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여정
풀 플레이트를 가진다는 생각에 흥분한 걸까? 아델이 큰소리로 외쳤다.
“주인장! 어디 있나?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몰락가문 출신이라지만, 벨로크는 기사이자 귀족이었고 아델은 그의 종자였다. 이 세계의 관습법상 귀족은 결코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그들을 떠받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델의 행동은 정당했다.하지만 귀족을 싫어하고 예의를 따지는 대장장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예상한 벨로크가 머리를 짚었고, 예상대로 안쪽에서 욕설이 날아들었다.
“이런 빌어먹을! 어떤 새끼가 허락도 없이 남의 집 문을 열어젖히는 거냐!”
가래가 끼인 듯 탁하고 꼬랑꼬랑한 목소리로 연륜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델도 지지 않았다. 그녀는 일개 대장장이가 큰소리치자. 대번에 검을 뽑으며 외쳤다.
“늙은이! 어서 나와서 나의 주인이신 벨로크 경을 맞이해라! 실로 명예로우며 진실된 기사시다.”
“뭐? 기사? 뱀 영주가 나를 잡으라고 보냈나? 좆같은 소리!”
쐐애액
화답하듯 어둠 속에서 화살들이 날아왔다. 아델이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을 스친 화살에 분노한 아델이 대장장이의 어머니부터 시작해 할아버지까지 욕을 하며 냅다 돌격하려고 했다.
도발이 통했던 것일까. 대장간 안에 있던 루크가 불쑥 튀어나왔다.
탐스러운 수염을 가진 근육질 노인네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런 미친년이! 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 잘 걸렸다. 대가리를 쪼개주마!”
“미친 건 너다! 노망난 영감탱이 같으니. 감히 화살을 날려?”
첫 단추부터 거하게 꼬여버렸다. 벨로크는 으르렁거리는 둘을 보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다.
관습법으로 따지면 귀족을 모시지 않은 루크의 잘못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점과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벨로크가 보기에는 아델의 잘못도 있었다.
‘음.’
그렇지만 아델은 결국 나를 위해서 행동한 것 아닌가?
오히려 더 친한 사이일수록 챙겨주는 게 맞다. 팔은 안으로 굽어야 하는 것이다.
편협하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벨로크의 생각은 그랬다.
“벨로크 님! 저는 갑옷 같은 것 없어도 됩니다! 저런 미치광이의 것을 쓰느니 차라리 맨몸으로 싸우겠습니다.”
“누가 만들어 준다고 했나? 너희 같은 귀족 새끼들이 싫어서 이곳까지 온 것인데. 왜 계속 나를 괴롭히는 거지?”
“나의 주인께서 당신이 만든 무구가 필요하다더군. 하지만 귀족에 대한 예의라고는 없는 무지렁이일 줄이야.”
“정녕 뒤지고 싶은 모양이군. 오냐. 좋다! 오늘 시체 둘 치우겠군!”
말다툼이 격렬해지고, 기어코 유혈사태까지 오려고 하자. 벨로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구는 구해야 했으니 루크의 화는 풀어줘야겠고, 아델을 꾸짖기는 싫었다. 그래서 벨로크가 루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벨로크 님?!”
주인의 믿을 수 없는 행동에 아델이 비명을 질렀다. 루크도 눈을 크게 뜨고는 자기도 모르게 손에 들린 도끼를 떨궜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귀족이 평민에게 머리를 숙인다고? 평생을 귀족의 수발을 들면서 살아왔던 루크에게 있어서 이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루크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냐···?”
“노인장. 우리는 무구가 필요하오. 예식용이 아닌, 진짜 날붙이 말이오.”
무구? 고작 그것 때문에 이런 오지까지 찾아왔다고? 그렇다면 놈이 보낸 자객들은 아닌 건가?
루크가 자신의 은원관계를 떠올렸다.
“정말 뱀 영주가 보낸 것이 아닌가?”
“뱀 영주는 누군지 모르겠고, 이것 하나는 알고 있지. 당신이 난쟁이 장인들만큼이나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는걸.”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 땅딸보들의 솜씨는 나하고 비교도 할 수 없다.”
“더 뛰어나다는 얘기인가?”
“그게 무슨···”
태연한 그 목소리와 황당한 내용에 들끓던 분노도 가라앉았다.
루크는 화내던 것도 잊고 어느새 벨로크의 행동에 말려 들어 가기 시작했다.
벨로크와 루크의 시선이 마주쳤다.
젊은 기사의 눈동자는 일체의 흔들림도 없었다. 확신을 가진 자들만이 낼 수 있는 눈빛이었다.
정말 자신의 실력이 난쟁이보다 뛰어나다고 믿는 것이다.
루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 날붙이라고? 네놈. 그게 무슨 소리인지나 아는 거냐?’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었다.
아무리 독불장군처럼 살아가려고 해도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나 인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마음을 열게 했다.
평생을 바쳐온 길에 대한 인정욕구. 신념을 위해 고독한 길을 택한 대장장이의 마음속에도 그것은 남아있었다.
루크는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루크가 널찍한 나무 탁자에 앉은 채, 뜨거운 차를 한 잔 따라줬다.
벨로크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식기 전에 시작한 얘기는 식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악마를 사냥하기 위한 무구를 만들고 싶다?”
“풀 플레이트 아머도 하나 더 필요하네.”
“자네는 이미 입고 있는 것 같은데. 뒤에 있는 저 맹랑한 년의 것인가?”
“그렇지.”
루크가 벨로크의 뒤에 가만히 시립해 있던 아델을 가리켰다.
루크의 시선이 향하자. 아델이 인상을 와락 구겼지만, 벨로크를 한 번 본 그녀는 으윽 하더니 입을 꾸욱 다물었다.
루크가 난감하다는 기색을 하자. 벨로크가 품에서 보석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이곳 중세랜드도 물질로 안 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이라면 충분히 줄 수 있네.”
뒤에 있던 아델도 품을 뒤져서 그간 모아온 자신의 봉급을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아. 하더니 아까 전 도적에게서 약탈한 금반지도 손가락 채로 올렸다.
루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 같았다. 루크가 아델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안 좋아졌다.
“음···”
루크는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액수는 충분하고 대화도 잘 통한다. 눈앞의 젊은 귀족은 충분히 자신을 존중해준다.
손님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한 가지 있었다. 그 빌어먹을 괴물 놈!
루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우려를 표했던 건 비단 돈 때문만이 아니네. 검까지는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네. 하지만 풀 플레이트 아머까지 만들기에는 가지고 있는 철광석이 부족해.”
왜? 무엇 때문에 부족한데? 그것도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가.
벨로크는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이유부터 툭 뱉었다.
“동굴 트롤의 짓인가?”
“어떻게 알았나?”
다 안다는 듯이 말하자. 루크가 놀랐다. 그 반응에 벨로크는 확신을 얻었다.
아직 이 미래까지는 바뀌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스니크의 선례가 있었으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벨로크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산에서 올라오다가 놈의 흔적을 발견했지. 둥지를 튼 모양이던데.”
“음. 덩치가 굉장히 컸습니다.”
아델은 아까와는 달리 눈치 좋게 맞장구쳤다.
루크와 광산의 동굴 트롤.
벨로크가 저번 회차에서 깼었던 퀘스트의 이름이었다.
난데없이 나타나 그의 광산을 점거한 채 철광석을 캐는 것을 틀어막은 트롤을 처치하면 루크가 감사의 의미로 장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전형적인 RPG식 진행이었지.’
하지만 현실이 되어버린 RPG 세계는 그보다 좀 더 생동감이 넘쳤다. 괴물이 이웃이 되자.
당장에 생계와 목숨줄이 걸린 루크는 말 한번 잘했다는 식으로 열변을 토했다
“놈을 봤나?! 정말이지··· 그 곰보 새끼가 나타난 후부터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내가 기껏 모아놨던 철광석도 그 탐욕스런 괴물이 다 가로채 가버렸어.
다룰 줄도 모르는 멍청이가!”
“처리해주지.”
“뭣?”
“동굴 트롤.”
“군대라도 끌고 왔나?”
루크가 기대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둘 뿐인데?”
이어진 벨로크의 말에 루크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미친 건가? 아니면 젊은이의 오만인가.
트롤을 달랑 기사 하나랑 종자 끼리 잡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놈은 대형 몬스터.
적어도 숙련된 용병 수십과 기사 몇은 더 필요했다. 루크가 손을 저었다.
“내 노파심에서 말하네만, 목숨을 소중히 여기게. 눈앞에서 젊은 생명이 꺼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네.”
하지만 벨로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냥 게임을 플레이 할 때, 트롤을 어떻게 잡았는지만 떠올렸다.
‘칼침 좀 먹여주고 재생 못하게 불로 상처를 지졌었지?’
정리를 끝낸 벨로크가 말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지. 놈의 목만 있으면 무구를 만들어 줄 것인가?”
“아니, 그러니까 둘이서는 역부족 이라고 내 누누이···”
벨로크는 루크의 반응은 무시한 채, 양피지에다가 무언가를 써 내렸다.
“부탁하네.”
짧은 한마디만 남긴 채 두 사람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루크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두 사람이 나간 흔적을 바라보다가.
벨로크가 써 내린 양피지에 시선이 닿았다. 그가 양피지를 읽었다.
-어떤 악마나 괴물들을 죽인다고 해도 이 하나 나가지 않을 검과 녀석들의 공격을 능히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가벼운 갑옷이 필요하오-
“미친 새끼들...”
간만에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귀족이라고 생각했건만, 그저 명예와 업적에 눈이 팔린 불나방일 뿐이었나?
루크는 새로 온 손님들의 오만에 가까운 용기와 이 기발한 요구 조건이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는 정말로 단 둘이서 트롤을 잡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놈의 한끼 식사가 되거나 운이 좋다면 사지 몇 개를 잃은 채, 도망치겠지. 부디 여기까지는 피해를 안 줬으면 좋겠는데···
루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는 다 끝났나?”
“네.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트롤. 3미터가 넘어가는 덩치를 자랑하며 뛰어난 재생력을 가지고 있는 괴물.
얼굴이 곰보처럼 일그러진 이 거인을 숲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여행자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재앙이었다.
하지만 악마도 사냥한 기사인 벨로크는 태연했다. 주인이 그러자. 종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횃불과 방패를 들어 올린 채, 트롤이 사는 서식지로 들어갔다.
나스 밀림 근처에 사는 사냥꾼이나 요상한 비법을 가진 마법사는 트롤이 좋아하는 향을 뿌리고 유인해서 잡는다지만, 벨로크는 기사였다.
그래서 정공법을 택해야 했다. 용맹하게 들어가서 족치기.
동굴은 어둡고 축축했다. 그와 대비되듯 화끈한 열기와 함께 일렁이는 불꽃이 두 사람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횃불 빛에 반사된 벨로크의 얼굴은 꺼멓게 보이거나 주황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트롤이 아니라 그가 괴물처럼 보였다. 알록달록한 얼굴을 한 벨로크가 말했다.
“동굴이 생각보다 넓지는 않군. 조심해라. 검을 휘두르기가 여의치 않다.”
“알겠습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노린내가 진해졌다. 중간중간 인간이나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뼈 무더기도 보였다.
산적이든 방랑하든 순례자를 덮친 것이든 그들은 이 배고픈 트롤의 한 끼 식사가 된 것 같았다.
마침내 좁은 통로가 지나고 제법 널찍한 공동이 나타났다. 고약한 냄새가 진해졌다.
우적우적
무언가를 씹어대는 소리도 들렸다. 희미한 횃불 빛 사이로 덩치 큰 괴물의 실루엣이 슬쩍 보였다.
벨로크가 손짓했다. 아델이 미리 가져온 기름 묻은 장작에 불을 붙여 공동 구석구석 던졌다.
온기가 가득 차며 어두컴컴하던 동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철광석과 곡괭이가 보였다.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은 괴물의 모습도 훤히 보였다.
마침 식사 시간이었는지 트롤은 등을 돌린 채 무언가를 씹어먹고 있었다. 원숭이 같은 긴 팔로 사냥감의 뼈를 해체하기도 했다.
갈고리 같은 손톱에 묻은 살점을 쪽쪽 빨기도 했다. 괴물의 원초적인 식사 장면은 역시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크르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열기 때문일까. 트롤이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묻은 피와 툭 튀어나온 송곳니는 짓 물린 얼굴과 맞물려서 꽤나 끔찍했다.
녀석의 누런 눈동자가 제 발로 찾아온 먹잇감들을 포착했다.
쇳덩이를 입은 인간이 둘. 수컷은 아무래도 질기니 야들야들한 암컷부터 먹어야지. 생각을 마친 트롤이 씨익 웃었다.
벨로크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리고 인사 대신 손에 들린 석궁을 쏘았다.
쐐애액
트롤은 손에 들린 고깃덩이로 화살을 막았다. 녀석이 고깃덩이를 내려놓고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걸 기다리고 있던 아델이 석궁을 쐈다.
퍼억
“끄어어어!”
트롤은 무서운 괴물이었지만, 멍청했다. 이쑤시개가 찌른 듯 따끔한 느낌에 트롤이 비명을 질렀다.
작은 상처라도 고통은 고통. 트롤이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벨로크도 트롤을 향해서 마주 달려 나가며 말했다.
“아델. 견제만 해라.”
석궁을 집어넣은 아델이 한발 물러서며 창을 뽑았다. 그리고는 트롤을 노려보며 공동을 슬금슬금 돌았다.
강렬한 풍압과 함께 트롤의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벨로크는 버본의 강철 도끼가 강할지 저 몽둥이가 강할지 잠깐 고민했다.
‘튕겨낼 수 있나? 아니, 안 될 것 같은데?’
생각을 마친 벨로크가 방패를 놓고는 바닥을 굴렀다. 뒤통수가 서늘하며 투구가 지르르 울렸다.
한 바퀴 구르며 자세를 잡은 벨로크가 손에 들린 메이스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심호흡과 함께 트롤의 다리를 거세게 내리쳤다.
이름 없는 산의 지배자. 트롤은 피식 웃었다. 제 덩치의 반밖에 안 되는 인간이 휘두른 무기 따위 가소로웠다.
트롤은 자신의 강대한 육체를 믿었다. 빼어난 재생력을 믿었다. 한 번 맞아주고 곤죽을 만들어줄 셈이었다.
뻐어억
트롤의 한쪽 다리가 굉음과 함께 날아갔다.