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여정
벨로크의 괴력을 못 이긴 메이스가 댕강 부러졌다. 자세를 잡던 트롤은 몽둥이를 치켜올린 상태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쿠우웅
흙먼지가 치솟았다. 트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어? 하고 보니까. 자신이 쓰러져 있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트롤이 누런 눈을 끔뻑거리며 다리를 살폈다. 기이하게 꺾여있는 살덩이가 보였다.
욱씬
그제서야 끔찍한 고통이 휘몰아쳤다. 포식자인 자신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통증!
트롤이 다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끄어어어어!!”
화살에 맞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리가 동굴을 쩌렁쩌렁 울렸다. 바닥의 돌들이 진동할 정도였다.
녀석에게 가까이 있던 벨로크는 귀를 부여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녀석을 빨리 끝장내버리기로 했다.
부러진 메이스 대신 롱소드를 들어 올린 벨로크가 힘껏 내려찍었다.
퍼억. 너덜너덜한 녀석의 가죽이 손쉽게 갈라지며 산산조각난 뼛조각들이 보였다.
일반적으로 절단 난 상처를 이어붙이는 것보다 조각난 것을 끼워 맞추는 게 더 어려운 법이었다.
이는 트롤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어마어마한 재생력에도 불구하고 트롤은 버둥거릴 뿐 곧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가세하겠습니다!”
상황을 보던 아델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롱소드에 이어서 장창 또한 트롤의 상처를 후벼팠다.
아델과 벨로크는 이에 그치지 않고 타오르는 횃불을 던져서 트롤의 상처를 지져버리기까지 했다.
피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자리를 찾아가던 살점이 다시 녹아내렸다.
치이익
상한 고기를 굽는 듯한 냄새와 함께 트롤이 다시금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
그리고 손에 들린 몽둥이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무질서한 그 공격에 바닥이 우르르 울리며 천장까지 진동했다.
트롤이 발광하자 벨로크와 아델은 일단 뒤로 물러섰다.
“다 잡았군.”
벨로크가 손에 쥔 검을 붕붕 돌렸다. 대형 몬스터의 사냥이란 으레 그랬다.
덩치가 워낙 크고 생명력이 질기다 보니, 한곳 한곳 피해를 누적시키며 체력을 뺀 후. 몸 어디 한 군대를 못 쓰게 만드는 것이 베스트였다.
신체 능력이 저하된다면 사냥의 위험부담도 현저히 줄어드니까.
트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일어섰다. 녀석은 시종일관 비틀거렸다.
다리 한쪽이 망가지자 그 육중한 덩치를 제대로 지탱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녀석의 누런 눈은 아직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놈이 몽둥이를 들어 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벨로크와 아델도 대비했다.
“크워어.”
하지만 트롤은 뜻밖의 행동을 했다. 손에 들린 몽둥이를 냅다 던진 것이다. 체구만큼이나 강한 힘에 의해 그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바닥에 깔아놓았던 몇몇 횃불이 풍압에 꺼졌다. 설마하니 하나뿐인 무기를 던질 줄이야.
아델이 당황하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그래서 벨로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피하···시”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무시한 채 벨로크는 정신을 집중했다. 팔뚝의 근육이 비죽 솟아오르며 갑옷이 조여들었다.
지면을 단단히 받친 허벅지도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의 손아귀 힘을 버티던 롱소드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스탯으로 강화된 근력을. 바위도 부수는 악마의 뿔을 부러뜨렸을 때의 흉포함도 믿었다.
어떠한 직감이 그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벨 수 있다고.
그래서 벨로크는 검을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찍었다. 일순 섬광이 일었다.
쩌어억
벨로크의 키만 한 나무가 반 토막으로 갈라지며 톱밥을 흩뿌렸다. 충격을 못 이긴 롱소드도 산산조각 났다.
나무토막이 두 사람을 가로질러서 바닥을 굴렀다.
“이게 되네.”
벨로크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뻐근한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점점 자신의 괴물 같은 근력에 적응하고 있었다.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최대치로는 얼마만큼 낼 수 있는지 알아가고 있었다. 다음에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으십니까!”
“멀쩡하다.”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그냥 피하셔야 했습니다.”
내가 피했으면 넌 피떡이 됐을 텐데?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봐?
벨로크는 직설적인 말을 삼키고 그녀를 달래주었다. 아델이 울상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다. 나를 믿어라. 아델.”
“벨로크 님···”
“그보다 녀석은 어디 갔지?”
한순간 너무 집중했던 나머지 괴물의 모습을 놓친 벨로크가 물었다.
“도망쳤습니다.”
아델이 낭패 어린 표정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바닥에 한쪽만 질질 끌린 자국과 핏자국이 보였다. 벨로크도 혀를 찼다.
그놈 참. 덩칫값도 못 하는 놈일세. 어찌 됐든 쫓아야 했다.
다리를 분지르고 태워놓기까지 했지만, 트롤의 재생력은 굉장한 것이라서 적당한 시간만 지나면 다시 팔팔해질 것이다.
“아델. 검을 다오.”
“여기 있습니다.”
아델로부터 멀쩡한 롱소드를 건네받은 벨로크가 놈을 쫓아서 입구로 향했다. 아델도 얼른 횃불을 들고 뒤따랐다. 그녀가 우려의 말을 냈다.
“통로가 좁습니다. 괜찮을까요?”
통로는 트롤 한 마리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크기였다.
공동만큼 날붙이를 휘두르기에는 여의치 않았다.
“싸우기 좋은 곳은 아니네. 부숴버릴까?”
벨로크가 건틀릿을 낀 손으로 돌벽을 툭툭 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산채로 매몰당한다면 괴력이고 뭐고 숨이 막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
“크르르르.”
그걸 알고서 기다린 건지, 아니면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건지 몰라도 통로 사이에서 이를 드러내는 트롤이 보였다.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약은 새끼.”
“창을 드릴까요?”
“아니, 이거면 충분하다.”
이번에는 안 놓칠 생각이었다. 벨로크는 손에 들린 롱소드를 꼬아 쥐며 달려 나갔다.
비좁은 공간.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 힘들었지만, 그건 트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이나 발로 후려치거나 몸으로 깔아뭉개는 것뿐이었다.
트롤은 전자를 택했다. 원숭이처럼 기다란 자신의 팔을 쭉 뻗은 것이다.
녀석의 갈고리 손톱이 시퍼렇게 날아왔다. 벨로크는 침착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이 흐릿하며 움직였다.
‘빗겨 치기’
트롤의 팔도 날붙이라고 인식한 그의 검술이 손안에서 재생되었다.
손톱과 부딪친 칼날이 매끄럽게 회전했고 트롤의 손은 애꿎은 흙바닥을 찍었다.
“크어?”
어느새 녀석의 목덜미 아래에 있던 벨로크가 롱소드를 비수처럼 찔러넣었다. 목에 구멍이 뚫린 녀석이 꺽꺽거렸다. 하지만 두터운 가죽 탓인지 얕았다.
게다가 특유의 재생력 덕분에 상처가 금방 아물고 있었다.
트롤이 다시금 흉성을 질렀다. 아예 드러누워서 벨로크를 깔아뭉개려고 했다.
벨로크는 매끄럽게 슬라이딩하며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엎드려있는 트롤의 등판에 올라탔다.
녀석이 움직이려 하자. 벨로크가 주먹을 후려쳤다.
괴력을 가진 무쇠 망치가 트롤의 대가리를 강타했다.
쾅쾅
트롤의 머리통이 샌드백처럼 흔들렸다. 눈동자도 요란스럽게 돌아갔다. 골이 흔들리던 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승마를 하듯 트롤을 타버린 벨로크가 속으로 생각했다. 마침내 이 지루한 사냥의 끝맺음이 다가왔다.
벨로크가 트롤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그 상태로 손에 들린 검을 트롤의 목젖에 갖다 댔다.
반대편 손으로는 롱소드의 검날 윗부분을 잡았다. 이를 지켜보던 아델이 경악어린 얼굴로 외쳤다.
"하프 소드!"
좁디좁은 공간. 통상적인 휘두르기나 찌르기로는 상대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을 때 유용한 검술. 하지만 그걸 트롤에게 사용하신다고?
본디 검술이란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육체적인 스펙이 다른 괴물에게는 잘 안 통하는 법이다. 하지만 벨로크의 괴력과 천재적인 재능은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서슬퍼런 검날이 트롤의 목에 걸렸다. 괴물을 위한 인간 단두대.
벨로크는 생각할 것도 없이 양손에 힘을 주고는 강하게 잡아당겼다.
검날과 마찰되는 건틀릿이 비명을 지르는 만큼. 트롤도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뿌드드득
살이 찢기고 뼈가 갈라졌다. 그 속으로 끈적한 피가 비죽비죽 솟으며 갑옷과 얼굴에 묻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멈추지 않았다. 무자비한 사형집행은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비명이 끊기고 바람 빠지는 소리만 울렸을 때.
통나무 같던 트롤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
주인의 믿을 수 없는 무용에 아델이 잠시 입을 벙긋 하다가 황급히 다가갔다.
“그저 감탄만 나올 뿐입니다."
이윽고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벨로크의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아무 말 없이, 아델의 체취가 배인 손수건의 감촉과 세심한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면속의 세계로 들어가 지금까지 잡은 도적단들과 트롤의 경험치를 비교했다.
트롤이 더 많았다. 잔챙이들 여럿보다 강한 놈 하나 잡는 것이 레벨업을 하기에는 더 좋은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스킬이 뜰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아델의 손길이 사라지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로크가 눈을 뜨자.
아델이 쭈그려 앉은 자세로 트롤의 시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가지고 온 병에 담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입니다만, 트롤의 피는 마법사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재료라더군요. 챙겨두면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연금술사 놈들도 환장하지.”
준비성 좋은 아델의 행동에 벨로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제발 휴식을 취해주십시오. 이런 건 종자의 일입니다.”
“같이하면 빠르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반박할 말을 찾지못한 아델이 입을 합 다물었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트롤의 피를 담고 가죽을 벗기고 시체도 끌어다 버렸다.
공동에 쌓여있던 철광석도 챙겼다. 강렬했던 전투만큼이나 힘든 것이 전후처리였다. 트롤을 죽일 때 보다 이게 더 힘들었다. 개 귀찮네. 벨로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우스 클릭만으로 파밍이 가능한 세계가 좋았군.”
“뭐라 하셨습니까?”
“그냥··· 세상에 쉬운 것 하나 없다고 느꼈지.”
벨로크가 어딘가 아련한 눈을 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델은 영문 모를 주인의 말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지막 말에는 이내 공감한다는 듯 옅게 웃었다.
“모두들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투박하지만, 뼈가 담겨있는 말이기도 했다. 벨로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스무 살도 안 먹은 네가 인생에 대해서 뭘 아냐고 묻기에는 험난한 세상이었다.
일찍이 철이 들어버린 부하의 모습에 벨로크가 쓰게 웃었다.
“다 챙겼으면 가자.”
상념은 여기까지. 이제 보상을 받으러 갈 시간이었다.
“진짜로 둘이서 잡았다고?”
루크가 피가 뚝뚝 흐르는 동굴 트롤의 수급을 보면서 눈꺼풀을 비볐다.
그러나 몇 번을 살펴봐도 똑같았다. 트롤 모가지였다.
게다가 절단면이 아주 깔끔했다. 무언가 굉장한 힘을 써서 단번에 잘라낸 듯한···
“속고만 살았나?”
벨로크가 의자에 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델 역시 루크의 놀란 얼굴을 보면서 비웃었다.
그리고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렸다.
“말하지 않았나. 늙은이. 내 주인이신 벨로크 님은 진정 위대하신 기사라고.”
루크는 아델의 말에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듣기만 했다.
“뭐··· 이런 괴물 같은 놈들이.”
“이제 무구를 만들어 주는건가?”
벨로크의 말에 루크가 입을 떠듬거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내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자살희망자들의 요구조건이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겼던 것 같은데.
루크가 헛 하면서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는 바닥에 찢어져있던 양피지 조각들을 황급히 모아서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후 큼큼 하면서 헛기침을 한 루크가 진정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인정하지. 자네들이 대단한 기사란 걸. 거기다가 트롤을 죽여주고 광산도 되찾아줬으니, 내 은인 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좋네! 무구를 만들어주겠네!”
띠링. 퀘스트 완료. 스펙업 이라는 신호음이 왠지 머릿속에서 울린 것 같았다. 벨로크가 흡족하게 웃었다.
“잘 부탁하지.”
“어디보자. 우선 자네는 갑옷이 있으니, 그걸 보강하거나 다듬는 식으로 하면 될 것이고. 저 녀석은···”
음 하며 인상을 찌푸린 루크가 줄자를 가져와 아델의 신체사이즈를 재기 시작했다.
아델이 몸을 꿈틀거리며 투덜거렸다.
“허튼 짓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루크도 참지 않았다.
“제발 닥쳐라! 이 빨래판 같은 녀석아!”
“뭐?! 뭐라? 이런 시발.”
“자네 종자라는 년은 대체 왜 이런가? 완전 야생마 같은 년 아닌가.”
또다시 난리가 날 뻔한 걸 뜯어말리고 나서야 치수 재기가 끝났다.
루크가 혼자서 중얼거리며 양피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적어 내렸다.
“여성용 풀플레이트 아머 하나. 그리고 무기가 필요하다 했지. 악마를 잡을 수 있는 무기. 이 하나 나가지 않을 만큼 튼튼하며 강력한···”
루크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두 사람을 손짓했다.
“잠깐 따라와 보게.”
세 사람은 통나무집의 뒤에 있는 별관으로 이동했다. 벽돌로 만든 창고처럼 보이는 공간의 문을 루크가 열쇠로 열었다.
드러난 광경에 아델이 입을 헤 벌렸다.
“이건···”
쇠 냄새와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창고 안에는 가죽이나 사슬, 판금 갑옷은 물론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흉악한 빛을 뿌리며 진열되어 있었다.
“전쟁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양이군.”
벨로크도 조금 감탄했다. 진정한 날붙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루크의 피땀 어린 결정체들.
기사에게 있어서 이곳은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거로 가져가란 것인가?”
벨로크의 물음에 루크가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처음부터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만들어 달라고. 게다가 이건 인간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괴물용이 아니라.”
“그러면?”
“지금부터 여기 있는 무기들을 부수게.”
루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