다섯을 순식간에 썰어버린 벨로크가 검을 어깨에 척 걸쳤다. 제법 나쁘지 않은 경험치였다. 기사 하나당. 버본을 죽였을 때 하고 비슷했다. 실력은 있는 놈들이었군. 흡족해진 벨로크가 시선을 돌렸다.
팔이 잘린 채, 어머니를 부르짖는 병사.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넙죽 엎드린 병사.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신을 찾는 병사들까지. 다양한 모습들이 보였다.
공통점은 하나였다. 불처럼 타올랐던 전의는 얼음이라도 부은 듯, 완전히 식어버렸다.
그건 병사들을 호령하며 왕처럼 나타났던 영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멜른 영주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벨로크를 손짓했다.
“대체, 대체 뭐냐. 네놈들은··· 진짜 악마라도 되는 거냐?”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지. 영주.”
영주로부터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벨로크는 말을 이었다.
“저주를 퍼트린 건 루즈백 주교다. 넌 이용당한 거다.”
그제야 영주로부터 답이 돌아왔다.
“무슨··· 무슨 개소리냐. 그분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믿어달란 말은 하지 않겠다. 그저 세상에는 요상한 괴물들이 넘쳐난다는 것만 알아두면 좋겠군.”
“하하하··· 내 선의를 이용해서 죄인을 빼간 도적놈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주저앉은 하멜른 영주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윽고 미간을 찌푸린 영주가 악을 썼다.
“이건 적법한 전쟁도 아니며, 웬 도적기사가 침입해 나를 죽이려 드는 상황이지. 주위 영주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나? 내 친척들은? 너는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거다!”
“그녀를 구할 때부터 이미 각오했던 일.”
벨로크가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아니, 이건 미치광이 마법사의 변덕으로 일어난 일이지.”
어느새. 벨로크의 옆에 나타난 카라가 팔을 척 뻗었다. 벨로크는 검을 멈췄다.
“나한테 맡겨줄 수 있어?”
간곡한 표정이었다. 벨로크는 피식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래, 여인의 복수는 존중해줘야지.
“고마워.”
슬쩍 웃은 카라가 주문을 외웠다. 알 수 없는 음성과 함께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시뻘건 화염이 맺히기 시작했다.
눈뭉치처럼 작았던 것이 점점 커져서 마침내, 사람의 대가리만큼 커졌다.
카라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고, 영주의 얼굴은 반대로 점점 창백해졌다.
“이, 이 마녀들이이!”
“존나 아팠다. 개새끼야. 너도 느껴봐.”
으르렁거린 카라가 불덩이를 던졌다. 시뻘건 화마가 치솟았고, 영주는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이 쉽게 꺼질 리가 만무했다.
"끄아아악!"
어리석었던 영주는 결국 한 줌 잿더미가 되었다. 제 손으로 바친 영지민들의 뒤를 따라 간 것이다.
“어떠한 성자가 그랬지. 복수만큼 덧없는 것은 없다고. 진정한 복수는 용서라고···”
바닥의 그을린 자국을 본 카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야! 너의 말대로면 저놈도 이용당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야!”
사람 하나를 순식간에 불태운 마법사가 산발이 된 머리로 웃어 재끼자. 광인처럼 보였다. 하물며 홀딱 벗은 상태라면 더더욱.
얼어붙어 있던 병사들도 도망칠 정도였다.
“어··· 기분이 풀렸다니 다행이군.”
벨로크도 자신도 모르는 새 그녀에게서 슬쩍 떨어졌다. 이번에는 아델이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너도 고생 많았다.”
“그런데··· 저거 괜찮은 것 맞습니까?”
아델이 카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의 의문에는 새롭게 맞이하게 된 마법사의 정신 상태에 대한 걱정이 담겨있었다. 벨로크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마법사란 족속들은 원래 어디 한 군대는 나사 빠진 곳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니,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카라 정도면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저 정도면 귀여운 편이지.”
벨로크가 시체의 옷 중에서 그나마 상태가 좋은 것을 벗겨서 카라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까지 홀딱 벗고 돌아다녔단 걸 깨달은 카라가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벨로크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고마워. 벨로크.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건데. 당신 꽤 섬세하구나?”
이게 그 정도 소리를 들을만한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벨로크는 잠깐 생각했지만, 이내 슬쩍 웃었다.
뭐든지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진짜 기사라면 이렇게 행동했을 테니까.”
“무슨 소리야? 그럼 너는 가짜라는 소리야?”
카라의 의문에 아델이 자랑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 주인은 신의 은총을 받으셨다. 범인은 이해 못할 소리를 가끔 하시지.”
“아하. 괴력의 근원이 그거였구나.”
순식간에 납득한 마녀가 난장판이 된 성내를 죽 둘러보았다.
타죽은 영주에 토막 난 시체만 수십, 게다가 달아난 병사들도 많았다. 금방 소문이 퍼질 것이다. 어쩌면 현상금이 걸릴 수도 있겠지.
카라가 벨로크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거야? 바로 빠져나갈 거야?”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머릿 속에서 억울하게 불타 죽던 사람들과 이웃에게 돌을 던진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도시를 원래대로 되돌려야지."
이제는 사제의 탈을 쓴 음흉한 악마를 처단할 시간이었다. 어째선지 등에 멘 대검이 쿵쿵 울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