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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9화 (1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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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소굴

아멜라는 노예 소녀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쇠고랑을 차게 된 것은 아니었다.

부모라는 작자들이 자신을 은화 몇 푼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멜라는 한순간에 노예가 된 자신의 신세보다도 부모에 대한 배신감이 더 컸다.

눈으로는 우는 시늉을 하면서도 입가는 비죽 올라가 있는 꼴을 보는 것이 정말이지 역겨웠다.

‘그딴 놈들은 부모도 아니야. 그래, 차라리 팔려 가서 몸이나 파는 것이 낫겠네.’

아멜라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한 몇 년 구르다 보면 자유의 몸이 되지 않을까? 아니면 괜찮은 귀족이나 부호의 눈에 띄어서 신세를 필 수 있을지도 몰라.

부모에게 버림받은 시골 소녀는 그 나름대로 행복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그녀가 갇혀있는 나무 우리의 안으로 또래의 소녀나 소년들이 점점 들어오게 되면서 아멜라는 이내 아무런 생각도 못 하게 되었다.

‘좁아. 냄새나. 대체 뭐야··· 어디로 가는 거지?’

와중에 자신들을 데려가고 있는 덩치 큰 사내들이 하는 얘기가 귓가로 들려왔다.

“영주께서 제발 좋아하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가급적이면 어린놈들로 데려오라고 하셨어. 부드럽다고.”

아멜라는 사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몇 아이들이 몸을 떠는 것은 보았다. 대체 왜 저럴까? 물어봐야 하나? 귀찮은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결국, 피곤을 못 이긴 아멜라는 깜빡 잠이 들었다.

아멜라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거대한 식칼이었다.

어깨가 화끈거렸다. 얼굴에 무언가가 팍 튀었다. 따뜻했다.

고개를 돌리자 어딘가 익숙한 팔뚝이 생선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

“깨버렸네··· 목부터 칠 걸 그랬나?”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를 쳐다보자. 찢어진 눈에 통통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씨익 웃고 있었다.

‘어?’

아멜라가 입을 헤 벌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단순한 현실 부정일지도 몰랐다. 저기 떨어져 있는 살덩이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 순간. 끔찍한 격통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작게 벌렸던 앙증맞은 입이 곧 끔찍하게 찢어졌다. 연약한 팔다리가 쉴 틈 없이 버둥거렸다.

그에 화답하듯 사내도 미친 듯이 웃으며 식칼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끈적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뱀 영주의 전속 요리사 샘이 도축된 고깃덩이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오늘은 스테이크로 준비해드려야겠군.”

세상은 소녀의 생각보다 훨씬 잔혹했다.

몸을 감싼 플레이트에 거대한 대검. 이 육중한 무장은 벨로크로 하여금 말에 올라탈 수 없게 만들었다. 단련된 전투마조차도 그의 무게를 얼마 견디지 못하고 쉽게 지쳐버린 것이다.

말을 탈 수 없는 기사라. 벨로크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자연히 종자인 아델 또한 걸어가야 했다. 아델이 벨로크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마차를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더 품위를 지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아니면··· 어디 괴물이라도 한 마리 길들여서 타야 하나? 뭐, 급하지는 않다.”

아델의 걱정에 벨로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루크가 준 대검은 무거웠지만, 플레이트 아머는 로벤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거기다 무슨 솜씨로 만든 건지 움직임에 대한 제약도 없었다. 벨로크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으로 걸었다.

그렇게 얼마간 이동했을까. 마침내, 뱀 영주가 다스리는 땅. 오커 영지가 나왔다.

거리마다 돌 판석이 깔려있던 무역도시 로벤과 달리 이곳에 화려함이란 없었다.

누런 성벽은 곳곳에 금이 가 있었으며, 흙바닥에는 말똥과 인분이 가득했다.

주민들의 얼굴도 활기참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래를 기약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하루하루 버티며 산다는 느낌이 강했다.

사실 이 시대의 영지 대부분이 이랬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거칠다. 21세기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야말로 야만의 땅인 것이다.

성문 앞은 검문을 통과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다.

“나리들··· 제가 가진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그런데.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요?”

“어엉? 동화 몇 개 정도는 더 줘야 하는 거 아냐? 이걸로 뭘 하라고? 목에 기름칠도 못 하겠구먼.”

“저··· 그것이.”

“뒤지기 싫으면 더 내놓으쇼.”

배가 툭 튀어나온 상인이 산적처럼 생긴 영지 경비병에게 손을 쓱쓱 비비고 있었다.

어떻게든 통행세를 깎기 위함이다. 하지만 영지 경비병은 가차 없었다. 수틀리면 칼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다른 영지의 경비들보다 훨씬 험악했다. 결국 상인은 구리 동전 몇 개를 더 내고서야 울상이 된 얼굴로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경비가 킬킬 웃으며 동전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목청껏 외쳤다.

“다음!”

“떠돌이 용병이오. 일자리를 찾아···억.”

“비켜라. 무지렁이.”

신분 확인을 하는 도중 누군가 자신을 걷어차자, 용병이 인상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시발. 어떤 개새끼가... 헉.”

하지만 그는 금세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중무장한 기사 둘이서 살벌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사람 덩치만 한 검을 매고 있었고, 여인은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머. 먼저 하십시오! 나리들!”

용병은 눈치가 좋았다. 연신 굽신거리며 쏜살같이 자리를 비켰다.

경비도 조금 전 까지의 오만한 기세를 대번에 버렸다. 이번에는 경비가 먼저 손을 쓱 비비며 헤헤거렸다.

썩은 이빨 몇 개가 꺼멓게 빛났다.

“고명하신 기사 나리들이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영주께 기별을 넣어드릴까요?”

기사들은 어쨌거나 준 귀족, 요청한다면 영주 성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영주가 악마라는 의심을 품고 온 두 사람은 상황 파악도 못한 채, 적진으로 들어갈 생각 따위 없었다. 아델이 팔짱을 척 끼며 거만하게 말했다.

“네깟 놈이 알 필요는 없다. 비켜라.”

명백히 꺼지라는 태도.

경비는 젊어 보이는 둘의 외관과 오만한 말투에 속으로 시발 걸렸지만, 감히 기사들에게 말대꾸를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물론입니다요! 자. 나리들 지나가십시오! 오커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요!”

벨로크와 아델이 지나가자. 한숨을 내쉰 경비가 옆에 있던 동료를 손짓해서 불렀다.

“어이, 쿤.”

“아아. 알고 있어. 두목한테 말하라는 거지?”

쿤이 두 기사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두목은 낯선 방문자들을 싫어했다. 특히나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새끼야. 두목이 아니라. 영주님. 너 계속 그렇게 입 놀리다가 먹힌다?”

“···시발. 알았다고.”

“처신 잘해. 엉?”

쿤이 가래침을 퉤 뱉으며 마을 위쪽 절벽에 위치한 성을 향해서 뛰어갔다. 요주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영주께 알린 경비가 다시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다음!”

성문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마을에 들어섰다.

‘좀 이상한데.’

벨로크가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는 경비 한 명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아델이 촌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선 정보부터 얻어야지.”

영주가 진짜 악마에게 씌어서 산 제물을 탐하는 건지. 아니면 영주의 공포정치에 놀란, 입 가벼운 행상인들의 헛소리인지 진위를 가려야 했다.

“여관이나 술집으로 가실 겁니까?”

두 가게 모두 마을의 토박이나 외부인들이 한 곳에 모이는 자리였다. 소문을 듣기에 좋은 곳.

하지만 벨로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더 좋은 곳이 있지.”

동쪽에 위치한 신성 왕국만큼은 아니었지만, 아드리아 왕국 또한 교회의 영향력이 대단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십자가가 박힌 건물이 한 채씩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악마가 이 땅에 강림했다면 교회가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받았으면 써먹어야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좋고.”

빛의 기적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는 훌륭한 조력자였다.

벨로크가 품속에 있는 노사제의 추천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일단 교회로 가자.”

“알겠습니다.”

사지 중 한 곳이 잘린 채, 구걸하는 거지. 고된 농사일로 허리가 잔뜩 굽은 농부들.

우물가에서 물을 퍼가는 아낙 등. 수많은 사람이 벨로크와 아델을 지나쳐갔다.

그들은 한결같은 눈으로 두 사람을 두려워했다. 이 시대의 기사라는 족속들은 대부분 수틀리면 칼을 휘두르는 깡패집단이었으니까. 촌부들의 공포를 뒤로한 채 얼마나 걸었을까.

교회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꼬이는군.”

“역시나 이 마을··· 이상합니다. 아까 경비들의 상태도 그렇고.”

“경비라기 보다는 도적같아 보이기는 했지.”

“맞습니다. 입에서 술 냄새도 나더군요.”

한껏 흐트러진 기강과 거친 태도, 하지만 그건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진짜 문제는 눈앞에 있는 교회의 상태였다.

불에 홀라당 타버려 재만 남은 건물터와 툭 부러진 십자가 문양이 을씨년스러웠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다른 건물들도 아닌, 교회만 파괴되어있다? 벨로크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확실한 것 같지 않나?”

“그렇습니다. 노골적이군요.”

때마침 주위를 지나가는 마을주민이 보였다. 눈치 좋은 아델이 주민을 불렀다.

“너. 이리 와 봐라.”

“왜! 왜 그러십니까요. 나리.”

멀쩡히 잘 지나가고 있는데, 갑작스레 기사에게 붙들리자 주민이 두려움에 떨었다.

“왜 교회가 이 꼴이 되어있는 거지?”

“그··· 그건.”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경을 칠 것이다!”

아델이 호통 치자 주민이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며··· 몇 주 전 이었습니다요. 마을에 굉음이 울렸습죠.”

“굉음?”

“네, 네. 어두운 밤이었는데. 느닷없이 교회 건물이 부서지더니, 스스로 불타올랐습니다요.”

벨로크가 물었다.

“굉음과 함께 건물이 무너졌다? 그렇다면 안에 있던 사람들은?”

“사제님들부터 시작해서 수사님들까지 싹 다 불에 타 죽었지요. 새까맣게 탄 시체란 건 정말 구역질이··· 우웁.”

“직접 본 모양이지?”

“집이 이 근처라... 정말이지 끔찍한 사고였죠.”

사고가 아니라 고의로 일으킨 것 아닌가? 악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교회는 눈엣가시였을 테니까.

확신을 품은 벨로크가 주민에게 다시 물었다.

“뭐 특이한 건 없었나?”

“특이한 거라··· 그, 제가 이걸 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마을주민은 무언가를 보기는 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한다는 말투였다. 미신과 마법이 실존하는 세상이었다. 평범한 주민들은 되려 그것들을 두려워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 사교도로 몰려 잡혀 들어가기도 했으니까.

이럴 때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었다.

아델이 검집에 손을 올리기 전에 벨로크가 주머니에 있는 은화를 하나 건네줬다.

“자. 이제 생각이 좀 나겠지?”

반짝거리는 그 광채에 주민이 입을 헤 벌렸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 밤 자신이 봤었던 생물에 대해서 기억하려 애썼다.

어둠 속에서도 유난히 번들거리던 피부와 쭉 째진 유리알 눈. 그래, 그건 마치...

생각하는 것 만으로 등골이 서늘해져왔다. 주민이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뱀 입니다.”

“뱀?”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거대한 뱀이었습니다요. 게다가 두 발로 걸어 다니기까지 하더군요. 전 처음에 제가 꿈을 꾼 줄 알았습니다요. 아니, 꿈이 맞나?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물이 존재하겠습니까요."

이번에는 산양 머리가 아니라 거대 뱀 악마로군.

주민의 횡설수설을 뒤로한 채, 벨로크가 자신의 생각을 툭 내뱉었다.

“뱀 영주?”

영주를 거론하자 마을 주민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허억, 기사님. 이곳에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면은 안 됩니다. 아무리 영주님이 입고 다니시는 갑주가 뱀 모양이라고 해도··· 경을 치십니다요! 영주님의 부하들이 항상 마을을 돌아다닌다구요!”

“그렇군. 이거 실례했네. 가보게.”

벨로크가 손짓하자. 주민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은화를 소중히 품에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아델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노인네의 말이 진짜로군요.”

“좆같은 세상이야. 괴물 천지로군.”

느닷없이 등장한 괴물 뱀과 뱀 영주라고 불리우는 지배자. 그 밑의 도적단 같은 부하들.

수백 명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놈의 정체가 사실은 악마라니. 벨로크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아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바로 가실 겁니까?”

그녀가 허리춤의 곡도를 만지작거렸다.

그 행동에는 지금 당장 성으로 쳐들어가서 수십 명의 병사와 악마가 된 영주까지 죽이자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뭐든지 당하기 전에 선공을 취한다. 용맹한 기사의 표본이었다.

동시에 무모하기도 했다. 벨로크가 아델을 만류하며 머리를 툭 쳤다.

“앗!”

“진정해라. 아직 녀석들은 우리들에 대해서 잘 몰라.”

성문을 넘자마자. 어딘가로 급하게 달려가던 경비.

영주는 분명 경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설마하니 오늘 처음보는 귀족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생각.

악마의 관점으로 따지자면 꼴랑 인간 둘이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할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의심 많은 놈이라면 분명 사람을 보내서 떠보겠지. 그 틈을 노리는 게 낫겠군.'

“그러면···”

생각을 마친 벨로크가 태연하게 말했다.

“일단 좀 쉬지. ”

중무장을 한 채, 산을 넘고 대로변을 건너왔다. 현실이 된 게임이다.

가만히 있어도 체력이 절로 차오르지 않았다.

밥도 먹어야 했고, 잠도 자야 했다. 마지막으로 끌고 온 전투마도 맡겨야 했다.

아델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뭐든지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테니.”

두 사람은 곧 오커 영지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여관으로 향했다.

기름칠도 안 한 문짝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마치 화음처럼 여인의 비명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벨로크와 아델은 문을 연 자세 그대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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