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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24화 (24/222)

24

뱀소굴

쿠르르릉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덩이는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송곳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존나게 따갑군. 벨로크는 온몸을 찔러대는 자연의 분노를 느끼며 슬쩍 눈을 감았다 떴다.

망막 위에 맺히는 물기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괴물이 보였다.

침침한 어둠이 내려앉은 주위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단연코 두 눈이었다.

선명함이나 깨끗함과는 거리가 먼 탁하고 불길하게만 보이는 뱀 눈.

눈동자의 크기만 해도 사람 머리통만 했으니, 몸집이 가히 짐작되었다.

그 순간.

콰과광

벼락이 쳤다. 한순간에 시위가 번쩍이며 놈의 실체가 드러났다.

예상대로 집 몇 채는 이어붙인 듯한 거대한 크기의 뱀이었다. 기다란 꼬리까지 합하니 훨씬 더 커 보였다.

‘하긴 저 정도 크기는 되어야 성을 부쉈겠지. 그게 아니라면 부실 공사를 했거나.’

벨로크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던졌다. 시꺼먼 머리칼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빗줄기가 너무 세서 안면이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머리가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이 뇌리를 관통했다.

벨로크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이제야 좀 살겠군.”

아델이 굴러가던 투구를 주워들고는 물었다. 그 의문에는 느닷없이 성을 부수고 나타난 악마 뱀에 대한 두려움도 담겨있었다.

“벨로크 님. 어째서 투구를···”

“시야가 너무 좁아져서 말이지. 저놈 덩치로 볼 때. 맞아주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지가 아닐 것 같군.”

방호를 높이기 위해서일까. 플레이트 아머의 투구는 두터웠으며 또한 무거웠다.

어떨 때는 방독면을 낀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벗었다. 루크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부터 상대하게 될 놈의 공격을 철판 몇 조각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호오. 내 본 모습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다고? 인간이?]

벨로크가 가만히 있자. 어둠 속에 잠겨있는 두 눈이 호선을 그렸다.

마치 개미의 발버둥이라도 보는듯한 시선이었다. 벨로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두 놈도 그렇고, 녀석들의 주인이라는 저놈도 그렇고, 악마 새끼들은 하나같이 인간들을 무시한다.

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벨로크는 저놈 역시 토막 내서 경험치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일단 반갑다. 나약한 인간아. 나는 보티스. 아스타로트 님을 모시는···]

“아델. 물러나라.”

흥미를 느낀 인간에 대한 감탄사일까? 새롭게 나타난 악마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벨로크는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쫑알대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검을 쥐었다.

“또··· 혼자 싸우시려는 겁니까?”

뒤편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허탈한 것 같으면서도 반쯤은 체념한 듯한 목소리.

응? 너까지 왜 이래. 고개를 슬쩍 돌리자 처량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델의 모습이 보였다.

벨로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그녀의 모습을 살핀 벨로크는 곧 종자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아델은 한없이 충성스럽지만, 자존심이 강하다. 물론 그만한 실력도 겸비하고 있다. 말만 종자일 뿐. 실력은 웬만한 기사 급이니까.

그렇지만 인간이 아닌, 인외의 존재에게 그 힘이 얼마나 통하겠는가?

그녀는 지금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벨로크의 짐작은 얼추 맞았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본다면 달랐다. 아델은 주인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이대로라면··· 내가 벨로크 님을 계속 모실 수가 있는 것인가.’

이미 한 번 부모의 손에 의해 버려졌기에 각인된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또다시 같은 일이 안 생긴다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벨로크는 그런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지만, 원래 인간이란 그랬다.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다.

“벨로크 님··· 전 죽어도···”

아델이 떠듬거리며 입을 열려는 순간. 벨로크가 아델의 머리를 툭 쳤다.

철 투구와 건틀렛이 만나자 퉁 소리밖에 안 울렸지만 이어진 벨로크의 말은 아델의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저 녀석만 잡고나면 강해지도록 도와주마. 공략집이 있거든.”

“아···”

강해진다는 말보다 도와준다는 말이 더 와 닿았다. 바보 같게도 그 말 한마디에 안심이 된다. 이대로 계속 주인의 옆에 있을 수 있다.

“이곳은 나에게 맡기고, 넌 마을 사람들의 피난을 도와다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눈물이 흐른다 한들, 쏟아지는 빗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델은 괜히 눈가를 슥 훔치며 뒤돌아서서 달렸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잠깐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 벨로크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망가진 성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악마는 아직까지도 쫑알거렸다.

[···그래서 나는 그분들을 따라서 이 땅으로 올라왔다. 그중에서 아스타로트 님 이야말로 진정한 군주의 자리에 걸맞은 분이란···]

“흥미로운 얘기는 잘 들었는데. 언제까지 할 셈이지?”

벨로크의 물음에 오히려 악마가 되물었다.

[내가 지금 너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무슨 기회?”

[내 알을 품을 기회를 말이다. 너는 보통 인간이 아니니 나를 받아들인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재물들도 당연히 따라오겠지.]

인심 쓴다는 듯이 말하는 보티스의 어조에 벨로크는 황당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제 손으로 에일리언 같은 것을 배에 품겠는가. 하지만 악마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나는 자비롭다. 지병으로 인해 죽어가던 이 땅의 주인을 살려주었다. 부모를 잃은 순박한 청년의 복수를 도와주기도 했지. 두 사람 모두 크게 만족했었다.]

뱀 영주와 샘의 이야기였다. 악마는 인간의 나약함이나 결핍을 파고든다더니 이런 식이었나. 벨로크가 비웃었다.

“괴물이 되어서 말인가?”

[의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 너희가 축사의 돼지를 동포로 여기지 않듯이 말이다.]

“결론은 괴물이란 거지. 이 미꾸라지 같은 악마 놈아. 잡소리가 길군. 어서 덤벼라.”

벨로크가 도살자를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그 거친 어조에 보티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툭 내뱉었다.

[유감이군. 아직 이 땅에서의 적응이 끝나지 않은 지금. 훌륭한 그릇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끝으로 보티스가 꼬리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무너진 성벽의 잔해가 마치 투석기처럼 날아왔다. 벨로크는 냅다 몸을 날렸다.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바위 몇 개가 박혀 들었다.

진흙이 퍼억 치솟고, 구정물이 사방으로 튀며 갑옷을 적셨다. 오싹했다.

단 몇 초.

판단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순식간에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보고 피한 것은 아니다. 달마저 저문 밤이었다. 소리를 듣고 피한 것이다.

‘체급 차이라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군.’

녀석의 시뻘건 눈이 마치 레이저처럼 쏘아져 왔다. 놈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이기도 했다. 벨로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격했다.

진창이 된 바닥 사이로 강철 그리브가 쭉쭉 빨려 들어갔다.

소용돌이치듯 잡아끄는 이 손길은 마녀의 그것처럼 끈적했으며 또한 집요했다. 하지만 벨로크는 결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쐐애애액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투석 때문이었다. 존나게 불공평하군. 어둠 속에서도 훤하게 보고 던져대다니. 뱀이라서 그런가? 레이저 사이트 그런 거냐?

빗줄기를 가르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불평과 함께 도살자를 뽑아 든 벨로크가 거칠게 휘둘렀다.

차가운 쇳덩이에 맞은 물방울이 산산이 조각났다. 뒤따라오던 투석도 마찬가지였다.

손이 지르르 울렸다. 반동으로 인해 몇 걸음 물러서기도 했다.

하지만 악전고투를 벌인 벨로크는 기어이 악마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숨을 몰아쉰 벨로크가 말했다.

“활잽이가 싫어지는 기분을 알겠군.”

[너. 정말 인간인가? 요정 검사나 난쟁이 전사라고 해도 이렇게 하지는 못할 텐데.]

성의 잔해 위에서 마치 왕처럼 앉아있던 보티스가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몸통만 한 바위들을 깨부수며 다가온다고? 어지간한 담력과 실력 없이는 절대 불가능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뿐.

[그런데 이제 어떡하려고? 그 대검을 내 머리에다가 꽂으려고? 네가 그럴 수 있을까?]

악마 뱀이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혀를 날름거리기도 했으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기도 했다.

명백한 도발이자 여유였다. 벨로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성의 잔해를 짓밟으며 악마에게 달려들 뿐이었다. 미끄러운 벽돌, 파묻힌 도적의 신체 일부, 탁자 등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운이 따라준 걸까? 순차적으로 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사방이 반짝거렸다.

놈이 아가리를 들이미는 것도 잘 보였다.

쉬이이익

벨로크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굉음이 울렸다. 피륙 대신 돌을 한가득 집어삼킨 녀석이 입가를 우물거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꼬리까지 휘둘러왔다. 벨로크는 연달아서 바닥에 엎드려야 했다. 풍압과 함께 귀가 윙윙 울렸다. 머리카락이 붕 떴다.

몇 번이나 그렇게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을까. 벨로크는 이를 악물며 자세를 다 잡았다.

거대한 몸뚱이에서 나오는 저 맹공은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게 하는 성질이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휩쓸리기만 해서는 당한다는 것을.

방법은 언제나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이곳 중세 랜드에 떨어지고 나서부터 늘 해왔던 대로.

검을 휘둘러서 스스로의 목숨을 쟁취하는 것.

꽈아아악

도살자를 움켜쥔 벨로크가 거칠게 휘둘렀다. 보티스도 꼬리로 답해주었다. 아예 짜부라뜨리거나 상황을 봐서 통째로 먹어 치울 생각이었다. 그만한 자신감이 악마에게는 있었다.

[무슨···]

하지만 꼬리에서 느껴지는 화끈함에 보티스가 당혹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깨부쉈다고 생각한 인간이 성의 잔해 위에서 멀쩡히 서 있었다.

놈이 들고 있는 거대한 대검에서는 보라색깔의 피가 뚝뚝 흐르며 빗물과 섞이고 있었다.

“뭐냐. 괜히 쫄았잖아. 아까 그 두 놈에 비해서 별로 단단하지도 않군.”

놈의 피부와 살을 가르는 순간. 벨로크는 알 수 있었다. 분명 튼튼했다.

묵직한 저항감이 그의 손을 강타하며 검 끝을 무디게 했으니까. 하지만 베어낼 수 있다. 아니, 조금만 더 힘을 줬다면 통째로 잘라냈을 것이다.

생사가 넘나드는 전투를 여러 번 경험한 기사로서의 감이었다.

흠칫

그 태연한 목소리에 악마 뱀은 순간 공포심을 느꼈다. 이 땅에 올라와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죽음에 대한 공포. 이윽고 그것은 녀석이 가진 자존심에 커다란 타격이 되어서 돌아왔다. 이 내가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크아아아!”

보티스는 인간의 정신에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것도 잊어먹고, 육성으로 괴성을 질러댔다.

뿐만 아니라 구덩이 같은 입속에서 넘실거리는 화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교회의 인원들을 태워 죽였던 불꽃의 권능이었다.

화르르륵

악마 뱀의 고개가 돌아가는 대로 불기둥이 따라다녔다.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나며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떨어지는 빗물도 그 기세를 잃어버릴 만큼 강렬한 열기였다. 액체가 순식간에 증발하며 자욱한 수증기가 넘실거렸다.

치이이익

“크르르르.”

보티스가 입가에 남은 불꽃을 스륵 삼키며 으르렁거렸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 감히 그따위 망발을 해? 재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보티스가 만족스럽게 웃을 때였다.

그 순간.

푸우욱.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에 보티스가 괴성을 질렀다.

무너진 성의 잔해에 몸을 파묻고 있던 벨로크가 기회를 노려 검을 찌른 것이다.

연약한 아랫배에서 악마의 피가 수도꼭지처럼 쏟아졌다. 숙련된 기사인 벨로크가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빗물 속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또다시 휘둘러진 도살자가 악마의 피륙을 찢고, 상처를 더욱 깊어지게 했다.

콰아아앙

악마 뱀은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돌덩이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발악하듯이 화염을 뿜기도 했다.

화려한 불꽃놀이 덕분일까. 벨로크는 녀석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상처 입은 채,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냥감의 모습. 저번의 염소 머리때의 발악과 같았다.

놈이 발광을 하든 말든 벨로크가 심호흡과 함께 정신을 다잡았다.

일전의 롱소드로 트롤의 몽둥이를 갈랐을 때처럼. 신체의 모든 힘을 양팔과 다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근육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렸고, 내면의 힘을 받아내고 있는 육체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게 폭발적인 기세가 벨로크 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일까. 보티스의 시선이 벨로크에게 향했다.

시뻘건 뱀눈이 작은 인간을 찢어져라 주시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게다가 이건... 위험하다! 악마이기 이전에 생물체로서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인정한다! 네놈이 강하단 걸! 그래. 육체를 이용한 승부는 네가 이겼다. 하지만 이것마저 막아낼 수 있을까?]

보티스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벨로크를 길게 응시했다. 흉흉한 기운과 함께 요사스러운 광채가 여러 번 번뜩였다.

마안이었다. 보티스가 가진 권능 중.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를 마주한 벨로크의 몸이 우뚝 멈췄다.

[뒈져라아!]

단 몇 초. 그거라도 충분했다. 보티스는 방금 전까지의 고상한 말투도 집어던진 채,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통째로 씹어 삼켜줄 생각이었다. 저 무식한 검은 이쑤시개로 써 주리라.

놈의 미약한 육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인간 놈이 갑자기 눈을 감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포기한 건가?’

보티스가 생각하던 때였다. 쏟아지는 빗소리 사이로 벨로크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스킬 레벨 올렸다.”

벨로크가 씨익 웃었고, 손에 들린 도살자가 악마의 머리통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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