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뱀소굴
꽤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벨로크와 아델은 경계심을 대번에 끌어올렸다.
당장에 저 문이 열리고 화살 비가 쏟아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니까.
아델이 삼각형 꼴의 방패를 들어 올렸고, 벨로크도 부서진 탁자를 방패삼아 대검을 꾹 쥐었다.
밖에서 다시 한 번 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대동하지 않았습니다. 경. 혼자 왔습니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까?
아델이 벨로크를 바라봤다.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그 눈빛에 벨로크가 맡겨두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와라. 허튼짓 하면 대가리를 깨버릴 테니 그리 알고.”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쏘, 쏘지 마십시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찢어진 눈매에 살짝 통통한 몸을 가진 사내. 샘이 들어왔다.
두 사람이 자세를 잡았다가 이내 풀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 듯 뒤편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덮친다거나 화살이 날아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샘이 기겁했다.
“히, 히이익. 항복, 항복입니다.”
양촛불만이 슬쩍 비치는 공간에서 살벌하게 눈을 빛내는 두 기사.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나 창백함을 넘어 보랏빛으로 둥둥 떠 있는 동료들.
이런 광경을 보고도 대뜸 웃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물론 샘은 그런 미친놈이 맞았다.
뱀 영주의 직속 요리사로서 아멜라를 비롯한 살아있는 사람들도 토막 내서 마구 죽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다. 자신의 영주 아니, 주인이 명령을 내렸으니까.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하셨지.’
주인은 부하 일곱을 순식간에 토막 낸 젊은 기사에게 분노는커녕 호감을 느꼈다.
사내의 압도적인 무력과 육체가 탐났으니까. 그래서 자신을 보냈다.
최대한 정중하게 모셔오라고, 그가 이 일을 맡은 이유는 별것 없었다.
산적 같은 뱀 영주의 부하 중에서 그나마 말을 잘했으며, 표정을 제일 잘 감췄으니까.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인 두 번째 사도이기도 했고.
속으로 히죽 웃은 샘이 다시금 공포스러운 얼굴을 연기했다.
손을 벌벌 떨며 시종일관 눈동자를 굴렸다.
“경···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저는 샘...”
“아까 들었다. 그래서 용건은?”
말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샘은 포커페이스를 깨트리지 않았다.
그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제가 온 이유는 일전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가게에서 난동을 부리던 이 친구들 말이군.”
“네.
벨로크가 바닥에 있는 시쳇 더미를 가리키자. 샘이 조금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한 연기력이었다.
샘이 덧붙였다.
“감히 경의 명예를 모욕했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분노하신 경이 검을 뽑으셨다는 것도요.”
“그런 상황에서 참는다면 기사라는 이름이 아깝지.”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사죄의 의미도 드릴 겸 영주님께서 기사님들을 성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라고?”
벨로크가 관심을 가지자. 샘이 신나서 말을 뱉었다.
“보상해드리고 싶다더군요.”
벨로크와 아델이 고개를 돌려서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잠시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해줄 수 있나?”
아델의 질문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탐욕스러운 인간 놈들.’
샘이 눈을 슬쩍 떴다. 얇디얇은 눈매 사이로 뱀 같은 눈이 잠깐 드러났다.
그 순간. 벨로크의 마음속에서 기묘한 파동이 일어났다.
‘이건···’
일전 산양 머리 악마 바호메트를 만났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린 것이다.
벨로크는 이걸 잘 알고 있었다.
내면속에 존재하는 스킬 중 하나.
[꺼지지 않는 투지]는 강대한 적을 마주했을 때. 마음을 다잡아주고 공포심을 몰아 내준다.
이 스킬 덕분에 벨로크는 늘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런 그가 이런 꺼림칙한 기분을 느낄 때는 단 하나.
스킬 레벨의 부족.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눈앞에 있는 이 샘이라는 사내.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악마다.
‘영주가 악마가 아닌가? 아니면 이놈이 영주? 그게 아니라면 악마가 둘?’
벨로크는 마음속의 동요를 얼굴에 드러낼 뻔했지만, 이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벨로크가 선반에 두었던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알코올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때. 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델과 대화하느라 벨로크에게 신경을 못 쓴 모양이다.
“황금을 드리겠습니다. 아주 많이요.”
“벨로크 님이 받은 모욕을 돈으로 처리하겠다는 거냐?”
아델이 비아냥거렸다. 샘이 당토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부하들의 무례에 대해서 정식으로 사과도 하실 생각이십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벨로크 님.”
아델의 눈빛은 명확했다.
이대로 샘을 따라 성으로 들어가서 악마가 된 영주를 대번에 쳐 죽이자는 거였다.
벨로크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꼬였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변수가 끼어든 것이다.
벨로크는 망설였다. 그 순간. 철컥하며 쇳소리가 울렸다. 메고 있던 도살자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한 것이다.
등 뒤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에 벨로크는 내면속에 있던 망설임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빈자리로 기사로서의 투쟁심과 용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덧붙여서 경험치에 대한 욕망도.
‘대체 왜 꼬리만 개처럼 겁먹은 거냐? 영주의 정체를 확인한 다음. 이놈도 같이 죽여버리면 그만 아닌가?’
그래, 그는 자신이 있었다. 충직한 부하도 있었으며, 뛰어난 장인이 만든 갑주와 무기도 있었다.
꾸준히 모아온 스킬 포인트도 있었다.
악마가 둘이라면 어떤가? 둘 다 쳐 죽여 버리면 그만이다.
벨로크의 시선이 시종일관 미소 짓고 있는 샘에게로 향했다. 음험한 박쥐같은 새끼. 아니, 뱀 새낀가?
벨로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좋다. 영주를 뵈러 가겠다. 안내해라.”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벨로크의 속도 모른 채, 샘도 마주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제 발로 사지를 찾아오는구나.’
극진한 대접은 빈말이 아닌지. 샘은 자그마치 마차를 끌고 왔다.
“타시죠.”
샘이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벨로크와 아델을 마차로 이끌었다. 중무장을 한 두 명의 기사가 타자. 마차의 나무 바닥이 끼이익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고삐를 쥐고는 부드럽게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럇.”
히히히힝
말채찍이 휘둘러지고 두 필의 말이 앞발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이두 마차가 오커 마을을 지나서 뱀 영주가 기거하고 있는 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자갈로 가득한 흙바닥을 툭툭 쳤고, 고여 있던 웅덩이도 철퍽 짓밟았다.
말들이 콧바람을 거칠게 뿜었다. 평평한 지면을 벗어나 절벽과도 같이 깎아지른 길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 있는 성이라. 퍽 낭만적이군.”
창틀에 팔을 기댄 채, 밖을 바라보고 있던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그 옛날 싸구려 흑백영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두운 고성에서 등장하는 흡혈귀라던가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같은 것.
어렸을 때 부모님의 손을 꼭 잡고 함께 팝콘을 먹으며 보던 오래된 필름들.
그랬던 소년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요상한 게임 속 세상에 빠져서 진짜 악마를 쳐 죽이러 가고 있지.
좆같은 상황이었다. 꿈같은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몸에 두른 철갑과 대검이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벨로크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쿠르릉 하면서 천둥이 쳤다. 그것을 계기로 부슬부슬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궂은 날씨 때문일까. 뱀 영주가 기거하는 성은 완연한 어둠에 휩싸인 채, 스산한 기운을 뿌려댔다.
음울한 분위기 때문일까. 이를 본 아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아무리 용감한 종자라고 해도 막상 적의 아가리에 몸을 들이미는 것은 긴장 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벨로크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옆에 붙었다. 앙증맞은 머리를 슬쩍 기대기도 했다.
아델 역시 온몸을 차가운 갑주로 두른 것은 마찬가지였다. 온기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벨로크는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충성스러운 종자가 고독감을 해소해주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벨로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아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마차가 도개교를 넘어 성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도착했습니다.”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된 샘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품에서 기름을 먹인 후드를 건네주었다.
샘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귀하신 분들을 젖게 할 순 없죠.”
벨로크와 아델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걸 받았다. 어마어마한 정성이었다.
뱀 영주의 정체에 대한 확신과 샘의 정체를 몰랐다면 대번에 감동하고 속아 넘어갈 만큼.
21세기에서 태어났다면 연기자를 해도 잘했겠군. 벨로크가 그런 생각을 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안내하겠습니다.”
샘이 벽에 걸려있던 횃불을 하나 든 채, 움직였다.
돌로 된 계단을 오르고, 통로를 가로질렀다. 중간중간 뱀 영주의 부하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거친 도적 같은 놈들이었지만, 그들은 샘을 보자마자 하나같이 벌벌 떨었다.
“허억. 샘님. 어째서···?”
“영주님의 손님들을 모셔왔네.”
“아. 그러···시군요. 그러면 고생하십시오.”
부하는 샘과 얘기를 하는 사실 자체가 불편한 듯 시종일관 눈을 굴리다가 재빨리 자리를 박찼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보군요. 아무튼 다시 가시죠. 영주님은 꼭대기 층에 계십니다.”
샘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허허 웃으면서 다시금 길 안내를 했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까.
마침내 성의 꼭대기 층에 도착한 샘이 거대한 문 앞에서 노크했다.
“영주님. 샘입니다. 두 기사님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모셔라.”
중성스러운 목소리였다. 여성의 것처럼 꾀꼬리 같으면서 살짝 거칠기도 했다.
문이 열리자 등을 돌린 채, 창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불붙은 횃대와 은촛대 등이 사방에 놓여있어서 그런지 밝았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경. 미약하나마 이 땅을 다스리고 있는 베른 오커라고 합니다.”
뱀 영주. 오커 마을의 지배자이자 식인을 즐기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남자.
겉으로 보기에 그는 멀쩡한 중년인이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갈색 머리와 쭉 뻗은 팔다리가 인상적인 사내.
하지만 벨로크는 알 수 있었다. 저 영주라는 놈에게서도 같은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옆에서 히죽 웃고 있는 저 샘이라는 놈하고 같은 꺼림칙한 기운.
악마나 괴물의 냄새. 벨로크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진짜 악마가 둘이었군. 그렇다면 경험치도 두 배인가?’
이 녀석들만 족치면 또다시 레벨업 이겠는데.
따위의 생각을 한 벨로크는 샘의 안내를 받아 아델과 함께 식탁 앞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뱀 영주가 앉아있었다. 세 사람 사이를 여러 개의 촛대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음영이 비치는 뱀 영주의 얼굴은 창백을 넘어 푸르게 보일 정도였다.
벨로크가 뒤늦게 괴물의 인사를 받았다.
“벨로크라고 합니다. 이쪽은 종자 아델.”
“그렇군요. 벨로크 경이라. 이것 참 먹음직··· 아니, 멋진 이름입니다.”
기분이 좋은 듯 뱀 영주가 손가락을 탁탁 두드렸다.
네 사람은 아니, 두 명의 사람과 악마들은 한동안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악마들은 곧 있을 만찬을 기다리며, 인간들은 이 악마 놈들과의 대화에서 혹 쓸 만한 정보라도 있나 싶어서.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뱀 영주가 손뼉을 짝 쳤다.
배가 고파서 도저히 안 되겠다. 일단 애피타이저라도 먹고 싶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좋은 고기가 들어왔는데.”
샘도 마주 웃으며 거들었다.
“오늘 갓 잡은 겁니다. 무척이나 싱싱하죠. 어떠십니까. 경.”
이를 알아들은 아델이 헛구역질을 했다. 벨로크가 비아냥거리듯이 물었다.
“그 고기가 혹시 사람고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