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뱀소굴
황금색으로 빛나는 동전
피처럼 새빨간 루비
푸르고 시린 사파이어.
화려하게 빛나는 이 패물들은 사람들의 이기심을 한결같이 부추겨왔다.
피와 살인에 익숙한 도적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게 관짝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인지도 모른 채.
“오오오!”
“놈들의 목은 내꺼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침을 튀기는 입술 아래로 흉악한 무기들이 반짝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패 죽였는지, 딱딱하게 굳은 피딱지와 살점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벨로크는 그들의 탐욕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목숨줄은 존중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벨로크가 어깨에 걸쳤던 대검을 다시 내렸다. 그리고는 양손으로 묵묵히 쥐었다.
악마의 피와 살을 머금은 대검. 도살자가 육중한 몸체를 들어 올렸다.
눈이라도 먼 것일까. 도적들은 사람 몸통만 한 대검이 앞에 있든 말든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
“뒤져라아!”
“크하하하!”
손도끼, 롱소드, 모닝스타 같은 흉악한 무기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벨로크는 손에 든 대검으로 답해주었다.
악마 샘을 처리했을 때처럼 한 발 크게 내디뎌서 휘둘렀다. 그냥 단순히 휘둘렀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도적들의 무기들이 일제히 조각났다. 무쇠로 만들어졌든 대장장이가 담금질을 얼마나 잘했든 상관없었다.
부서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갑주를 입은 놈들의 상·하체도 분리되어 버렸다.
몇몇 키가 작은 놈들은 목이 잘려 나갔다.
촤아아악
핏물이 비산하듯 흩뿌려졌고, 하늘에서는 살덩이의 비가 내렸다.
“뭐···”
“어?”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동료들의 육편을 그대로 맞은 도적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사람 다섯이 갑옷 째로 토막 나는 광경을 보는 것은 흔한 게 아니니까. 말하자면 현실감이 없었다.
놈들이 당황하든 말든, 뒤돌아선 벨로크가 대검을 방패처럼 받쳤다.
챙 소리와 함께 뱀 영주의 쭉 뻗은 팔이 벨로크의 검에 의해 튕겨 나갔다.
뱀 영주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변신을 시작했다. 피떡이 되어버린 샘처럼 마치 허물을 벗듯 순식간에 괴물이 된 녀석이 길게 포효했다.
“크아아아!”
아까 전 녀석보다 경험치를 더 주게 생겼군.
리자드맨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끔찍하게 바뀐다면 저런 모습일까. 이건 19금이라는 수위를 넘어서는 것 같은데. 벨로크가 자세를 다잡으며 말했다.
“아델. 등 뒤를 맡기겠다.”
앞에 나타난 악마를 사냥하는 것에만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다. 아델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에라도 고개를 젓고 싶다. 그리고 주인을 따라 저 악마에게 칼침을 먹이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 겁에 질렸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으니까.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할 수 있다고,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아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멍청아. 지금은 네 욕심을 따를 때가 아니야. 명령을 따라야 할 때지.’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발목까지 잡을 수는 없었다. 강해질 것이다.
아델이 눈을 불태우며 곡도와 방패를 꾸욱 쥐었다. 이윽고 매서운 기세로 도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시발. 뭐야! 저게.”
“두목이··· 괴물?”
도적들은 당황했다. 평소 잔혹한 행동을 일삼고, 인육을 탐하는 등 끔찍한 식습관을 가진 두목이었지만, 그래도 인간이었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해도 인간의 형태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모습은 뭔가?
저건 마치 몬스터, 아니 요즘 바깥에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악마의 모습처럼 보였다.
‘우리가 그럼 지금까지 악마의 따까리였다고?’
아무리 강간과 약탈, 돈이 좋았다 한들, 악마를 따르는 것은 도의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지 않은가? 라고 도적들이 생각할 때였다.
“죽어라!”
도적들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눈이 돌아버린 여기사가 자신들에게 냅다 덤벼든 것이다.
아까 전,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던 기사도 두려웠지만, 전신을 판금 갑옷으로 두른 채, 칼날을 휘둘러오는 인간도 무서웠다.
도적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오··· 오지 마!”
“시발. 우리는 저 새끼가 악마인 줄 몰랐··· 컥.”
팔을 휘졌던 도적의 목이 대번에 날아갔다. 장인이 만든 곡도는 대검처럼 묵직하지는 않았지만, 그 예기가 남달랐다.
옆에 있던 다른 도적이 반사적으로 창을 내질렀다. 깡. 하지만 플레이트 아머는 폼이 아니었다. 창대가 툭 튕겨 나갔다.
도적의 얼굴이 구슬프게 일그러졌다.
“좆같은 판금 갑···”
도적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아델이 휘두른 방패에 머리통이 깨졌다.
방패에 묻은 피와 뇌수가 뚝뚝 흘렀다. 아델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도적들에게는 그 작은 소리가 마치 사형선고처럼 들려왔다.
“하··· 항복.”
몇몇은 무기를 버리고 자리에 주저앉았고, 몇몇은 도망쳤다. 하지만 아델은 자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사실상 분풀이에 가까운 행동이었지만, 그 덕분에 오커 마을을 좀 먹던 도적들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콰아앙
그때. 등 뒤로 굉음이 들렸다. 벨로크의 대검이 뱀 영주의 몸통을 짓뭉개는 소리였다.
“컥.”
피를 토한 녀석이 바닥에 누운 채, 꿈틀거렸다. 번들거리던 비늘은 산산이 조각나 흉측하게 벗겨져 있었고, 팔다리도 어딘가에 사는 심해어처럼 납작해져 있었다.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채, 위엄 넘치는 지배자 행세를 하던 녀석.
하지만 지금은 다 죽어가는 경험치 덩어리일 뿐이지. 이 녀석만 잡으면 레벨업을 하겠는데.
벨로크가 도살자를 들어 올렸다. 튼튼한 괴물의 몸뚱이를 몇 번이나 짓뭉개고 돌바닥도 부쉈건만, 이 무식한 대검은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제대로 휘두를 수만 있다면 진정 끔찍한 무기라고 부를 만 했다.
“자···잠깐! 벨로크 경!”
뱀 영주가 피를 토하듯이 말했다. 울컥. 아니, 진짜 피를 토했다. 녀석이 줄 경험치를 기대한 벨로크가 살짝 열기를 띤 눈으로 놈을 내려다봤다.
“왜?”
“자네. 그분의 사도가 될 생각은 없나? 내 뱃속의 알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영생을···”
콰아앙
벨로크는 뱀 영주의 발악은 무시한 채, 대검을 내려찍었다. 다시금 돌바닥이 박살나며 괴물의 모가지가 그 속으로 파묻혔다.
내가 미쳤나. 입에서 뱀이나 내뿜는 괴물이 되게. 단풍잎 마을의 누군가도 아니고.
“끝난 겁니까?”
등 뒤에서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델이 후련한 얼굴을 한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등 뒤로 산더미처럼 쌓인 도적들의 시체가 보였다. 스트레스 한번 거하게 풀었나 보군.
그래, 이제 다 끝났다. 둘이나 되던 악마도 다 죽였다. 이 마을에서의 볼일도 다 끝났다고 벨로크가 말하려고 했다. 그 순간. 흠칫 놀란 벨로크가 재빨리 바닥을 박차며 뒤로 물러섰다.
“왜··· 왜 그러십니까?”
벨로크의 심상찮은 기세에 아델 또한 긴장하며 자세를 다 잡았다. 벨로크의 양팔은 대검을 꽈악 쥐고 있었고, 시선은 뭉개진 뱀 영주의 시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들어오지 않았군.”
미약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아델이 투구를 벗으며 다시 물었다.
“네?”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무슨···”
경험치 그리고 레벨업. 싸움을 할 때면 주인이 가끔씩 중얼거리고는 했던 요상한 말.
아델은 아직까지도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주인의 분위기로 볼 때, 결코 좋은 느낌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벨로크는 한 손으로 대검을 든 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해 종자의 투구를 다시 씌워주었다. 그때.
쩌저저적
요상한 소리와 함께 이변이 일어났다. 구석에 박혀 있던 뱀 영주의 시신이 벌떡 일어난 것이다.
놈은 한참 동안 길거리의 풍선처럼 흐물거리다가. 목만 남은 상태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두 기사들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이 손뼉을 짝 쳤다.
[새로운 그릇으로 사용하겠다고 잡아놓으라 했는데. 오히려 당해버리다니.]
“머리가 날아갔는데도 말을 한다고···?”
“...”
아델이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벨로크 또한 눈을 빛냈다.
벌떡 일어난 시체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조금 더 힘을 비축해두고 싶었건만, 어쩔 수 없군.]
이제 보니 목소리는 귓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아델이 한층 더 긴장했다.
뱀 영주의 배는 이제 임산부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남산만 한 배가 콰드득 터졌다.
“키이익.”
쏟아지는 피와 내장을 거스르며 작은 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몸 전체가 칠흑 같은 검은색에 눈은 루비처럼 새빨갰다.
이윽고 몸을 부르르 턴 녀석이 샤아악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녀석을 중심으로 불길한 기운이 넘실거리며 시커먼 연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뱀 영주와 융합해서 뱃속에 꿈틀거리고 있던 악마 뱀 보티스.
벨로크는 몰랐다. 자신의 숙주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한발 앞서 놈을 먹어 치운 보티스가 지금 깨어나려 한다는 걸.
불완전했던 악마 바호메트 때와는 달리 지금 깨어나는 보티스는 거진 온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세는 느낄 수 있었다.
[꺼지지 않는 투지]가 새롭게 나타나는 괴물의 모습에 경고성을 울렸고,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기사의 육체도 맹렬히 반응했다.
그 사이로 현대인으로서의 기억이 슬쩍 스며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지.”
벨로크는 저릿저릿하게 느껴지는 악마의 기운을 뒤로한 채, 검을 집어넣고 아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베··· 벨로크 님?!”
“조금 거칠어도 이해해라. 아델.”
아델이 당황하든 얼굴을 붉히든, 벨로크는 그녀를 꽈악 붙잡았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달렸다.
입구 쪽에 쌓여있던 도적들의 시체를 넘어 문을 콰앙 박찼다.
아무리 빼어난 체력과 괴력을 가졌다고 해도 수십 킬로가 넘어가는 대검에 갑옷, 중무장한 종자까지 안고 달리는 건 역시나 힘들었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우르르르 거리는 성의 내부를 본다면 없던 힘이라도 내서 달려야 했다.
쿵쿵쿵
벨로크의 강철 그리브가 돌바닥과 거칠게 마찰했다. 샘을 따라서 올라왔던 구부러진 통로를 다시 건너고 계단을 내려갔다.
천장이 무너지며 돌조각들이 떨어지는 기세가 점점 대범해졌다. 벽에 걸려있던 횃불들도 그에 맞춰 강하게 춤췄다.
일렁이는 불빛 사이 시리도록 차가운 돌무덤을 벨로크는 계속해서 헤쳐나갔다.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발걸음도 점점 빨라져 갔다.
하지만 이 장소에 두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술에 취해서 자고 있었기에 위층의 상황을 모르던 도적들 몇이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이게 무슨···”
“시발. 뭔 일이야? 어이, 당신은 또 누구야.”
그들은 곧 통로 속에서 달려오는 벨로크와 아델을 보며 물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놈들의 말 따위 가뿐히 무시한 채, 지나쳤다. 도적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벨로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 새끼 뭐냐?”
“낸들 아냐? 대체 무슨··· 어?”
도적이 머리를 긁적이던 그 순간. 천장이 쿠르릉 무너지며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졌다. 이 불쌍한 도적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그것을 계기로 절벽 위에 지어진 오커성이 굉음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의 골자를 이루고 있던 지지대와 나무, 벽돌 등이 우수수 쏟아졌다. 흙먼지가 나풀거리고 밤부터 쏟아지던 비가 그 위를 적셨다.
치솟던 흙먼지는 흙탕물이 되어 줄줄 흘렀으며, 천둥마저 번쩍거렸다.
달빛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밤.
콰아아앙
돌로 된 무덤을 비집고 나온 악마. 보티스가 괴성을 질렀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